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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1일 빠르잠의 성 곤라도 수도자

수성구 2022. 4. 21. 05:58

4월 21일 빠르잠의 성 곤라도 수도자

축일: 4월21일         

빠르잠의 성 곤라도 수도자

St. Conradus a Parzham

San Corrado Birndorfer da Parzham Religioso

St. Conrad of Parzham, OFM Cap. (AC)

St. Conrad’s Capuchin-Franciscan

Born:22 December 1818 at Parzham, Bavaria as Johann Birndorfer

Died:21 April 1894 of natural causes

Beatified:1930 by Pope Pius XI

Canonized:1934 by Pope Pius XI

Corrado = consigliere audace, dal tedesco = audacious councilman, from the German

 

 

곤라도(1818 - 1894)는 바바리아 지방 빠르잠 근처의 농촌출 에서 가난하지만

독실한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복되신 동정녀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매일 로사리오를 바쳤다.

 

젊은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후 하느님과 보다 깊은 일치를 위해 자신의 상속권을 포기하고

까푸친회에 평형제로서 입회하였다.

서원 후에는 유명한 "자비의 어머니 마리아" 성지인 알떼팅에 파견되었다.

그는 여기서 성지를 찾아 오는 가난한 순례자들에게 봉사하는 짐꾼의 직책을 받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40 여년 동안 자신의 직책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곤라도는 특히 성체성사에 집중하는 끊임없는 기도 생활로 이름 높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성 콘라드는 파르챰의 바바리아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배우지 못한 시골 사람이지만 매우 신심이 깊었으며,

아홉 자녀를 두었는데, 콘라드는 막내둥이였다.

어릴 때부터 그는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께 대한 깊은 신심 속에서 성장하였다.

양친을 여읜 후, 31세의 나이로 카프친회 평수사로 입회하여 1852년에 서원을 발하였던 것이다.

 

그후 그는 40년 동안 문지기 수사로서 봉사했는데, 순례자들의 무리가 끊임없이 몰려들었으므로,

애덕과 인내를 실천하며 사도적 정열을 불태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그는 특히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은혜를 받았고, 미래의 일을 알리는 은혜를 입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사후 40년이 되는 1934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콘라도는 1818년 독일의 바바리아 주 바쏘 교구인

작은 촌 파르잠(Parzham)에서 소박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건한 모친은 교육을 받아 어려서부터 성덕에 출중해

그 당시는 아주 드물게도 7세에 첫 영성체를 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어렸을 때부터 벌써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누구도 그의 앞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자는 없었다.

 

그는 어려서 양친을 잃어 일찍부터 고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세상 재물에 휩쓸리는 일은 없이 소년 시절을 깨끗한 백합화같이 보냈다.

그것은 물론 그가 신심 생활에 열심했기 때문인데,

세속을 떠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답을 지키며 끊임없는 기도로

하느님과 영적 교제를 해 온 덕분이다.

참으로 그는 기도를 극히 즐겨 노동으로 피곤해졌음에도

여전히 무릎을 끓고 밤을 새운 적도 여러번 있었다.

 

이 열심한 청년은 1851년 9월 17일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본받아

카푸친회 평수사로 입회해 수도회의 가난한 수도복을 걸치게 되었다.

그리고 1852년에 엄숙한 서원 의식을 마치고 나서는 장상의 신임이 유난히 두터워

중책임인 알도에팅에 있는 성녀 안나 수도원의 문지기 직책을 맡아보게 되었다.

 

 

그는 이 직책에 충실히 근무한 40여 년 동안,

세월의 흐름에 따라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대단히 힘든 때도 있었던 문지기를

조금도 불쾌한 안색을 보임이 없이 성심 성의껏 완수하며,

그 유명한 영지를 찾는 모든 방문객에게 온화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미소로서 접대하여

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콘라도는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고요한 수도 생활을 보내며

기도와 고행으로써 숭고한 완덕에 도달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았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 줄때는 무슨 좋은 말씀이나 훈계를 권면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애덕은 자신의 양식을 절약해 궁핍한 자에게 베풀어 줄만큼 대단했다.

