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축일:3월6일 성 크로데강 주교

수성구 2014. 3. 3.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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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3월6일
성 크로데강 주교
San Crodegando di Metz Vescovo
St. CHRODEGANG of Metz
(Hesbaye, Belgio, 712 – 6 marzo 766)
Born: c.712-17 at Hesbaye, Brabant, near Liege, Belgium
Died: 6 March 776 at Metz; relics, in the Benedictine Abbey of Saint-Symphorien,
were destroyed during the French Revolution

 

성 크로데강은 712년경 현재 벨기에 북동쪽 림뷔르흐(Limburg) 주의 하스바니아(Hasbania) 혹은 하스판구아(Haspangua)에서 프랑크족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근거는 희박하지만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카를 마르텔(Charles Martel)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는 생트롱(Saint-Trond)의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카를 마르텔의 궁정으로 들어가 그의 서기가 되고 737년에는 총리가 되었다. 메스 교구의 주교가 세상을 떠나자 741년 10월 1일 혹은 742년 9월 30일에 평신도였던 성 크로데강이 메스의 주교가 되었다. 주교가 된 후에도 그는 후에 카롤링거 왕조의 최초의 왕이 되는 피핀 3세(Pippin III)의 요청으로 세속적인 사무도 계속 담당하였다.

피핀 3세의 절친한 친구였던 그는 교회와 국가의 복지를 위해 성실히 노력하였다. 성 크로데강은 자신의 교구에 로마 전례와 그레고리안 성가를 도입하였고, 주교좌 성당 사제단의 공동생활을 도입하고 생활규칙도 저술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역사적으로 의전 사제단(Chapter of Canons) 설립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성당과 수도원의 재건과 신설에 주력하였고, 그가 메스에 세운 음악학교는 전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학교 중의 하나가 되었다.

마인츠(Mainz) 대교구장인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 대주교가 순교하자, 교황은 그에게 팔리움을 하사하여 대주교로 서임하고 프랑크 교황사절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메스 교구를 대교구로 승격시키지는 않았다. 경건하고 자비로운 심성을 지녔고 라틴어와 독일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던 성 크로데강은 프랑크 교회의 개혁자인 성 보니파티우스의 후계자로서 23년 동안 사목하면서 개혁을 위한 교회 회의들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는 766년 3월 6일 메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톨릭홈에서)

 

*독일의 사도.성 보니파시우스 주교 순교자 축일: 6월5일, 게시판1800번



 

 


의전사제단  儀典司祭團  라틴어  chapter of canons   
   주교좌(主敎座) 소속이거나 단체 소속이거나 주교좌 성당이나 단체 성당에서 좀 더 장엄한 전례예식을 수행하기 위한 사제단체이다. 의전사제단은 그밖에 법이나 교구장주교에 의해 위임된 임무도 수행해야 하며 업무와 집회, 업무의 유효성이나 합법성에 요구되는 조건, 보수, 복식 등을 정한 정관을 갖는다. 이 정관은 교구장 주교의 인준을 받아야 하며 그의 승인이 없는 한 개정되거나 폐지될 수 없다. 새 교회법은 의전사제단을 사목구에 결부시키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사목구 성당이면서 동시에 의전사제단 성당인 경우에는 의전사제단과 상관없이 사목구주임이 지명되어 법규정에 따른 고유한 직무와 권한을 행사하도록 하고 있다.  


의전수도회 儀典修道會  라틴어  canonici regulares  영어  canons regular   
   사제들로 구성되어 전례생활을 주목적으로 하여 고유한 회칙에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회, 중세에서 발달한 성대서원수도회의 한 형태이다. 대성당에서 공주(共住)하는 사제들에게 공동의 회칙에 따라 생활하며 사유재산을 버릴 것을 권유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정신에 따라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초에 대주교좌 성당을 중심으로 널리 조직되었다. 중세기에 가장 큰 의전수도회로는 성 아우구스티노 의전수도회(Canonici Regulares St. Augustini)와 프레몬트레회(Praemontratenses) 등이 있는데 중세가 끝나면서 쇠퇴한 다른 의전수도회들과는 달리 현재까지 많은 회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현대에 와서 전례생활 외에 다방면의 교육과 사목, 사회사업 등에 종사하고 있다. 


