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봉헌하는 제사, 공동체로 부활하는 삶
1열왕 3,4-13; 마르 6,30-34 / 2022.2.5.;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이기우 신부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인 오늘, 우리는 소 천 마리를 불태워 제사를 드리면서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는 솔로몬의 이야기와, 목자 없는 양들처럼 흩어지고 버려진 채 살던 군중에게 가르쳐 주시다가 빵을 배불리 먹이시게 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씀의 초점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제사입니다. 구약시대에 동물을 불태운 고기를 제물로 삼아 바치던 제사로는 인간의 죄를 씻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십자가 상에서 하느님께 바치셨습니다.
솔로몬은 그 지혜로 백성들의 까다로운 송사를 슬기롭게 처리하기도 했지만, 남방에서 온 여왕에 들여온 우상들까지도 받아들여 나라를 어지럽히기도 했습니다. 부왕 다윗이 마련해 놓은 부강한 국력 위에 화려한 성전을 짓기도 했지만(2역대 3,3-4. 60x20x120 단위:암마), 자신이 살려고 지은 궁전은 더 크게 지었습니다(1열왕 7,2. 100x50x30 단위:암마). 왕족 출신 아내가 7백 명이요 후궁이 3백 명이었는데(1열왕 11,3), 암몬과 모압, 에돔과 시돈, 히타이트 등 우상숭배국 출신이었던 그들이 들여온 우상을 위한 신당들도 지었습니다(1열왕 11,4-8). 부왕(父王) 다윗은 정비였던 미갈을 두고 이미 후궁들도 거느리고 있었으면서도 부하의 아내 밧세바를 후궁으로 삼았고 그 부하를 죽이는 살인죄를 저질러서 자신과 자신의 왕조에 내려진 하느님의 축복을 걷어차 버렸지만, 미갈의 아들 압살롬을 제치고 밧세바의 아들로서 왕위를 거저 얻은 솔로몬은 천 명이나 되는 아내와 후궁을 거느렸는가 하면 심지어 우상숭배까지 버젓이 왕실 안에 들여왔습니다. 이는 결국 하느님의 지혜를 허당으로 만들어 버린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다음 대에 가서 나라가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게 만들었고, 분열된 두 나라가 경쟁적으로 우상숭배에 떨어짐으로써 민족과 나라의 운명을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시작이 되었습니다(1열왕 11,9-13). 천 마리나 되는 많은 소를 제물로 바쳤어도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고 우상을 숭배한 죄가 이토록 컸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도 훨씬 넘던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 사건도 그 자체로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로 굶주려 있던 온 세상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성체성사의 배경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는 모든 이가 진정한 제사를 드리게 하려고 예수님께서 바치신 십자가 희생의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성체성사의 인효적 효과는 미사에 참여하여 성체를 받아 모시는 신자들이 자신의 일상 생활에서 십자가의 희생을 실천할 때라야 비로소 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서 올바른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사효적(事效的)으로는 예수님께서 바치신 십자가 희생에 바탕하되, 인효적(人效的)으로는 자신의 삶에서도 십자가 희생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한 십자가 희생이 우리네 인간관계와 사도직 활동을 공동체와 복음선포로 거룩하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한 공동체와 복음선포 안에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게 되는 부활의 은총이 비로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어둠을 밝혀야 할 세상의 빛입니다. 이 빛을 비출 수 있을 때 우리가 하느님을 세상 사람들 한가운데에서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모세의 경우를 우리는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는 여든 살에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동족을 해방시키라는 소명을 받고, 사십 년 동안 시나이 광야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백성을 인도하였습니다. 백성을 대표하여 하느님과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었고 하느님 앞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십계명을 전해 주었으며 역사에 길이 남는 이스라엘 백성의 으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신명 32,51-52).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 땅이 보이는 요르단 땅 느보 산에서 백스무 살의 나이로 눈을 감아야 했습니다. 하느님을 드러내지 못한 죄가 이토록 큽니다.
요즘 세상에서 온갖 주술과 거짓 뉴스와 이에 기댄 음모와 중상모략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를 올바른 종교가 아닌 미신(迷信)이라 합니다. 십자가를 예수님께만 미루어 놓고, 우리의 부활은 죽고 난 후 내세에로만 미루어 놓는 엉터리 신앙도 눈에 띱니다. 이를 올바른 신앙이 아닌 불경(不敬)이라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고, 하느님을 증거하지 않고는 우리의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성체를 받아 모시면서 힘을 얻는 것이 올바른 종교적 실천이라면,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십자가 희생을 실천함으로써 공동체를 이룩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적 실천입니다. 그렇게 할 때라야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부활의 은총을 얻어 누리며, 세상 사람들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을 증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제사요, 신앙생활이며 선교활동입니다. 미신이나 불경이 아니라, 십자가로 봉헌하는 제사를 바칠 때 이 참된 제사가 공동체로 부활하는 삶을 보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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