특히 가난한 이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아이들 측에서도 그를 따르게 되어 그의 훈계를 잘 따랐고,

그도 그들을 만날때 마다 항상 마음을 터놓고 재미있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빵 같은 것을 나누어 주기 전에는 그들에게 기도를 바치도록 했다.

이는 아직 죄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의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풍부한 은총을 내려 주시기 때문인데,

콘라도는 사실 그들의 기도에는 많은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몇년 후 그 아이들 중 몇명은 사제가 된 자도 있었는데 이는 오로지 콘라도의 착한 지도와 기도 덕분이라 하겠다.

 

 

"우리는 기도해아 한다!" 이는 늘 콘라도가 했던 말씀이다. 그는 그 말과 같이 실지로 기도를 많이 했다.

새벽 3시만 되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기도를 바치기 위해 성당으로 급히 갔다.

그리고 그가 기도에 몰두해 하느님과의 상통으로 말미암아 만사를 잊고 있을 때

그의 입에서 불꽃이 나오며 그의 몸에서 후광(後光)이 비치는 것을 본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수사 콘라도는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기도했다.

그는 또한 수난하신 주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매일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때로는 몇시간이나 십자가 앞에 무릎꿇고 있을 때도 있었다.

 

수사 콘라도의 생애는 고요히 지나가,

마침내 하느님께서 1894년 4월 21일 이 충실한 종을 영원한 나라로 부르셨다.

때는 마침 토요일 저녁이었고 삼종소리가 읍내를 지나 은은히 먼 들로 사라지는 때였다.

그의 죽음을 전해서 들은 사람들은 모두 "성인이 돌아가셨다"고 하며 그의 죽음을 섭섭히 생각지 않은 이 없었다.

 

살아 있었을 때 자선사업을 많이 행한 콘라도는 사후에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많은 가난한 사람들, 고생하는 사람들은 그가 천국에 있으면서 계속 자기들에게 도움을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때로는 그의 묘지를 순례하고, 때로는 그의 전구를 구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풍부한 효험이 있는 것을 보고 콘라도에 대한 신뢰의 정은 점점 높아졌다.

그의 전구로 많은 은혜를 받은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1930년 6월 15일 복자품에 오르고,

다시 1934년 5월 20일 성령 강림 대축일을 계기로 장엄한 예식의 거행중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ofmcap)의 뿌리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가장 닮아 "제2의 그리스도" 라고 불리우는

아씨시의 작고 가난한 성 프란치스코에게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철저하게 따랐으며

그의 형제적 사랑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물에게까지 이르는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1209년에 성 프란치스코는"작은 형제회" 또는 "더욱 작은 형제들"이라 불리우는 수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이"작은 형제회"안의 개혁 운동으로 시작 되었는데

1528년 7월 3일 교황 클레멘스7세의 대칙서’Religionis Zelus’에 이어,

1619년 교황 바오로3세에 의해"작은 형제회" 세 개의 가지

- OFM(작은형제회),OFMConv(꼰벤뚜알작은형제회), OFMCap(카푸친작은형제회)-중의 하나로 인가되었습니다.

 

카푸친 형제들은 관상기도,고행,엄격한 가난,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였으며 복음에 대한 열렬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형제들은 단순한 전례 성서에 기반을 둔 설교,가난하고 소박한 생활 양식때문에 보통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푸친이라는 이름도 긴 세모꼴 두건(capuce)이 달린 갈색 수도복을 입었던 형제들에게

대중들이 붙여준 카푸치니(capucini)라는 별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카푸친은 기도의 교사로서

 

플라비오 로베르또 형제(o.f.m.cap. 전 총봉사자)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기도의 사람이기도 하고, 기도의 교사이기도 했다.

첼라노의 토마스는 우리에게 프란치스코가 "기도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기도 그 자체가 된 사람이었다"

(2 첼라노 95)고 이야기해준다. 

