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묵상글

기도하면서 청하는 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는다는 것

수성구 2021. 5. 29. 05:44

기도하면서 청하는 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는다는 것

기도하면서 청하는 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는다는 것

집회 44,1.9-13; 마르 11,11-25

2021.5.28.; 연중 제8주간 금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신 사건을 전합니다.

모든 민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할 성전이 제사를 독점하고

성전세를 받으며 장사꾼들에게도 뒷돈을 받고 허가해 주는 강도 같은 자들에 의해

더럽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이 성전정화사건을 나머지 두 복음서들도 모두 마르코 복음서를 따라 공생활 말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 가운데, 요한복음에서만 공생활 초기에 일어난 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공생활이 3년가량 지속된 것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들의 보도를 종합하면, 이 사건은 3년의 공생활 초기에 한 번,

그리고 말기에 또 한 번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제사 행태는 구조적인 민폐가 되고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한 개혁 과제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사건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는 장소입니다.

이 성전이 처음 지어진 때는 솔로몬 임금 시절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계약의 궤라 불리는 상자 안에 십계명을 새겨 넣은 돌판을

장막 속에 보관하면서 시나이 광야를 전전하기도 하고 유다 광야를 옮겨 다녔습니다.

오죽하면 통일왕국의 왕위에 오른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 하자

예언자 나탄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사양하셨습니다(2사무 7,5-6),

이 무렵까지는 모세 시절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광야에서

양떼를 이끄시는 목자의 친근한 이미지로 비추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라 사정이 여러 모로 안정된 솔로몬 임금 시절에,

레바논 산맥에서 베어온 향백나무와 방백나무로 성전을 짓고 금박으로

안팎을 씌워서 화려하게 성전을 지었습니다(1열왕 6,1-30).

이때부터 다윗 임금 시절 사제로 임명된 사독의 후손 사제들이

바빌론 유배 시절 70년을 제외하고는 근 천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성전 제사를 맡아 독점적으로 사제직을 수행했습니다.

이 무렵에는 유다 왕조와 성전으로 제도화된 권위를 뒷받침해 주시는

엄격한 가부장의 이미지로 하느님이 비추어졌을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제인 사두가이들이 성전에서 소나 양의 번제를 바침으로써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는 속죄대행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동안에 백성들은 스스로

하느님을 만날 수도 없었고, 직접 기도를 하는 일도 까다로운 율법 규정 속에서

이루어져야 했으며, 따라서 극심한 죄책감에 짓눌리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러한 집단적이고 종교적인 억압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인 병리상태를 초래했고,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목자를 잃어버린 양 떼로 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이 아닌 들판에서나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고 선포하신 메시지는 하느님과 백성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때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해방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기도를 가르쳐주신 일이나,

나중에 성령께서 내려오신 일은 이러한 종교적 해방을

전면적으로 가속화시킨 사태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선포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어떠한 종교적 억압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하느님을 찾을 수 있으며 기도로 인격적인 대화를 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은 과제는 하느님께 기도로 청하면서

기도한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자신감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을 찾으십시오. 하느님을 만나 기도로 말씀 드리십시오.

그리고 기도한 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믿으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