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요한 보스코

수성구 2022. 1. 31. 01:32

요한 보스코

 

2사무 15,13-16,13; 마르 5,1-20 / 2022.1.31.; 성 요한 보스코 사제;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에서는 다윗 왕조가 왕자 압살롬의 반란으로 흔들리는 이야기를 들으셨고, 복음에서는 군대 마귀에 들려 미쳐 버린 사람을 예수님께서 제 정신을 차리도록 해방시켜 주신 이야기를 들으셨습니다. 또한 오늘 전례에서 교회가 기억하는 인물은 요한 보스코 사제입니다. 그는 19세기 가난했던 이탈리아 사회에서 가정에서는 물론 학교에서 받아야 할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가 작은 범죄들을 저질러 감옥에 드나드는 청소년들을 보고 시대적 소명을 느껴 투신한 인물입니다. 

 

  요한 보스코 자신도 어려서 아버지를 여윈 탓에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과 독실한 신앙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는 세상이 손가락질하고 낙인찍은 청소년들을 그만큼 더 따뜻하게 돌보아야한다고 여겼고 또 그리하면 그 청소년들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라토리오’라는 성가대를 만들어서는 청소년들과 함께 어울리며 노래도 하고 운동도 하며 기술 교육도 시키고 학교에도 보내는 청소년운동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그가 7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오라토리오 출신 사제가 천 명을 넘어설 정도로 그의 청소년 교육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평소에 존경하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이름을 따서 ‘살레시오 수도회’를 설립하게 된 배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의 이런 삶과 활동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자면 최근의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를 떠올리게 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라틴 아메리카 주교회의는 1968년과 1979년에 총회를 열어 공의회의 정신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를 논의했는데,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서는 가난한 이들과 어린이 청소년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함을 결의한 바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요한 보스코는 이보다 2백 년이나 앞서서 예수님의 활동의 핵심을 꿰뚫어보고 일생동안 헌신했던 혜안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나 요한 보스코가 가난한 이들과 청소년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바탕은 주어진 현실의 사회적 맥락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들을 눈여겨 보았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현장성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사랑은 모래알처럼 제각기 흩어져서 살던 사람들을 찰흙처럼 단단히 뭉친 공동체로 변화시켜 놓습니다. 이른바 공동체성입니다. 

 

  요한 보스코처럼 예수님의 정신이 제대로 머리에 박힌 가톨릭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가 살거나 일하는 곳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찾아내어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노력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신앙의 기운이 지닌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모래알갱이처럼 흩어져서 서로 죽기 살기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분위기를 신앙인이라면 숨막혀서 답답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공기를 자유스럽게 호흡할 수 있는 인간관계에서만 신앙인은 마음껏 숨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왕위에 오른 후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기에 부하들을 전쟁터에 내보내 놓고서 부하의 아내를 탐내기도 했고, 이런 불륜을 보고 자란 아들을 아버지로서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해서 끝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문제아 압살롬은 사랑받지 못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청소년과도 같습니다. 이 상태는 마치 마귀에라도 들린 사람처럼 천방지축이요 제멋대로이며 문제투성이에다가 사고뭉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릇 모든 악은 작은 죄가 벌려 놓은 틈바구니로 들어오는 법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가난한 청소년들 역시 사랑과 교육에서 소외되어 있어서 그들이 사회에 나왔을 때 부딪치는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부모들이 저마다 제 자식들만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자라나는 세대를 돌보려는 책임을 지려고 하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한 보스코 사제가 던지는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청소년을 돌보는 일은 모든 어른들의 공동 책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