 

성 보나벤뚜라는  프란치스코가 그 기도 안에서 찾게 된 관계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한다.

 "현시를 봄으로써 그분의 영혼이 녹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상처들이 항상 그 눈앞에 있게되는

그 만큼 그리스도님의 수난에 대한 기억은 그 정도로 긴밀하게 그 분의 마음에 되새겨 있었다.........

프란치스코가 자기가 그 숨은 보물 , 그 값진 밝은 진주를 찾아냈다고 느끼게 되었다......."(대 전기 1.4)

 

프란치스코의 둘레에 있는 이들을 따뜻하게 하는 불은 기도의 결과인 그 불이었다: 

그 불을 다른 사람들이 매력적인 것으로 보아서 그 불은 그들을 이끌어

프란치스코를 기도의 선생님으로 삼아 그에게 찾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타인과 그 개인 경험을 나눌 수 있기 전에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발전하여 성숙해져야 했다.

고상 앞에서 바쳤던 그의 첫 기도에서 우리는 건전한 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의 거룩하고 진실한 뜻을 실행하도록.....제 마음의 어두움을 밝혀 주소서".

이 초기 때에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는데

 "사실 예수님께서 그분의 마음을 사로잡으셨다..."(1 첼라노 115) 

 

’주의 기도 풀이’에 이르렀을 때에는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조금씩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자기에 대한 근심은 타인과 함께 기도하는 것으로 변모되어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

모든 이를 당신은 사랑하도록 저희이 힘이 닿는 대로 그들을 이끌어...

저희 몸과 같이 저희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노래"에서 그 기도의 사회적 일면은 더욱 더 깊게 된다.

맨 처음으로 서방 그리스도의 영성에서

자연의 요소들은 "형제 자매" 라는 친밀한 용어로 묘사되는 존경을 받는다.

프란치스코는 그와 함께 기도하도록 온 누리(우주)를 초대한다.

같은 주제는 1221년의 회칙 23장에 영향을 끼친다.

형제들의 기도에 달려있는 그 기쁨은 그들과 함께 노래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되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와 그 첫째 형제들은 교회에 새롭고 놀라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즉 그들은 수도승원에서만 찾게 되었던 그 기도와 하느님께 대한 그 경험을 장터에 가져 나갔다.

프란치스칸 샘들에서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은

어떻게 은둔을 찾았다가 그 은둔의 열매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주었느냐는 여러 개의 예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기도는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들을 향했다.

그들은 하느님께 접근하는 것에 관하여 새 교훈을 세상 만민에게 가르쳐 주었다.

프란치스코와 그의 제자들이 다른 이들에게 남겨 준 가르침의 초점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느님께 완전히 점령되도록 우리는 은둔의 분위기를 창조할 필요가 있다. .

(은둔소를 위해 쓰신 회칙; 제1회칙 7장, 인준 받은 회칙 5장과 8장,2 첼라노 96)

2. 기도는 사람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이 되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종들은 기도나 어떤 올바른 일에 항상 종사해야 합니다"(제 1회칙 7장)

3. 정신적 기도와 관상은 길러질 일이다.(보나벤뚜라 대 전기 4장3절)

4. 형제들의 첫째로 가는 성소는 기도하는 것이다.

   일과 학문은, 이들이 "거룩한 기도와 거룩한 신심의 영을 끄지 않을 그 만큼만"

(인준 받은 회칙5장, 안또니오 성인에게 보내신 편지) 허가 되어있다.

5. 기도는 인간 수고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 또는 선물이다.(제 1 회칙 17장)

6. 깨끗한 마음과 단순한 의향은 기도 생활에 있어서 깊어질 조건이다.(인준 받은 회칙 5장,제1회칙 22장)

 

프란치스코는 이 교훈들을 형제들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말로써 가르쳤다.

그러나 이 가르침들을 가장 많이 입증하는 것은 그가 살았던 기도 자체였다.

