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연중 제4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수성구 2022. 1. 30. 07:06

연중 제4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4주일: 다해

복음: 루카 4,21-30: 예수님은 만민을 위해 오신 분이시다.

 

예언자는 항상 ‘불편한 존재’이다. 항상 하느님의 새롭고도 어려운 요구를 사람들에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예언자에게 폭력을 가하여 말을 못 하게 하거나, 귀를 막고 듣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예언자는 이러한 종교적 사회적 한계성을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도우심과 함께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 이렇게 예언자들은 많은 박해와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복음에 나오는 나자렛 사람들을 통하여서도 그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나자렛의 이야기에서 우선 조금 전까지도 별로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던 한 사람, 예수가 너무나 두드러지게 돋보이게 된다는 것에 질투심 같은 것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라는 말이 암시하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두 가지 사실, 즉 예수가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비천한 가문의 출신이라는 사실과 자신을 이사야서 61,1-2의 말씀을 실현한 장본인이라고 주장하는(21절) 사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의 눈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모습과 또 당신의 생활과 가르침과 기적들을 통해 나타나는 인간 이상의 어떤 모습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주게 된다. 인간이시면서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면서도 그 신비 앞에 혼란을 거듭할 것이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께 적개심을 갖는 것이 지방색을 드러내는 편협한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 같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23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기적을 나자렛에서는 하지 않으시고 카파르나움에서 행하신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기적은 무슨 광고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신앙이 있거나 믿고자 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에게 하나의 표징으로 보여주시는 절대로 자유로운 행위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를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타 마을의 그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나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나를 알 수 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의 영역을 넓혀주고 확장한다. 예수님을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만 잡아두려고 하는 것은, 즉 하느님을 나의 편의와 이익만을 위해서 이용하려고만 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계획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더는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일들도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열 능력도 없게 된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그분을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예언적 증거가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찬가에서 말하고 있듯이 모든 은총 중의 가장 위대한 은총이며, 누구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은총인 ‘사랑’을 통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주겠습니다.”(1코린 12,31)라고 하면서 사랑의 찬가를 노래한다(1코린 13,1-13).

 

우리가 세상에 선포해야 할 사명이 있는 그 ‘불편한’ 예언적 사명과 연결해 생각해 보자. “사랑이 없다면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불 속에 우리 몸을 던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신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투쟁과 묵상은 다만 하나의 같은 근원을 갖고 있다. 즉 사랑이신 그리스도이시다. 당신이 기도한다면 사랑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당신이 착취당한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모습을 되찾아주고자 투쟁한다면 그것 역시 사랑 때문이다.”(1974. 8. 30. 떼제의 둘째 편지).

 

그러면 우선 영원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둘째로는 그분의 변화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전해야 할 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우리의 힘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힘과 도움에 의지함으로써 ‘단단히 방비 된 놋 담처럼’ 우리 자신을 세울 힘을 갖추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용기를 갖고 외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바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은폐될 위기에 처해있는 가치들을 재확인시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령의 ‘예언적’ 능력이 필요하다. 인간의 법으로 짓밟히고 있는 태아의 생명에 관한 권리, 혼인의 비신성화, 외설 문학, 보편화된 폭력, 쾌락과 돈에 대한 발작적인 추구로 생명을 경시하는 세태를 생각하며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항상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이루어 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