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축일:3월3일 성녀 구네군다 황후 동정.

수성구 2014. 2. 27. 07:14

오늘의 묵상

교회가 가난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관심을 돌리는 것은 늘 쇄신의 중요한 표지였습니다. 지금의 교황님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택하셨을 때 우리는 다른 설명 없이도 앞으로 어떤 새로운 일이 전개될 것인지를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한 잡지는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이 곧 '프로그램'"이라는 표현으로 새 교황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그 기대가 어긋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세계의 많은 이가 감동하면서 교황님의 행보를 바라보고 또 따르고 있습니다.
교황님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하게 된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교황님은 교황 선거가 끝난 뒤 가깝게 지내던 브라질의 한 추기경에게서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말라.'는 간곡한 조언을 들었을 때, 바로 '가난'을 반려자로 삼으며 통회 생활을 했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모습이 교회 구석구석에 살아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여기신 교황님의 생각은, 다름 아니라 복음의 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다짐이라 하겠습니다. 교황님의 이 다짐의 뿌리를, 연민 가득하면서도 단호한 예수님의 오늘 말씀에서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삶의 중심에 두는 가운데 재물을 홀로 소유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나누며 그들과 함께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신앙인의 길, 교회의 길에서 결코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단히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물론 가난을 선택하는 방식과 그 정도는 삶의 형태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분별력과 현명함을 마땅히 주님께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모든 것을 팔지 않는' 신중함에, 가난한 이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하지 않고 재물에 집착하지 않을뿐더러 때로는 스스로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내적 자유와 결단이 없다면, 그것은 복음의 참뜻을 흐리게 하려는 마음이나 다름없습니다.

 

 

축일:3월3일 성녀 구네군다 황후 동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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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3월3일

성녀 구네군다 황후 동정

Saint Kunegunda,(Kinga)

Sta. Cunegundis, V

Santa Cunegonda Imperatrice

Died:1040.buried at Bamberg, Bavaria near Saint Henry

Patronage:Lithuania, Luxembourg, Poland

Cunegonda = che combatte per la stirpe, dall’antico tedesco

 

 

성녀 구네군다는 부친 스그프리드와 모친 헤드비그로부터 아주 어릴적부터 신심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바바리아의 공작인 성 헨리꼬와 결혼하였는데,

이때 헨리꼬는 동방의 어느 목수가 제작한 십자가를 선물했고, 이것이 지금도 뮨헨에 보존되어 있다.

 

*성 헨리코 축일:7월13일.게시판1272번.

 

어느 전기작가는 그들 부부는 결혼식날에 동정서원을 발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당시의 황제 오토 3세가 서거하자, 헨리꼬는 로만스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그의 대관식은 마인쯔에서 성 빌리지스에 의하여 성대히 거행되었다.

또 1013년에는 그들이 로마로 가서 교황 베네딕또 8세로부터 황제관을 받았다.

 

이러한 구네군다였지만 그녀는 얼마 뒤에 중상자들의 희생물이 되었고,

남편마저 일시적이나마 아내를 의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확고히 항변해야 할 입장에 선 그녀는 불에 의한 시죄법 적용을 허용해 달라고 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헨리꼬는 자신의 의혹을 풀고, 마음으로 일치하여 살았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정을 베풀었고, 국내의 신앙 전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구네군다는 황제에게 청을 들여서 밤베르그 대성당을 비롯히여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짓게 하였고,

교황 성하가 직접 오시어 축성하도록 주선하였다.

그러던 중에 그녀가 중병을 앓게 되었는데,

그녀는 병이 나으면 까셀 근교 카우푼겐 성당을 수 차례나 방문하고,

미사 때 복음을 봉독한 뒤에, 그녀는 원래의 십자가 일부를 제대에 봉헌하였다.

 

그 후 그녀는 주교로부터 수녀복을 받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그녀는 지난날의 황녀로서 모든 부귀영화를 잊고 비천한 환경과 초라한 수도원에서 기꺼이 살았으며,

하느님 앞에 흠 없는 삶을 살았다고 주위 사람들이 높이 칭송할 정도였다고 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독실한 신자는 신분의 귀천이나 빈부 여하에 불구하고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영혼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

성녀 쿠네군다는 독일의 황후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그의 양친도 왕후의 가정이었다.

황제나 황후로서 공경 받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녀 쿠네군다는 특별히 세상에 알려진 성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열심한 그리스도교 신자인 부모의 교육을 받아 경건하게 자랐고,

또한 왕후의 여식으로서의 적합한 교육을 받았다.

나이가 차서 쿠네군다는 바바리아 왕의 원의로 그의 황후가 되어 성대한 결혼식도 거행했다.

이때 하인리히(헨리코)는 동방의 어느 목수가 제작한 십자가를 선물했는데,

이것이 지금도 뮨헨에 보존되어 있다.

 

그녀가 전부터 동정의 서원을 발하고 있었던가는 확실치 않지만,

결혼식 후 남편인 왕에게 하느님께 정결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하여

일생을 동정으로 지내겠다고 청했다는 것이다.

이 말에 의외에도 남편은

“실은 나도 그런 희망을 갖고 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남매와 같이 사이좋게 지내자.

그래도 세상에는 이를 끝까지 감추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하고 대답했다 한다.

그때 쿠네군다의 즐거움이 어떠했는가는 이루 표현키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같이 두 사람은 정결한 생활을 계속하며 서로 격려하며 각각 덕행의 길로 매진했다.

