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목을 벤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역사의 심판으로 현재화되는 부활
집회 47,2-11; 마르 6,14-29 / 2022.2.4.;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이기우 신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무법천지인 것 같아 보여도 크게 또 길게 보면 하느님의 뜻대로 흘러갑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올 일차적 무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겪으셨고 알고 계셨던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힘도 없고 가난했던 군중에게 그들이 익숙한 온갖 소재를 동원하여 비유로 알기 쉽게 이야기해 주신 일은 우리가 오늘날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요긴합니다. 창조주이시며 심판주이신 하느님께서 손수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 세상의 구체적인 역사와 현실에서 당신의 나라를 비유적으로 드러내심을 알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기에 앞서서 행하신 모든 사랑의 실천 행동과, 이를 본받고자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모든 사랑의 실천 행동에서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드러나고 있음도 알게 해 주고, 또한 그분이 적대자들에게 대하신 모든 심판 행동과 역시 이를 본받고자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자들에게 맞섰던 모든 심판 행동 또한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하느님의 심판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영주에 의해 참수되어 순교한 직후에 헤로데는 극심한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여러 기적을 행하시며 군중으로부터 광범위한 명성을 얻게 되시고 그 소문이 자신의 귀에도 들려오자 이렇게 반응하였습니다: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16). 하느님께서 의인을 부활시키시리라는 심판 섭리가 비록 악인이지만 헤로데를 통해서 현재화되고 있는 생생한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의인을 박해하고 죽인 악인이 벌을 받게 되리라는 사필귀정의 심판보다 더 중요한 섭리는 악인에 의해 핍박을 받아 죽임을 당하더라도 의인은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리라는 부활의 심판입니다.
이와 같은 심판과 부활의 신앙은 후대 이스라엘의 현인들이 다윗의 삶과 신앙을 회고하는 집회서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었습니다. 집회서는 다윗 이후 8백여 년 후인 기원 전 2세기 경에 이미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 문화권의 디아스포라에서 살고 있는 히브리 젊은이들에게 이스라엘의 신앙과 지혜를 전수하고자 쓰여진 성서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쓰여졌으며, 그리스 사상과 사유도 일부 반영하고는 있지만 핵심 내용은 어디까지나 이스라엘의 고유한 역사와 신앙 그리고 전통과 문화 관습이고, 이를 전해 주고자 집회에서 읽을 수 있도록 정제된 표현으로 쓰여진 지혜 문학입니다. 특히 오늘 독서인 집회서 47장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성왕이요 명군으로 알려진 다윗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반영하듯이 그의 삶과 신앙과 업적을 역사적으로 재평가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렸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집회 47,8). 이처럼 후대의 역사가들은 다윗에 대해 매우 후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다윗도 허물은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 중에서 가장 점수를 딴 업적은 죄를 짓고 즉시 뉘우친 일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의 이전에나 이후에 절대 군주들이 정실 왕비를 두고도 후궁을 들이는 일은 신앙의 잣대만 아니라면 결코 흠결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이를 위해 백성이나 신하 장수의 목숨을 앗아버리는 일조차도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다윗만이 지은 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그 죄가 묻혀버릴 수는 없지만, 신앙인으로서 다윗이 보여준 위대한 면모는 즉시 죄를 뉘우치고 자신의 허물을 거울삼아 두고두고 반성하면서 보속하는 삶을 살아갔다는 데에 있다고 후대의 역사가들은 평가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고, 그의 힘을 대대로 들어 높이셨으며, 그에게 왕권의 계약과,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왕좌를 주셨다”(집회 47,11).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한 심판은 그가 죽어 관뚜껑이 닫히자마자 진행됩니다. 하느님께서 심판하시기도 전에, 당대의 사람들이 재평가하기 시작하고, 중요한 인물인 경우에는 두고두고 후대의 사람들이 재평가에 재평가를 거듭하면서 하느님의 심판을 불완전하게나마 반영합니다. 중요한 것은 악인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 엄중하리라는 이치만이 아니라, 의인이 행한 의롭고 거룩한 선행은 그의 허물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권능에 의해서 다른 의인들의 삶으로 더군다나 더욱 확대재생산되는 양상으로 부활하리라는 이치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 주보성인을 정하고 그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주보성인의 삶을 자신의 인생 역사 안에서 재현하고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부활의 삶을 살도록 초대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선거는 주권자인 국민이 정치를 심판하는 기회입니다. 하느님의 잣대로 현실 정치의 무게를 재야 합니다. 그리하여 진실과 정의가 드러나야 하고, 평등과 평화가 더 실현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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