 

프란치스코가 기도와 은둔에 집중한 바로 그것은 16세기의 카푸친 개혁의 회원들이 가장 소중히 여긴것이었다. 첫 카푸친 형제들이 알바치나에 있는 산타마리아 델라콰렐라라의 성지에서 1529년에 모였을 때에

그들은 기도와 관상과 관련되어 있는 프란치스코의 가르침과 생애의 전면에 온전히 집중하였다.

 

"은둔 생활 양식의 더욱 작은형제들의 회헌"은 공동체를 도전하며 정신적기도에 4시간을 지내게 하는것이었다.

이러한 생활의 틈새를 마련하기 위해 성무일도는 노래와 장식없이 바쳐야 했고, 과도한 음성기도는 피해졌다.

형제들은 외딴곳에 살아야 했으며 개인기도와 신비적 관상은 개혁의 중심거리가 되는 것이었다.

수도생활의 관상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은

포쏨브로네의 루도비꼬의 개인적인 인격과 가말돌리회의 은둔 수사들의 영향을 드러낸다.

 

로마에 있는 성 에우페미아 수도원에서 1645년 11월에 형제들이 다시 모였을 때에

관상과 봉사의 조화를 제안했다.

그러나 기도가 아직도 그들의 생각에서 우선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도가 형제들의 영적인 교사이므로 ,그리고 신심의 영이 미지근해지지 않도록...

우리가 미지근하고 미온적인 이들을 위해서는 적어도 2시간의 기도를 제정하는데

과연 참으로 영적인 형제들은 늘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1535년 회헌 41조)

알바치나 문서에서 보게 되는 4시간의 묵상을 의무적인 2시간으로 줄였으며

은둔-관상의 일면을 수도회의 사도적 부르심과 균형에 두려는 노력이 있었다.

 

관상은 형제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설교하는 이들로,

신적인 친밀감에 성장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이들이 될 능력을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활동주의에 대한 조심은 언제까지나 카푸친회 은사의 특성으로 남게 될 것이다.

다음의 원칙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카푸친 전통의 일부로 재확인 될 것이다.

 

카푸친은 자기 자신이 기도함으로써 기도의 교사가 될 줄을 배운다.

1536년의 문맥의 대부분은 아직도 우리 현 회헌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복되신 예수님 친히 그들로 하여금 그냥 말로만이 아니고 훨씬 더 많이 실행으로,

사랑의 충만에서부터 말하게 자극시키실 수 있도록 설교자들은 그 예수님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서

그분께 평화로운 점유권을 드리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카푸친들이 반종교 개혁의 운동에 이바지한 초점은 영적 쇄신을 이루려는 그들의 노력이었다.

그들은 개인 기도와 관상의 교실에서 배웠던 그 교훈들을 말과 모범으로서 설교하고 가르쳐 주었다.

 

21세기의 카푸친들도 그 똑 같은 초점을 현대 세상에 전해 주기를 계속해서 소원하고 있다.

이것은 1973년에 떼제에서 확인 되었는데 거기서 제3차 수도회 전체 공의회는 다음의 구절들을 긍정했다.

"성령의 자극을 받아서 기도는 인간 마음의 지극한 필요를 표현하는 것이며,

사랑의 호흡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6조)

"형제들은 어디서나 신자들 가운데와 특히 우리 형제회들과 온 프란치스칸 가족에서 일하게 될

특별히 수련을 받은 기도 및 영성 생활 고무자들을 필수적으로 경험하고 있다"(24)

1982/1990년의 회헌은 이 모든 점을 모으기도 하고 확장하기도 한다.

"기도 , 특히 내적인 기도의 영을 하느님 백성 가운데서 극진히 기릅시다"(56조 6항)

"우리는 그 분의 사랑의 증인들로서 모든 이들을 하느님께 대한 찬미에로 초대하여 평화와 참회를 전하면서

 세상을 두루 다닙시다"(46조 7항)

현대 세상은 카푸친이 품는 다음의 가장 깊은 소망을 이루어짐에 준비된 상태로 있다:

즉 기도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 할 줄도 가르치려는 그런 소망 말이다 

(카푸친작은형제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