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조상들의 전통과 하느님 말씀

수성구 2022. 2. 8. 04:43

조상들의 전통과 하느님 말씀

1열왕 8,22-30; 마르 7,1-13 / 2022.2.8.; 연중 제5주간 화요일; 이기우 신부

 

  성전을 지은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하늘이나 땅 어디에나 계시지만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청함으로써, 성전이 신앙 공동체가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는 거룩한 장소라는 것과, 하느님께 대해서보다도 신앙 공동체를 위해서 더 필요한 곳임을 드러내었습니다(1열왕 8 23-30). 그러니까 성전 자체보다 그 안에서 기도하는 신앙 공동체의 믿음으로 현존하시는 하느님이 더 중요하고, 또 성전 안에만이 아니라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더 우선시함으로써 가치의 위계질서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솔로몬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하느님을 섬겨온 조상들의 전통은 그런 대로 명실상부하게 살아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지켜온 조상들의 전통을 앞세워 거꾸로 하느님 말씀을 제한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즉, 더 중요한 하느님의 말씀은 소홀히 하면서도 아주 사소한 자신들의 해석 규정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태도를 드러낸 것입니다(마르 7,5). 이러한 그네들의 위선을 평소에 자주 접하시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금과옥조처럼 지켜오던 조상 전통을 하느님 말씀으로 상대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는 새로이 해석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요, 서로 발을 씻어주는 섬김이며, 이를 공동체에서 실천하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입니다. 사랑도 없고, 섬김도 미루고, 십자가도 피하면서 하느님을 믿겠다는 방식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이런 편한 방식으로 살아가려 하지만, 당신을 따르려는 제자들은 다소 어려워보이더라도 좁아보이는 문으로 들어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사도직 활동은 사제직, 예언자직 그리고 왕직으로 나뉘어집니다. 사제 직무는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기 위한 성체성사를 봉헌하며 자기희생의 삶으로 제사를 바침으로써 그분의 희생을 기념하는 일이고, 왕직은 공동선을 위해 투신하는 봉사입니다. 그리고 예언자 직무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일로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나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기 위해서 신앙과 이성이 모두 발휘되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직무가 부활의 은총을 누리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의 은총이 이 땅에 기적처럼 비추었으니, 2백여 년 전에 천주교가 들어올 당시에는 참으로 오묘한 섭리가 작동되었었습니다. 우선 명나라 말기부터 중국에 파견되기 시작한 서양 선교사들이 수십 년 동안 노력하여 한문을 배운 후에 그 지식으로 서양의 교리와 신학을 번역하되 유학의 논리와 사유를 존중하여 저술해 놓은 일을 그 첫째로 들 수 있습니다. 이를 보유론적 관점이라 합니다. 

 

  그런 한역서학서들이 무려 백5십 년 동안이나 조선에 유입되어 수많은 선비들이 읽었지만 대개 흥밋거리로 그친 데 비해서, 유독 이벽은 한역서학서들에서 천주교 교리와 그리스도 신앙을 발견하고 어려서부터 나름대로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믿을 만한 지인들이 이 저술들을 공부한다고 하니 그 자리에 동석하여 마침내 실학 강학회를 천주학 강학회로, 다시 천주교 신앙공동체로 성격을 전환시켜, 세계 교회사상 처음으로 자생적인 천주교회를 탄생시킨 일을 그 둘째로 들 수 있습니다. 이벽은 천주교 교리만을 적어 놓은 ‘천주실의’를 넘어서서 신구약 성경의 맥까지 짚어서 해설한 ‘성교요지’를 지었고, 한문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이 진리를 전하려고 순한글 4·4조로 ‘천주공경가’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셋째로, 이벽이 발휘한 선하고도 거룩한 영향력을 받은 정씨 삼형제의 활약도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정약종은 이벽보다 한술 더 떠서 서양에서 알려준 하느님을 우리 조상들은 유학이 들어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믿어 왔음을 밝힘으로써 보유론적 관점을 넘어섰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으로 한민족의 전통적인 종교 사상까지 식별한 것인데, 그러나 또한 삼위일체 하느님이 아닌 잡신들을 불러 들여 길흉화복을 점치는 귀신놀음은 우상숭배로 배격하여 교우들을 가르치는 ‘주교요지’를 지었습니다. 

 

 정약용은 장기간 유배를 당하게 된 기회를 선용하여, 이벽으로부터 배운 천주학의 관점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유학 경전을 모조리 재해석해 내었으니 그것이 5백여 권에 이르는 여유당 전서입니다. 그 결과 주자학을 유교로 교조화시켜서 사상을 통제해 온 조선 사회의 시대적이고 사상적인 모순을 낱낱이 해석해내었습니다. 

 

  외딴 섬으로 유배간 정약전은 이 아우들보다 한 술 더 떴으니, 현학적이고 사변적인 이기(理氣) 논쟁에 매몰되어 있던 유림들이나 몰이성적인 사문난적 논쟁을 빌미로 권력투쟁에 골몰하던 기성 사대부들과 달리, 임금도 양반도 필요 없이 백성이 주인으로 행세하는 나라를 꿈꾸며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생활상과 그들이 잡은 물고기를 기록하는 해양어류도감을 편찬해 내었는데, 이것이 ‘자산어보’입니다. 

 

  이상이 고리타분했던 유다교 지식인들과 달리, 조상들의 전통과 시대의 징표를 용감하게 해석함으로써 이 땅에 하느님 말씀을 전한 선각자들의 발자취입니다. 천주교회 역사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지만, 한민족의 역사 안에서도 그 정체성을 스스로 밝히고 평화적인 노력으로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기적적인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