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수성구 2022. 1. 29. 05:29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2사무 12,1-17; 마르 4,35-41 / 2022.1.29.;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이기우 신부

 

  하느님께서 점지해 주시고 백성이 지지하여 왕위에 오른 다윗은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올린 것도 잠시, 그 축복을 배신하는 어처구니 없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도 그 죄악을 감추어 보려고 얕은 꾀를 쓰다가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충직했던 부하 우리야와 그의 아내 밧세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성왕(聖王)이라고 칭송받던 다윗이 갑자기 그 거룩함의 가면을 벗고 교묘하고 간사하게 자기 죄를 감추려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안쓰럽다가 다음에는 교묘하다며 손가락질하지만, 그 다음에는 우리도 죄를 지을 때 또 다른 다윗이 되어 가는 경우를 겪으면서 자책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죄를 짓는 인간의 전형적인 교활함과 교묘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을 뉘우치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축복을 전해 주었던 나탄 예언자를 시켜 다윗의 양심과 신앙에 호소하셨습니다. 즉, 나탄이 다윗을 찾아와서 들려준 비유는 이미 수많은 양과 소를 가진 부자가 겨우 암양 한 마리만을 키우는 가난한 사람의 소유를 빼앗아 버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연히 다윗도 그 부자의 악랄함에 분노를 표시했지만 나탄은 결정적인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2사무 12,7). 나탄이 전해준 이 말씀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다윗의  귀와 가슴에 꽂히자 다윗은 항복했습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고 깨닫는 순간에 즉시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다윗의 이런 모습 또한 죄를 짓는 교활한 모습과 함께 인간의 솔직한 민낯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일화는 교묘하게 죄를 짓는 인간의 모습과 참으로 대조적인 모습, 즉 슬기롭게 그 죄를 뉘우치게 하시는 하느님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은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치는 바람에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된 위기에서 예수님께서 바람과 호수를 고요하게 잠재우신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제자들이야 당연히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고물을 배게삼아 잠만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우며 난리를 피웠습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 한 마디 말씀으로 사태를 진정시키셨습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앞의 ‘잠잠해져라’는 명령은 배를 집어 삼킬 듯 덤벼들던 바람에게 하신 듯하고, ‘조용히 하라’는 명령은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소란을 피우던 제자들에게 하신 것 같습니다. 

 

  이 상황은 군중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여러 비유 이야기로 가르치신 후에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거듭되는 가르침으로 피곤해지신 예수님이야 출렁이는 배 안에서도 태연하게 주무실 수 있었다고 하지만, 비유의 가르침을 군중의 맨 앞에서 듣고도 도무지 깨달음이 없었던 제자들로서는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르 4,41) 하고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기만 하면 거센 돌풍도 가라앉힐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돌풍 같은 자연현상을 가라앉히시는 일은 차라리 쉬운 일이었으나 제자들의 마음 안을 들뜨게 하고 있던 극심한 불신의 바람을 가라앉히시는 일이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람과 호수에게 명령하신 직후에 제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자연현상의 위기 속에서 믿음을 타박하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바람을 말 한 마디로 잠재울 수 있단 말입니까?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범람하는 강물에다 대고 기도하면, 부르짖으면 비가 그치고 강물이 줄어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제자들도 아마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께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가르치시고 난 후였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무릇 비유란 하느님 나라라는 보이지 않지만 현세를 움직이고 있는 신비요 진리를 보이는 사물과 사태에 빗대어 설명하는 화법입니다. 그 모든 비유에서 결론은 알아들을 귀가 필요하다는 것이요, 그 귀는 마음의 귀인 것이며, 깨달음이기도 하고 단연코 믿음입니다. 다윗에게 유혹이 찾아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보고 계심을 깨닫는 믿음이 있었더라면 그는 감히 그런 죄악을 저지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며, 더군다나 우리야를 죽여서라도 죄를 감추려는 더 큰 유혹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자신들의 능력이나 기도로써는 거센 돌풍을 잠재울 수 있으리라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겠지만,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달리 말하면 그분을 통하여 기도를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믿음을 지녀야 했습니다. 전례적 기도의 기본이 이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위기들, 우리를 가로막는 도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힘만 믿지 말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믿고 기도할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믿어야 할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