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수성구 2022. 4. 19. 02:25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사도 2,36-41; 요한 20,11-18 / 2022.4.19.;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이기우 신부

 

  2016년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령 「사도들을 위한 사도(Apostolorum Apostola)」, 2016.6.3.)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막달라의 마리아를 ‘사도를 위한 사도’로 부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으셨듯이, 막달라의 마리아는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강생의 신비에서 성령의 동정 잉태 전갈에 순명하신 성모 마리아의 역할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 섭리 역사에서 탁월했다면, 부활의 신비에서 부활의 첫 증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 역시 교회의 탄생과 성장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마리아는 혼자가 아니었고, 요안나, 수산나 등 공생활 시절에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을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던 여인들(루카 8,2-3)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들 모두에게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명예가 주어져야 마땅합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부터 이 여인들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모여(사도 1,14) 사도들이 주축이 된 초대교회의 공동생활과 복음선포활동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드러나지 않게 수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초대교회의 숨은 주역들이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 역할을 수행한 여인들은 열두 제자 출신 사도들에게서만이 아니라 별도로 사도로 부르심 받아 돋보이는 선교활동을 수행한 바오로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했습니다(로마 16장). 사도 바오로 역시 20여 년 가까이 소아시아와 그리스 일대 등 로마 제국의 드넓은 영토에 복음을 전하러 세 차례나 선교여행을 하고 곳곳에 신앙 공동체들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부활의 증인역을 자처한 여인들의 도움을 크게 받았습니다. 아마도 사도 바오로에게 20여년 동안 내내 한결같이 돈독한 도움을 준 여인은 필리피에서 만난 리디아였을 것입니다(사도 16,14-15; 필리 1,5; 4,15). 

 

  오늘 독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삼천 명 가량 되는 유다인 군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수 부활을 증언하고 나서 세례를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초대교회를 활성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드러나지 않게 예수 부활의 증인이자 사도를 위한 사도의 역할을 수행한 이 여인들 덕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놀라운 변화의 단초가 되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뵈온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전한 한 마디 증언이었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보편교회의 역사 2천 년을 돌이켜 보아도, “주님을 뵈온” 여성들의 역할은 지대하였습니다. 성경에서도 성전에서도 드러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현대에 들어서도 그러하고, 특히 한국교회의 지난 2백여 년 역사를 돌이켜보아도 그러합니다. 일반 가정에서도 가부장의 역할이 기록상 두드러지게 보이지만 가모장의 역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가정이 존속할 수도 없듯이, 교회에서도 그러합니다. 박해시대 교우촌에서도 “주님을 뵈온” 여성들의 역할은 독보적이었습니다. 앞장서서 치명한 경우도 있었지만, 가장이나 아들들이 치명한 경우에 남은 자기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심지어 부모가 모두 치명한 경우에 그들의 자녀들까지 거두고 돌보는 역할은 죄다 “주님을 뵈온” 여성들의 몫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의 대표로서 우리는 강완숙 골롬바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강 골롬바는 1791년의 신해박해 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펴 주다가 자신이 도리어 옥에 갇히기도 했고, 1794년 말 최초의 선교사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주 신부를 물심양면으로 정성껏 보필하였습니다. 여성이 주인으로 있는 양반 집은 관헌이 함부로 들어가 수색할 수 없다는 조선 사회의 풍습을 이용하여, 주 신부를 자신의 집 안에 숨겨 두고 6년 동안 교우들을 모아 성사생활을 하게 하면서 자신은 여회장으로 여성 교우들을 이끌었습니다. 천진암 강학회 선비들이 시작한 한국교회는 이벽과 동료 선비들의 활약으로 1794년까지 4천 명까지 늘어났는데, 주 야고보 신부와 강 골롬바의 이러한 활약으로,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1만여 명에 달하는 신자들로 교세가 늘어날 수 있었습니다. 

 

  강 골롬바 외에도, 동정녀 공동체 회장을 맡아 수많은 동정녀들을 지도하며 가르쳤던 윤점혜 아가다, 맏아들 최양업 토마스를 사제가 되도록 봉헌하고 교우촌 회장을 맡았던 남편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함께 교우들을 돕다가 세 아들을 남기고 치명한 이성례 마리아, 철저한 애긍생활의 모범을 보여준 송 루치아와 유 마리아 등 “주님을 뵈온” 여인들은 희생과 순교와 애덕의 영성으로 박해시대 교우촌 교회를 지켰습니다. 그밖에, 황사영 알렉산델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는 관비로 신분이 격하되어 제주도 대정으로 유배갔지만, 치명을 하거나 전교활동을 할 수는 없었어도 뛰어난 애덕을 증거한 덕분에 지금까지도 제주에서 공경을 받고 있기도 합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을 뵈온” 수많은 마리아들이 교회를 뒷받침하고 돌보며 지켜왔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도 또 앞으로도 마리아들의 사도직은 그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