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나의 이야기

도덕&비행기뜨는 하늘a moral and flying sky

수성구 2021. 6. 13. 14:12

 

도덕&비행기뜨는 하늘

a moral and flying sky 

참으로 밝은 햇살이 눈부시다.

The bright sunshine is so brilliant. 

우리의 삶에는 곧  밝은 햇살과 광명의

날을 보내고자 한다.

드문드문 난 깊은생각을 하는데 참으로

깊은 생각이 때로는 좀 모자라기도 한다.

I think deeply in rare times, but sometimes deep thoughts are a little short. 

난 내가 모자란다는 것을 알면서도 많은

마음속 생각이 나를 괴롭히고는 한다.

하늘을 보는 여유가 없지는 않지만 난 요즘

하늘을 잘 보지 않는다.

가끔씩 날아드는 비행기 소리가 나면 하늘을올려다 볼까 잘 하늘을 보지는 않는다.

Sometimes when I hear a plane flying, I try to climb the sky. I do not see the sky well. 

그래서 하늘이 파란지 구름이 있는지를 모른다.

무언가를 생각하면 파란 하늘에 새털같은 구름이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런데 난 오늘도 주님 만나러 가는 날 나의 모습에

단정하게 하고 간다.

그래서 난 우리 주님께 기도하는 모습이 이쁘게 보이려고 한다지만

내 늙어 빠진나이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아침에 미사를 지내려고 앉았는데 오늘 미사는 그냥

그렇고 그렇게 하시고 만다.

바닥에 방석 깔고 앉은 사람, 뒤에서 의자에 앉은 사람

모두 그렇게 미사에 참례를 한다.

Everyone sitting on the floor on the floor, sitting in a chair

 behind the back, is so worshipful to Mass. 

그러고는 난 우리 안나의얼굴을 보려고 까사미아에 갔더니

오늘은 그라시아가 계산을 한다.

오늘 보니 박숙희 글라라는 어디를 가고 없고 자모회 언니들만

봉사를 한다.

참, 이번에 성전 의자 교체에 기부금을 많이도 냈더라만

내가 자모히 언니들 인사를 해주려 하는데 우리 안나도 그렇고

모두 바빠서 인사를 해줄 여유가 나질 않는다.

오늘은 그리도 미사를 잘 다녀 온건데 근데 나한테 시비거는

사람이 한사람 있다.

Today I have been doing well in Mass, but there is one person who is a fugitive to me. 

황율리안나라고 다담아 집주인이라 한다.

괜시리 가만 있는 사람한테 이상한 짓을 하는거 보면 무언가의

불만이 있는거 같다.

이 모든거 우리 케롤린이 문제 되는거 아닌가 싶다.

오늘의 복음에서 보면 하느님 나라가 이와 같다고 한다.

아, 참 한가지 빠뜨린거 있는데 우리 주보에 우리 성당에

큰 신부님 삐돌이 신부님의 글이 주보에 났다

Oh, I missed one thing, but in our weekly note, the article of a big priest, a priest, 

앞면에 아닌 뒤면인가에  직함을 밝히지 않는데 잃어보니

우리 삐돌이 신부님의 글이라고 본다.

주보 4면에 연중 11주일이라면서 우리 삐돌이 신부님의 글이란다.

우리 상동 성당에 부임한지 6년이 되어 가는데 명강론을 한다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It has been six years since I was appointed to our Sangdong Cathedral,

 but there is no one who says that there is a theory of honor.

그건 모두 나중에 읽어 보시면 알게 되고는 한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는데 어느 나무 보다도 더큰 나무가 된다고 한다.

이 나무는 겨자씨를 뿌려서 나무가 쑥쑥 자란다고 한다.

그래서 너무 자라서 하늘에 새들로 와서 깃들인다고 한다.

So it grows so much that it comes to the sky with birds and it is said to be feathered. 

도덕의 계보/ 강용수 박사

철학자 가운데 현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꼽히는 ‘니체’,

그는 우리에겐 ‘신은 죽었다’,

‘니힐리즘’의 철학자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저서 가운데 오늘날 독일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의 유수 대학의 강좌로도 개설되어 있고,

니체의 완숙한 사상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바로 <도덕의 계보>입니다.

 

1887년, 마흔 셋의 니체는 자비를 들여 <도덕의 계보>를 출간합니다.

불과 2년 후 1889년 니체가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쓰려졌고,

이후 10여 년 가까이 투병생활을 하다가 죽은 것을 생각해보면 도덕의 계보 이후에도

몇 권의 책을 내긴 했지만, 사실상 니체의 사상이 논리적으로

가장 잘 정리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니체는 앞서 집필한 <선악의 저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소개된 사상을

『도덕의 계보』에 집약했습니다.

이전에 집필한 책들과는 차이점은 분명합니다.

기존의 글이 운문, 단편, 아포리즘으로 구성되어있다면

이 책은 논문형식을 갖춰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죠.

한마디로 니체의 사유의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세 개의 독립된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논문은 '선과 악' '좋음과 나쁨',

두 번째 논문은 '죄' '양심의 가책'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

세 번째 논문은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을 갖고 있죠.

 

제목처럼 세 편의 글은 각각 독립된 주제로 다뤄지고 있는데요.

첫 번째 논문은 선과 악(good-evil), 좋음과 나쁨(good-bad)의 개념과 기원을 분석하고 있고요,

두 번째 논문은 법과 윤리를 비판하며 죄와 양심에 대해,

세 번째 논문은 금욕주의적 이상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세 논문은 구성에서 목적과 의도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통일된 주제로 연결하여

종합할 수는 없습니다.

