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성지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수성구 2022. 4. 10. 04:23

성지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지주일: 다해

 

오늘은 성지주일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축제 기분에 들뜬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성대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고 있다. 이 예수님의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은 수난의 짓누르는 고통을 먼저 거쳐야만 하는 야훼의 종의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예언적 전조와도 같다. 이사야서는 하느님의 고통받는 종의 셋째 노래를 전하고 있다. 이 종은 하느님의 고통당하는 종이다. 이 종은 주님께 대한 충실성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이사 50,7).

 

복음: 루카 22,14-23,56: 주님의 수난

 

예수께서는 당신을 휩쓸어버리려는 그 파괴적인 공격을 맞이할 채비를 하신다. 루카 복음에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무엇보다도 그 예루살렘에서의 사명과 당신의 마지막 공적 가르침과 이후 직접적으로 계속되는 사건들, 즉 최후의 만찬, 겟세마니, 재판, 십자가, 부활과 그 후의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일치시키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파스카를 거행하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22,15). 이 파스카는 확실히 죽음을 통한 봉헌의 표지로서 식탁에 놓였던 최후의 만찬의 빵과 포도주로 상징되는 그분의 생명을 통한 희생적 봉헌의 예표이며 동시에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22,19.20).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도 당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걱정을 하신다. 그래서 슬픔에 잠겨 십자가를 따라오는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 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23,28.31). 그러나 애석하게 생각하고 울어야 하는 사람은 패배당한 것같이 보이고 천시당한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죽음에 처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이 여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하는지를 모르면서 우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에도, 다른 공관복음의 절망적 외침인,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시편 21,2)가 아니라, 아버지께 평온히 의탁하는 태도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시편 30,6). 그러므로 아버지 ‘하느님’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렇게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사를 과장되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께서 가지셨던 ‘고뇌’에 대해서 아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22,44). 이 표현은 예수께서 ‘수난’을 능히 극복하고 지배하실 수 있지만, 죽음 앞에서의 인간적 한계와 번민에서 그를 제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위대하신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만 절망의 공포와 유혹을 물리칠 수 있으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22,42).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성은 지극히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처지에 처하게 되는 바로 그때 참으로 신성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십자가의 신비, 즉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많은 사람이 지도자들과 군인들의 태도와는 달리 적개심보다는 호기심과 놀라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 마음에는 후회의 감정이 있었다.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23,48).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23,47). 이는 마르 15,39에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더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십자가의 어리석음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구원’되도록 한다. 오른쪽 강도도 마찬가지이다. 함께 못 박힌 다른 강도의 예수에 대한 조롱에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그 죄수가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0-43).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은 그 강도에게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은 인간의 모든 비열한 행위와 배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의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에게만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것을 모르고 잘못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23,34).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만,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립 2,9-11). 이렇게 파스카의 빛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 온 땅을 뒤덮었던 그 무서운 어두움을 이미 벗겨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