쿠네군다는 모든 상류 부인의 전형으로 공경을 받고

남편인 하인리히(Heinrich, 성 헨리코, 축일 7월13일)는 또한 오토(Otto)대제의 사후 바바리아 뿐 아니라

전 독일을 다스리는 황제로 추대되어 마인쯔에서 대주교의 손으로 왕관을 받았다.

 

 

대관식 후 황제는 곧 어떤 전쟁에 충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국내를 시찰하면서 다닌 뒤 비로소 황후가 기다리고 있는 바데르보룬에 돌아왔다.

그러나 쿠네군다도 그동안 한가하게 지낸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국모의 책임을 완수하며, 다른편으로는 기도나 빈민, 병자의 방문등 쉴 새가 없었다.

그녀는 국경일에는 화려한 의상으로 사람들과 연회를 같이 했지만,

홀로 되면 검소한 의복으로 갈아입고 엄한 단식재를 지켰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에서 선행도 할 수 있는 한 남몰래 행하려고 했지만 덕의 광채는 숨기지 못하고

그로 말미암아 한층 더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1114년에 황제와 같이 로마를 방문하고 성 베드로 대성정에서 교황의 손에서 다시 독일 황제의 관을 받았다.

하인리히는 교회에 복종하는 표시로써 그것을 또한 성 베드로 제대에 봉헌하고

아울러 종교에 충실하고 교회를 보호할 것을 맹세했다.

쿠네군다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이 예식에 참여하고 진심으로 자기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그 기도가 허락되었음인지 사실 하인리히 황제가 다스리던 시기는 평화로운 나날들이었다.

 

 

귀국하자 황제는 밤베르크(Bamberg)에 크나 큰 성당이 붙은 한 수도원을 건립했고

틈이 있을 때마다 그 수도원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지내기를 좋아했다.

이 수도원은 지금도 남아 있으며 경건했던 황제를 사모하는 유일한 기념으로 되어 있다.

그 건축에는 쿠네군다도 자기의 재산을 희사하며 할 수 있는 데까지 원조를 했고,

황제의 도움을 얻어 카우푼겐에 한 여자 수도원을 건설하고 황금보석과 귀중품 전부를

제단의 장식품으로 바침으로써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을 공경하는 정성을 표시했다.

 

이렇게 두 성인은 기쁨 속에 살아가고 있었으나

무슨 영문인지 황제의 마음에 그녀의 정결을 의심하는 마음이 일어나

지금까지 그녀를 존경하고 있었던 만큼 그의 번민도 보통 이상의 것이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습관대로 하느님께 직접 그 정결의 진부(眞否)를 결정해 줄 것을 간청하게 되었다.

그 방법은 장기 열두 개를 불에 벌겋게 달게 해 놓고 쿠네군다에게 맨발로 그 위를 건너게 하여

화상을 입으면 죄가 있는 것이고 무사하면 죄가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황후도 몸의 정결함을 밝히기 위해 이를 원하고

잠시 하느님께 기도를 바친 후 맨발로 한창 달은 쇠의 장기 앞에 섰다.

황제를 위시하여 입회인들은 결과의 여하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다보고 있었다.

쿠네군다는 천천히 맨발로 뜨거운 쇠 위를 걷기 시작했다.

한 발 두 발 이렇게 벌겋게 달은 쇠 위를 걸어갔어도 기적으로 아무런 상처를 입은 데는 없었다.

끝끝내 열 두 개를 전부 걸어갔다.

사람들은 저절로 소리를 지르게 되었다. 그녀의 결백은 충분히 증명된 셈이다.

그것을 목격한 황제는 달려가서 그녀 앞에 머리를 숙이고 이유 없이 의심한 점에 대해 용서를 청했다.

쿠네군다도 쾌히 남편을 용서해 주고 두 성인의 마음은 전과 같이 명랑해졌다.

 

두 사람은 많은 선행을 하다가 1024년 황제가 먼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황제는 친우, 중신, 사제들을 병석에 부르고

국정(國政)에 관해 세밀하게 유언을 한 후 비로소 쿠네군다와 같이 평생 동정을 지킨 사실을 말했다.

일동은 경탄하며 다시금 황제, 황후의 성덕에 탄복하며

또한 이전에 쿠네군다의 무죄를 밝힌 기적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황제를 여읜 쿠네군다는 하느님만을 위해서 살았다.

그녀는 잠시 평화로이 나라를 다스리다가 친척인 콘라도 1세에게 국정을 양도하고,

그 후는 기도와 자선 사업으로 날을 보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1년이 지나서 그녀는 손수 설립한 카푸친의 여자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정해

예수 십자가의 한 조각을 거룩한 유물로 그곳에 헌납하고 아름다운 의복은 전부 버리고

그 대신 친히 만든 누추한 옷을 입고  발을 하고 주교께서 축성한 수건을 썼다.

그리고 나서 즐거이 수덕에 힘쓰며 이전의 고귀한 신분도 잊어버린 듯이 아무리 천한 일도 실어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성당을 장식하는 여러 물품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고

예전과 같이 병자 방문 등도 기꺼이 계속했다.

 

수도 생활을 한 지 15년 후 그녀도 마침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국으로 떠났다.

유해는 유언에 의해 밤베르크의 성당에 운반되어 그녀가 늘 오빠라고 부르던 배우자

성 헨리코(하인리히) 옆에 매장하게 되었는데,

행렬 도중 그녀의 덕울 사모한 백성들이 사방에서 모여와 길 옆에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 성녀 쿠네군다 수도자(2회, +1292년)축일:7월23일,게시판1285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