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6주일: 다해
오늘 복음은 우리가 마태오 복음(5,1-12)에서는 산상설교로, 루카 복음에서는 평지설교로 전해주고 있다. 마태오 복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신앙인들은 구원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올라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루카 복음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려오신다.’ 즉, 우리가 당신을 향해 올라갈 수 있도록 당신을 낮추어 내려오신다는 의미이다.
복음: 루카 6,17.20-26: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루카 복음에서는 4개의 축복이 나온 다음 4개의 저주가 나오는데 이렇게 축복과 저주가 쌍을 이루게 한 것은 ‘축복’의 의미와 효과를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내용은 예레미야서에 나타나는데 복음 내용을 잘 조명해주고 있다. “사람이 힘이 되어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5-8절).
성서에서 ‘축복’이란 미래에 얻게 될 기쁨을 선포하거나(이사 30,18; 32,20; 다니12,12), 현재의 기쁨에 감사를 드리거나(시편 32,1-2; 33,12; 85,5-6.13) 보상에 대한 약속을 표현하는데(잠언 3,13; 8,32.34; 시편 1,1; 2,12) 사용된다. 따라서 축복은 항상 하느님께서 당신께 충실한 사람들에게 주실 ‘기쁨’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복이란 어떤 희망 사항이나 원의의 표현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상황을 뒤집고 그 나라를 실현하실 것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오늘 복음의 축복이 현재 상황이 뒤바뀌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어떻게 바뀐다는 것인가? 가난한 이들이 부유하게 되고, 배고픈 이들이 배불리 먹게 되는 그런 상황으로 된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의 축복은 불행한 사람들과 행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처지만 바뀔 뿐 여전히 세상에 불의는 존속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예수께서 계속해서 부유한 사람들과 배부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면 그 때문에 다시 저주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뒤집어엎는’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일어난다. 즉 정신적 내면 상태의 변화와 또한 마음의 회개로 말미암은 외적 변화를 통해 일어나게 된다.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이 사회에 가난한 이들, 배고픈 이들, 고통받고 박해받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와 더불어 역사 속에 이미 활동하고 있고 이러한 상황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여기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면이 충분치 못할 뿐이다. 그들이 영적인 배부름과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밝은 생활을 할 때는 부유하다. 이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생활이 감추어진 차원 즉 세상이 간단히 알아챌 수 없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지상의 부와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공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가난은 단순한 빈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 마음의 개방이다. 가난한 사람은 구하는 사람이다. 즉 하느님께 자신을 열고 청하는 사람이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법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며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자신의 삶을 그리고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용서와 참된 재화와 풍요로움과 즐거움의 형태로 모든 이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축복’이나 ‘저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의 도움이 필요한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며, 그래서 다 함께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육체적 정신적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을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채워야 하는 그 ‘배고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영적, 물질적인 악에 대해 회개하는 용기를 가짐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나 자신의 마음의 비움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가난을 가질 때에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23절).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알아듣기 힘든 역설적이지만, 사도 바오로는 그 보증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가장 심한 박해를 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고통과 부활의 신비 안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에 배고프고 고통당하고 가난하게 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끊고 살도록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그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잠시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기도하며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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