팔리움(라틴어  pallium)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교황과 대주교(경우에 따라 다른 주교)가 자신의 직무와 권한을 상징하기 위해 제의(祭衣) 위에 목과 어깨에 둘러 착용하는 좁은 고리 모양의 양털띠. 흰 모직천으로 만들어지는데 특히 성 아녜스 교회에서 아녜스 축일에 축성되는 어린 양의 털로 만들어 진다. 띠의 폭은 5센치 정도. 두 개의 늘어뜨린 장식과 함께 검은 색의 작은 십자가가 6개 장식되어 있다. 어깨 둘레에서 고리 모양으로 놓여 져 핀으로 고정되어 끝부분이 가슴 아래로 드리워진다. 팔리움의 초기 역사는 모호하나 황제의 휘장(徽章)에서 유래된 듯하다. 처음에는 로마 교황청과 아무런 연관없이 즉, 교황의 권위를 부여받는 것과 상관없이 대주교가 착용하였다. 후대에 교황 자신이 팔리움을 착용하게 되고 특별한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고위 성직자들에게 개별적으로 팔리움을 보내 주게 되었으며, 교황으로부터 팔리움을 받는 것을 점차 원하게 되었다. 9세기에는 모든 교구들이 팔리움을 받고자 하는 청원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 각 교구는 대주교 성성식(成聖式) 후 3개월 이내에 팔리움을 위한 청원을 교황에게 해야 한다. 이 청원이 허락되어 대주교가 장엄 주교미사에서 팔리움을 착용함으로써 비로소 관할구역 내에서의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팔리움을 ‘주교 임무의 충실성’(plenitude of the pontifical office)과 교황 권위에 참여함을 상징하고, 교황청과 일치를 보여주는 외적인 표지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피핀 3세 Pippin III, Pepin the Short

(영)Pepin Ⅲ. 별칭은 단신왕(短身王) 피핀(Pippin der Kurze).
714경~768. 9. 24 네우스트리아(지금의 프랑스) 생드니.

 

[개요]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 최초의 왕.
카를 마르텔의 아들이며 샤를마뉴의 아버지이다.
747년 프랑크 왕국의 사실상 단독 통치자가 되었고,
751년에는 이름뿐이었던 프랑크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왕위에 올랐다.
프랑크 왕 가운데 최초로 성별(聖別)된 왕으로,
성 보니파키우스와 교황 스테파누스 2세(754)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다

 

