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의 소유와 사용을 꿰뚫어보고 계시는 하느님
예레 17,5-10; 루카 16,19-31
2022.3.17.;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모두 매우 대조적인 두 인간형을 제시하면서 우리에게 선택하도록 요구합니다. 악인과 의인, 부자와 가난한 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에 앞서, 우리의 현실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악인은 부자인가? 그렇습니다. 그들이 악을 저지르는 이유는 그들이 부자가 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가난한 자인가? 또한 그렇습니다. 그들이 의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가진 것도 나누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도 참인가? 아닙니다. 부자가 다 악인은 아닙니다. 나누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는 아직 구원 가능성이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또 가난한 자는 다 의인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가진 것은 없어도 가지고자 하는 탐욕으로 똘똘 뭉쳐있자면 그는 구원 가능성을 스스로 없앤 사람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풀어 보겠습니다.
먼저,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마다 제 선택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서 인생길이 이렇게 달라지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주님을 신뢰하는 이도 있는데,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을 마치 백 년이고 천 년이고 가지고 있을 것처럼 착각하고 몸을 떠받드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고,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치유될 가망이 없을 정도로 교활한 자는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며, 마음을 주님께 두는 이는 좋은 열매를 줄곧 맺으리라고도 하였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살아생전에 온갖 호사를 누리면서도 부자는 자선을 베풀지 않았지만,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고자 간절히 바랐던 가난한 라자로는 허기를 면하기는커녕 개들이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할 정도로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살아서 고통받던 라자로는 죽어서 천국에 올라가 아브라함 곁에서 평안한 삶을 누리게 되었으나, 살아서 호강하던 부자는 불타는 지옥에 떨어져 목이 타는 듯한 고통을 맛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예수님께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상기시키시는 듯 기본 구도는 비슷해 보이지만, 메시지는 훨씬 더 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의 경고는 자기 행실에 따라 현세에서 받을 심판만을 제시한 데 비해서, 예수님의 경고는 현세에서만이 아니라 내세에까지 관철되고야 말 심판을 제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정도가 훨씬 더 엄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자와 거지, 현세와 내세, 천국과 지옥 등 대조적인 일들이 날카롭게 대비되면서, 부자의 사치스러운 모습을 짧게, 가난한 라자로의 고통은 길고 상세하게 소개됩니다. 그런가 하면 부자의 죽음은 길고 자세히, 라자로의 죽음은 짧게 소개됩니다. 정작 죽은 후 부자가 겪는 고통은 길고 처절하게 묘사되지만, 라자로의 행복은 아브라함 곁에 있다는 간단한 표현으로도 충분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대조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묘사 방식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매우 인상적으로 과연 어떻게 재물을 소유하고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즉, 라자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재물을 그릇되게 소유하고 사용한 인색한 죄인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뒤에 자신의 말로 자신을 심판합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이 찾아가서 경고해야 할 정도로 아무런 성찰 없이 위험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며,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거절한 대가로 가게 된 지옥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절대로 가서는 안 될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심판적인 부자의 언도는 아브라함에 의해서 더 엄중하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망설이는 부자들에게는 이미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 즉 성경의 가르침이 주어져 있으니, 죽은 사람이 다시 찾아가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 고통을 덜어주러 가기에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수렁이 너무 깊어서 도저히 건너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기 전에 회개하여 가난한 이들과 가진 재물을 나누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강조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내세의 천국과 지옥 사이의 간극처럼이나 현세의 경제 질서에서 생겨나고 있는 빈부의 양극화 현상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받아야 하는 고통을 지금 여기서 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세의 간극은 인간의 힘으로는 물론 하느님의 힘으로도 좁힐 수 없지만, 현세의 간극은 인간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좁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경고대로 우리가 하느님께 믿음을 두기만 하면 그렇습니다.
재물의 소유와 나눔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렇듯 철저했기 때문에,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 소유라 내세우지 않고 공동의 소유로 내어 놓고 공동으로 사용할 줄 알았으며 그들 안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인 실천이 사회적 매력을 발산시켜서 로마 제국의 박해도 물리치고 공인되고 국교가 되었으며 그 생명력으로 오늘날 전 세계에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6세 교황도 이 비유의 핵심에 대해서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이렇게 가르친 바 있습니다: “인종이나 종교나 국적의 차별 없이 누구나 다 타인과 자연의 예속 상태에서 해방되어 참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 명실상부한 자유세계, 가난한 라자로도 부자와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인간 공동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 것이다”(회칙 「민족들의 발전」. 47항).
교우 여러분! 늘 입당송의 기도처럼, 우리가 걸어온 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걸어갈 길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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