각각 도덕과 관련해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모든 가치의 기원과 이론, 가설 등을 비판적으로

논쟁하려는 의도에서 기획되었습니다.

니체는 심리학적 통찰을 통해 ‘선과 악’이 인간을 옭아매는 잘못된 굴레이며,

그 바탕에는 타인의 좋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시샘하고 부정하는 감정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세상을 ‘선과 악’이라는 좁은 잣대로 나눠 볼 것이 아니라,

자유정신에 기반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시야를 넓게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를 좀 더 풍부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부정의 정서를 극복하고

긍정의 정서가 필요하다고 니체는 말하고 있습니다.

 

자, <도덕의 계보>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계보’라는 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원상 계보(Genealogie)는 유래를 밝히는 ‘족보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상이 누구인지 따져보는 것처럼 선과 악의 가치가 어디서 어떻게 발생하였는지를

밝히는 작업이 계보학인 것이죠.

족보가 흔히 가족의 수직적인 연속성을 밝히는 것이라면 니체의 계보학은

이질적인 가치의 복합성, 복잡성, 비일관성을 밝혀내려 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죠.

니체는 계보학을 ‘쟁기날’에, 계보를 정리하는 것을 쟁기로 땅을 파는 광부의 작업에 빗댔습니다.

광부가 땅을 파내려 가듯 지층의 여러 겹을 파헤쳐 표면과는 다른 어떤 이질적인 심층을 밝힌다는 것이죠.

 

니체는 묻습니다.

“인간은 어떤 조건 아래 선과 악이라는 가치판단을 생각해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가치판단들 자체는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제까지 인간의 성장을 저지했던 것일까?

아니면 촉진했던 것일까?” 그래서 니체는 이에 대한 답으로 시대와 민족, 개인들의 등급을 구분하고,

그곳에서 가치의 기원을 찾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도덕의 계보>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니체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삶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벌처럼 꿀을 모아서 집으로 가져갈 뿐, 그 체험에 대해 몰두하고,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니체가 <도덕의 계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자하는 사람에게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이해하는 길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을 우리는 책 서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 각 논문의 주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나씩 풀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니체는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어떤 배경에서 형성된 것인지, 계보를 밝혀내고자 했습니다.

이 부분에는 흥미로운 비유가 등장하는데요.

독수리와 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둘의 관계를 선과 악, 그리고 좋음과 나쁨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니체에 따르면 각자의 입장에서 좋음과 나쁨으로는 설명할 수 있지만,

선과 악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이 어떤 과정으로 나타났는지 ‘계보’, 즉‘족보’를 따져 들어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좋냐, 나쁘냐의 문제가 아니라 같은 대상이라도

누가 판단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가치의 기원을 귀족과 노예로 구분합니다.

니체는 귀족들이 내리는 가치판단을 주인도덕, 노예들이 내리는 가치판단을

노예도덕이라고 합니다.

주인도덕에는 좋음과 나쁨의 가치판단이 들어있고 노예도덕에는 선과 악의 가치판단이

들어있습니다.

가치판단은 ‘목록’처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계급적 차이에서

유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예도덕과 주인도덕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선 귀족의 입장에서 보면요.

그들이 누리는 행복을 기준으로 자신의 현실을 긍정합니다.

자신이 가진 명예, 부, 건강을 좋은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귀족의 가치판단에서 좋음이란 “강한 몸과 생기 넘치고 풍요롭고

스스로 억제할 길 없이 넘쳐나는 건강 그리고 그것을 보전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

즉 전쟁, 모험, 사냥, 춤, 결투놀이와 강하고 자유로우며 쾌활한 행동을 함축하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영화에서 전쟁터에 나가는 용감한 전사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하기가 쉬우실 겁니다.

귀족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용기를 발휘합니다.

이러한 전사의 ‘용기’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덕’(탁월함)이라고 말하며

높게 보았습니다.

그러한 희생과 용기가 없다면 국가는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이렇듯 자신의 탁월함에 대한 긍정에서 출발한 귀족도덕은 타인이나 세상에 대해서도 좋다, 나쁘다로 판단합니다.

즉 ‘좋음’과 ‘나쁨’의 차이는 원래 귀족적인 가치판단에서 유래한 것이죠.

그렇다면 노예도덕은 무엇일까요?

귀족도덕(주인도덕?)의 정반대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노예도덕은 ‘선과 악’을 구분합니다.

이들 개념이 정반대에 위치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노예도덕은 타자의 부정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원한, 시기심, 질투로 번역되는 불어 르쌍티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르쌍티망은 어원 그대로 상티망의 반대 개념인데요.

‘Sentiment(Feeling)’이 인간의 능동적인 감정과 느낌을 말한다면

‘Ressentiment’은 외부에 대한 반응에서 생기는 수동적인 감정입니다.

니체는 이 르쌍티망에 주목했는데요.

원한, 시기심, 질투라는 감정이 ‘타자의 좋음’을 부정하는 노예도덕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르쌍티망은 더 많은 힘을 갖기 위해서는 남을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지배력을 높이려는 인간의 본성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좋은 예죠.

니체는 남의 힘을 빼앗아야만 자신이 강해진다는 의미에서 르쌍티망을

‘권력에의 의지’의 한 종류라고 말합니다.

오늘도 주님과 성모님의 은총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Today, I am spending my day in the grace of the Lord and the Virgin.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Thank you, healthy, I love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