[당시의 상황과 왕위 등극]
  당시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은 실권을 잃었고, 권력은 점차 백작들과 다른 세력가들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본래는 왕실의 살림을 맡는 관직이었던 궁재(宮宰)가 점점 왕보다도 세력이 커져 섭정이나 부왕에 맞먹는 지위에 해당하게 되었다. 그러한 궁재들 가운데 부유한 가문 출신인 란덴의 피핀(피핀 1세)은 특히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 가문의 후손으로 741년에 죽은 카를 마르텔에게는 아들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아우스트라시아·알레마니아·튀링겐의 궁재인 카를로만이고, 둘째 아들이 바로 피핀 3세로 네우스트리아·부르고뉴·프로방스의 궁재였다. 737년 이후 프랑크 왕국 전역을 다스린 왕은 없었으나 메로빙거 왕조의 종주권만은 유명무실하게 남아 있었으므로 두 형제는 743년 힐데리히 3세에게 왕관을 씌웠다. 카를의 셋째 아들 그리포는 그의 정부였던 듯한 바이에른 고위 가문 출신 여인이 낳은 아들로, 741년 형들이 프랑크 왕국의 궁재가 되었을 때 그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후 수년 동안 많은 반란을 지휘해 몇 번 감옥에 갇히기도 했으나 결국 753년 프랑크와 적대하고 있던 롬바르드족과 합류하기 위해 가던 도중 알프스 산길에서 살해당했다. 당시 롬바르드족은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 공동의 적이었다. 그밖에도 742년 아키텐과 알레만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743년에는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가 전투를 벌였다. 744년에는 작센이, 그뒤에는 아키텐(745)과 알레만니아(746)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747년 카를로만이 수년 간 생각한 끝에 로마에 있는 수도원에 들어가자 피핀은 프랑크의 단독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피핀은 야심을 갖고 있어 궁재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왕이 되어 프랑크족을 다스리고 싶어했다. 그는 아버지처럼 용기와 결단력이 있었던 반면 아버지와는 달리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의 관계를 긴밀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750년 그는 교황 자카리아스에게 사절 2명을 보내 편지로 이렇게 질문했다. "다스릴 힘을 전혀 갖고 있지 않는 왕을 모시는 일이 과연 현명한 것입니까?" 교황은 "통치능력이 있는 왕을 갖는 것이 나을 것이다. 로마 교황의 권위로써 그대에게 프랑크의 왕위를 허락하노라"라는 대답을 보냈다. 결국 힐데리히 3세는 폐위당하고 수도원으로 보내졌으며, 피핀은 751년 11월 수아송에서 보니파키우스 대주교와 몇몇 성직자들에 의해 왕으로 축성받았다.
 
[피핀과 교황 스테파누스 2세]
당시 교황청은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였다. 롬바르드족 왕 아이스툴프는 총주교대리령으로 알려진 라벤나와 그 주위 영토를 장악했고 롬바르드 군대는 남쪽으로 진군해 로마를 포위하고 함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752년 자카리아스가 죽은 뒤 교황의 자리에 오른 스테파누스 2세는 753년 11월 험한 산길을 지나 프랑크 왕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754년 여름까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생드니 대수도원에 머무르면서 피핀과 그의 아들인 카를(샤를마뉴)과 카를로만을 각각 왕과 후계자로서 축성해주었다.

피핀은 군대를 이끌고 교황과 함께 이탈리아로 갔으며 알프스에서 아이스툴프가 거느리는 롬바르드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아이스툴프가 롬바르드 왕국의 수도 파비아로 도망치자 피핀의 군대는 파비아 주변의 땅을 약탈했다. 결국 아이스툴프는 라벤나와 교황이 권리를 주장하는 로마의 재산과 라벤나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으며 그때 피핀은 물러갔다. 그러나 아이스툴프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교황은 수차례에 걸쳐 피핀에게 자신의 고충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피핀은 756년 다시 이탈리아에 왔고, 아이스툴프는 다시 약속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이스툴프는 말에서 떨어져 죽었고(756) 757년 4월 데시데리우스가 롬바르드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같은 해 스테파누스도 죽었고, 새로 교황에 선출된 파울루스 1세는 전임 교황과 마찬가지로 피핀에게 계속 도움을 구하는 서신을 냈다. 그러나 피핀에게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는 748, 753년에 작센에서 일어난 반란과 749년 바이에른에서 일어난 봉기를 진압해야만 하는 한편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키던 아키텐에도 진격해야만 했다. 피핀은 768년 아키텐 정벌에서 돌아오는 길에 생드니에서 숨을 거두었다.

피핀은 카롤링거 왕조의 창시자로서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의 강력한 후원자였다는 사실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교황의 권리 주장은 피핀이 아이스툴프와 싸운 뒤 아이스툴프가 로마 주위의 영토를 반환한다고 서약한 데서 비롯된다. 피핀은 프랑크 왕국 내에 대주교령(大主敎領) 설치를 원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종교회의를 장려하고 신학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는데, 이런 사실들은 그가 쓴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 E. S. Duckett 글

 

 

샤를마뉴, 스투코로 된 조상(9세기경),
스위스 뮌스터에 있는 Church of St. John the Baptist 소장
출처 : Copyright © By courtesy of Weidenfeld & Nicholson Ltd. ; photograph, Ann Mun


샤를마뉴 Charlemagne
샤를 1세, 카를 1세라고도 함.

