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성전과 사도직
1열왕 8,1-13; 마르 6,53-56 / 2022.2.7.; 연중 제5주간 월요일; 이기우 신부
솔로몬은 하느님의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풀려나와 약속의 땅에 들어온 지 삼백여 년 만이었고, 이것이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 성전의 맨 안쪽에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궤를 모신 지성소를 두었습니다. 성전도 지붕을 금박으로 둘러 화려하게 지었거니와, 지성소에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고 일 년 중 속죄일에 대사제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레위 16,32-33). 그래서 두터운 휘장을 드리워서 지성소를 가려놓았습니다(탈출 26,32-33).
그런데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숨을 거두실 때 이 두터운 휘장이 찢어졌다고 증언하였습니다(마르 15,38).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뿐만 아니라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으며,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고 증언하였습니다(마태 27,51-52). 이렇게 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주동한 사제들과 이들이 장악했던 유다교 성전 질서가 모조리 무너지고, 다시 살아나신 그분께서 되살리신 성도들의 몸이 새로운 성전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 속에 담긴 이 계시적 의미를 뒤늦게 깨닫고 그리스 이방인으로서 신자가 된 교우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1코린 3,17; 6,19).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예수님처럼 살고자 믿고 노력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야말로 새로운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이 성전에는 성령께서 살고 계시면서 신자들을 기도와 행동을 통해 거룩하게 변화시키고 계신다는 진리를 가는 곳마다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교의 역사 안에서 성전은 단순히 전례가 거행되는 건물로서의 상대적 의미만을 지니게 되었고, 진정한 성전은 신자들의 공동체라는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성전 신학이 신약에 와서는 공동체 신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교회론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성전인 신자들의 공동체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내용처럼 고통 받는 이들을 구원하고자 하면 사도직 활동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말 그대로 사도의 직무로서, 예수님께서 살고 일하신 대로 복음선포 활동을 계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의 사도직 활동이 과연 사람들로 하여금 손을 대고 싶어 할 정도로 사회적 매력이 있는지, 또 손을 대면 다 구원을 받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이 강론에 덧붙여 '시대의 표징과 그리스도인의 기도' 메시지를 말씀드립니다>
현재 우리는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자로 발표된 천주교인들의 시국호소문은 「이성과 신앙, 민주주의와 평화」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민족의 최고선과 나라의 공동선을 위해 정책 대결을 펼쳐야 할 선거에서, 합리적인 논쟁과 정책 경쟁은 사라진 터에 기득권 카르텔을 유지하기 위한 온갖 불법과 탈법이 저질러지고 있어도 이를 호도하는 거짓 뉴스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가 하면 심지어 주술과 역술에 노골적으로 의지하는 행태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권자의 집단이성에 호소하고 나라의 공동선 가치를 확인하며 민족의 최고선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호소문이 발표되었습니다.
이 호소문에서는 공공의 이익과 공동선 가치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욕을 부추기며 공익을 외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바로 그것이 사람을 미혹에 빠뜨리는 미신이라고 비판하며, “아주 오랜 세월 사람들의 병고와 한을 어루만져 주던 무속의 역사”에 대해서는 옹호하고 있습니다. 이는 공익에 기여하고 있다면 무속을 미신으로 볼 수 없으며, 사익을 위해 무속에 의지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신이라는 뜻입니다. 흔히 샤마니즘이라고 부르는 무속은 일제가 한민족의 정신 전통을 말살하려고, 기왕에 천시되어 오던 무교 신앙을 부르던 이름입니다.
우리 민족 역사는 반만년 전 단군왕검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단군은 무교의 사제였고, 우리 민족은 역사의 시초부터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의식을 중시했으며, 곳곳에 엄청난 공력을 들여서 고인돌을 축성하여 이를 제단으로 삼아 하늘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결과로 알아낸 하늘의 뜻이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 사상이요, 이를 온 세상에 알려야 할 주체인 한민족이 천손이라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배층과 지식층 사이에서 ‘천손의식’이 희미해지면서 왕조가 쇠약해졌고, 뒤를 이은 왕조들에서 불교와 유학을 받아들이면서 무교 신앙은 민간으로 숨어 들었습니다. 천손의식은 물론 최고선 가치가 흔들려서 나라가 중국의 속국으로 전락하였고, 지배층과 지식층 안에서 공동선 의식도 희미해져서 사회적 신분으로 백성을 차별하고 억누르며 착취하면서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서도 공동선 의식을 일깨우는 이성이 아니라 편협한 하나의 사상이 5백 년 동안 이 나라를 지배했습니다. 종교도 아닌 유학을, 그것도 한 분파인 주자학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떠받들면서 사상을 통제하던 조선 시대에 반대파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는 비이성적 사상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터에, 조선 사회의 개혁을 꿈꾸며 실학을 추구하던 선비들이 중국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번역해 놓은 서적들을 통해서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천주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천주교는 하나의 종교운동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급속도로 백성 속에 퍼져나갔습니다. 한문도 모르고 따라서 유학도 알 수 없었던 일반 백성이 천주교를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무교 신앙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알고 있었고, 심성적으로 깊이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반 선비들이 제사금지령으로 말미암아 떨어져나간 후에도 무려 백 년이나 박해를 견디며 치명할지언정 배교를 거부하고, 입술로 배교했을지언정 집안에서는 더욱 자손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가르치는 방식으로 진리를 증거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천시되어 오던 무교의 종교행사와 행위 또한 민족과 나라의 최고선이나 공동선을 위해 제사드릴 길이 막혀버리고, 영적 위계질서에 대한 기준이 없이 사리사욕으로 잡신을 불러들이는 우상숭배로 전락했기에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은 이를 철저하게 배격하였습니다.
하느님을 흠숭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위해 길흉화복을 점치는 행위는 신앙과 이성으로 토론하고 합의하여 실천해야 할 민주주의 질서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이래서는 최고선의 가치가 가려질 수밖에 없고 공동선의 가치도 또한 훼손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번 대선 과정에서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민족적 최고선 가치와 국가적 공동선 가치를 지키기 위한 파수꾼 역할을 천주교 신자들이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동방의 빛으로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민족의 전통과 지혜로는 하늘의 뜻이 바로 최고선과 공동선이기 때문이며,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도 최고선을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가치로 가르치는 한편 공동선이란 인간 존엄성을 중심으로 모든 이에게 공평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가치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번 대선 과정에서 그 민낯을 드러낸 바,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 언론과 공정하게 정의를 구현하기를 포기한 검찰과 양심과 헌법을 준수하지 않는 사법질서에 대한 개혁이 절실하다는 것이 가톨릭 사회교리에 입각한 신앙적 판단이며 아울러 이는 건전한 이성을 추구하는 뜻있는 국민들의 여론이기도 합니다. 민주주의에 담긴 최고선 가치를 수호하고, 우리 사회의 공동선 가치를 증진시키기 위한 천주교 신자들의 네트워크 결성을 지지하며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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