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예레 18,18-20; 마태 20,17-28 . 2022.3.16.;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당신께 임박한 운명을 알려 주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만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이었는데, 벌써 세 번째 예고였습니다. 처음으로 예고하셨을 때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부르시며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마태 16,21-23). 모처럼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하는 말까지 들은 참이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맡기신 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반박까지 했던 까닭이야 한껏 들떠 있던 제자들이 십자가 예고 말씀으로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던 탓이겠지만, 예수님으로서도 제자들을 3년 동안이나 가르쳤는데도 알아듣지 못하고 전혀 기대 밖의 반응을 보시자 너무나 실망하신 나머지 호통을 치실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시고 타볼산에 올라 기도하시며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모습까지 보여주셨습니다. 이 세 제자가 얻은 확신이 나머지 제자들에게도 전해졌으리라고 기대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십자가와 부활 예고를 하셨지만, 제자들은 몹시 슬퍼했을 뿐 도무지 알아듣는 눈치가 아니었습니다(마태 17,22-23).
그리고 나서 세 번째로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이 오늘 복음입니다. 이번에는 제자의 어머니가 슬그머니 끼어 들었습니다. 아마도 당신의 두 아들을 출가시키고 나서 줄곧 따라 다녔던 모앙이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무언가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엎드려 절하기까지 하면서 간청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스승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태 20,21). 이러고 보면 그 어머니나 제자들이 알아들은 하느님의 나라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실현되리라고 기대한 현세의 왕국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왕정국가로 치면 우의정과 좌의정 자리를 청탁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나머지 제자들의 반응 또한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제자가 열두 명이나 되는데, 이 결정적인 기회라고 보여지는 때에 어머니까지 내세워서 자리 청탁을 한 야고보와 요한에게 불쾌하게 여긴 것입니다. 현세적 영광을 노린 어머니의 치맛바람이요, 제자들도 누가 더 나을 것도 없는 한심한 처지 그 자체입니다.
분위기가 이처럼 한심하게 돌아가자 예수님께서 비장한 각오로 그들을 가까이 불러 타이르셨습니다: “나는 왕좌에 오르러 가는 길이 아니라 죽으러 간다. 너희도 내 제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서 나와 함께 있으려면 죽든지 섬기든지 해야 한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이 유언 같은 말씀 다음에 눈을 뜬 예리코의 소경 이야기를 삽입해 넣었습니다. 마치 부활 신앙에로 눈을 떠야 한다는 메시지로 들립니다.
시대를 5백 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예레미야도 예언자로 한창 활동하던 상황에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로부터 사악한 음모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 항변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가 이 부당한 대우를 받기를 바라신 것은 아니었겠습니다만, 결과적으로 그에게 닥친 운명은 이렇게 비정하였습니다. 선이 악에 의해 버림받는 지경이 그것입니다. 십자가 운명을 앞두신 예수님의 예형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이런 상황에서 보여주시고 또 제자들에게도 요구하신 처신은 선에 대한 악의 음모가 가하는 십자가의 운명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받아들이되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악이 짊어지워준 십자가는 끝이 아니고, 끝일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예고는 부활 예고와 한 묶음입니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부당한 십자가지만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야말로 이미 하느님 나라의 처신이요 따라서 벌써 그 나라에서 부활해 살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골고타 언덕에서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이전에도 공생활 내내 차원이 다른 현실적인 여러 십자가들을 짊어지셨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참아가며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힘은 부활이요 성령의 기운이었습니다.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같은 엘리트 계층으로부터는 노골적인 박해를 받으셔야 했고, 군중들에게는 무관심을, 제자들에게마저도 몰이해의 십자가를 받으신 모습 자체가 그분이 현실 안에서 부활하시는 모습이었으며, 우리의 현실적인 부활 교과서입니다.
단지 결정적이고 대단히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그분은 하느님을 가장 닮으신 아드님으로서 성령의 기운을 받아 그토록 당당하게 십자가를 짊어지실 수 있었지만, 우리는 나약한 인간이라서 종종 이 십자가를 너무도 힘겹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그분이 믿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현존양식 안에서라면 우리도 그분처럼 성령의 기운으로 능히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분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그분이 장담하셨습니다(요한 14,12).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양식의 중요성,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 예고가 주는 신앙의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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