별칭은 대제(Carolus Magnus/Charles le Grand/Karl der Grosse/Charles the Great).
742경. 4. 2~814. 1. 28 아우스트라시아 아헨(엑스라샤펠).프랑크 왕국의 왕(768~814 재위)

 

768년 피핀이 죽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제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 결국 샤를마뉴는 승리했으며 자기를 배신하고 카를로만의 편을 든 롬바르드를 멸망시켰다. 롬바르드의 수도인 파비아 포위 공격이 아직 진행되고 있는 동안 샤를마뉴는 로마로 가서 교황과 함께 774년의 부활절을 축하하고,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교황령으로 이양하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성베드로 성당에서 재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넓혀준 교황의 땅은 미미했고 롬바르드 왕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은 자신이 차지했다.

799년 5월 교황 레오 3세는 로마에서 반대파들의 습격을 받자 샤를마뉴의 궁정으로 피신해 지원을 간청했다. 샤를마뉴는 800년 11월 교황과 함께 로마로 가서 황제의 예우로 영접을 받았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 때 로마인들이 샤를마뉴를 황제라고 찬양하자, 교황은 성유식을 집전하여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샤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제에 임명했다.

샤를마뉴의 궁정은 그의 가족, '카펠라'라는 왕의 개인 예배를 집전한 성직자들, 그리고 속세의 관리들로 구성되었다. 속세의 관리들 중에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 왕권을 일부 위임받아 행사하도록 허용된 영주들, 왕실의 집사들, 왕실 관리인들이 포함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의 궁정을 왕국의 정치와 행정 중심지뿐 아니라 지성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로 아인하르트와 앨퀸이 있었다. 샤를마뉴는 이들을 비롯한 여러 문필가들의 도움을 얻어 교회 신부들의 저술과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는 왕실도서관을 설립했으며, 프랑크 왕국의 젊은 기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궁정 학교를 창설했다.

 

샤를마뉴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은 후세들이 제국 내부의 평화와 통일성 및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명성은 죽은 뒤에 더욱 빛났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에도 서프랑크(프랑스) 왕국과 동프랑크(독일)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적 전통은 샤를마뉴가 세운 선례에서 자양을 얻어 생명력을 유지했다. 오토 1세 때 아헨은 독일 통치자들이 대관식을 올리는 도시가 되었고, 로마 교황에 대항한 대립 교황 파스칼리스 3세는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의 요청으로 1165년에 샤를마뉴를 성인으로 추증(追贈)했다. 프랑스에서는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샤를마뉴를 기리는 전통을 되살렸다.
  샤를마뉴의 진정한 후계자가 독일인이냐 프랑스인이냐 하는 문제는 중세뿐 아니라 근대에 접어든 뒤에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샤를마뉴의 후계자라 자처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통합해 '서방' 유럽을 구성하자는 논의는 샤를마뉴의 본보기를 상기시켰다. 민간 전설과 시 문학도 이런 정치적 전통과 나란히 발전해 롤랑을 다룬 서사시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샤를마뉴의 명성은 한때 그의 제국이던 지역 내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부 슬라브어에서 '왕'을 뜻하는 낱말은 그의 이름에서 파생한 것이다(체크어의 král, 폴란드어의 król 등). 샤를마뉴는 전기적 문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인간성은 그의 행위와 동시대인들이 남긴 기록으로 조립할 수 있을 뿐이다. 샤를마뉴의 강렬한 개성은 분명 신의 뜻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굳은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고 개인의 독실한 신앙심과 일상생활의 쾌락, 종교적 사명감과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 거친 태도와 지적 성장에 대한 갈망, 적과 타협하지 않는 태도와 공정함을 양립시킬 수 있었다. 그의 독실한 신앙심에는 정치적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제국과 교회는 제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의 단위가 되었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에서)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노래 : 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