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축일:3월2일(1월25일) 복자 하인리히 소이에(수소)/프라하의 성녀 아네스 동정

수성구 2014. 2. 26. 21:07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근본적인 선택을 분명히 바라보게 합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 삶의 가치를 무시한 채 현세에 대한 관심을 끊고 영혼만을 돌보라는 잘못된 영성이나 이원론을 담고 있는 것이 아?爛求? 더욱이 종교적 가르침과 세상살이 사이의 채워질 수 없는 간격을 새삼 확인하게 하는 불가능한 이상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라는 예수님의 간곡한 초대입니다. 우리가 단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 있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깊은 염려와 사랑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삶의 변화는 올바른 삶의 우선순위를 가졌을 때 가능하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얼마나 정곡을 찌르며 '현실적'인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재물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분부는 우리 모두에게, 곧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오만한 부자에게도, 실의와 분노로 가득 찬 궁핍한 이들에게도 절실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려는, 말 그대로의 '기쁜 소식'입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실천하는 삶의 변화를 위해서는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으며, 오늘 복음에 분명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곧, 세상살이에 대한 심려 이전에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삶의 가치인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정의를 추구하는 데 힘을 쏟는다면 지상의 것들을 온전하게 선용할 수 있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기술'이며, 세상살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축일:3월2일(1월25일) 복자 하인리히 소이에(수소)/프라하의 성녀 아네스 동정       //

//

 

 

 

 

 

축일:3월2일(1월25일)
복자 하인리히 소이에(수소)
Blessed Henry Suso
Beato Enrico Suso (Susone) Domenicano
(Uberlingen, Germania, 21 marzo 1295 - Ulm, 25 gennaio 1366)
Born:21 March 1295 at Uberlingen, Germany as Heinrich von Berg
Died:25 January 1366 at Ulm, Germany
Beatified:1831 by Pope Gregory XVI
Enrico = possente in patria, dal tedesco

Order of Friars Preachers; Dominicans; Order of Preachers

 

 

헨리쿠스 수소(Henricus Suso, 또는 헨리코 수소)는 유명한 도미니코 회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뛰어난 제자로, 독일 남서부 슈바벤(Schwaben)의 콘스탄츠(Konstanz)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베르크(Berg)의 헨리쿠스 백작이고, 그의 어머니는 수소 가문의 성녀 같은 분이었다. 그래서 그의 실제 이름은 하인리히 폰 베르크(Heinrich von Berg)였으나, 어머니의 영향으로 수소라는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3세 때에 콘스탄츠의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여 신비 생활과 신적 사랑을 통해 강한 영적 변화를 체험하고는, 18세에 '영원한 지혜와 영적 결혼'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콘스탄츠에서 공부를 마친 후 쾰른의 에크하르트의 학교에서 대학 공부를 하였다. 공부를 마치고 콘스탄츠로 돌아온 그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놀라운 현시를 보았으며, 예수 성명을 특히 공경하고, 천주의 모친께 남다른 신심을 지녔기 때문에 가끔 ‘신비가’란 소리를 들으며 생활하였다.

 

그는 매우 아름다운 신심서적을 저술하였는데, “영원한 지혜에 관한 소책자”(Das Buchlein der ewigen Weisheit)가 가장 유명하다. 이 책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작품으로 알려진 "준주성범"(Imitatio Christi)과 함께 여러 세기에 걸쳐서 인기를 누린 수소의 문학적, 신비학적 걸작이다. 그는 1348년 울름(Ulm)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가서 생활하다가 1366년 1월 25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831년 4월 16일 그의 '문화의 길'(viam cultus)을 높이 평가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학자들은 그를 "독일 신비가들 가운데, 아니 어쩌면 모든 신비 저술가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참고자료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0권 - '주조, 하인리히',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4년, 7869-7872쪽. 
(가톨릭홈에서)

 

 


하인리히 소이에(수소)의 놓아두고 있기- 정달용신부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그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한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해보면, ‘버리고 떠나 있기Abgeschiedenheit’이다. 또는 ‘두루 놓아두고 있기Gelassenheit’이다. 이것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1260~1328)가 평생을 두고 생각하고 가르친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한때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알지 않는 사람 그리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그가 가난한 사람이다.”

첫째,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 그가 가난한 사람이다. 사람이 참으로 가난해지려면 ‘원한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그때처럼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는 그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둘째, ‘아무것도 알지 않는 사람’, 그가 가난한 사람이다. 사람이 참으로 가난해지려면 ‘안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그때처럼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는 그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알지 않았다.

셋째,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그가 가난한 사람이다. 사람이 참으로 가난해지려면 ‘가진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것이 사물이든 자기 자신이든 ‘가진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그때처럼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는 그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사람’은 ‘버리고 떠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두루 놓아두고 있는 사람’이다. 


놓아두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제자였던 하인리히 소이세는 1295년경 3월 21일 스위스의 콘스탄츠에서 출생했다. 콘스탄츠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들어간 소이세는 수도원에서 기초교육을 받고, 1313년부터 1318년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물리학, 형이상학 등을 중심으로 철학을 전공한다. 이어 1319년부터 23년에는 슈트라스부르그 수도회 대학에서, 1323년부터 1327년까지는 쾰른의 수도회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다. 이때 스승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만난다. 콘스탄츠 수도원으로 돌아온 소이세는 선생Lector으로 후배를 가르치고 이후 20년간 그 곳에서 산다. 1330년경 그의 가르침은 이단異端의 의심을 받아 선생으로서의 직책을 정지당한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 시기에 ‘두루 놓아두고 있기Gelassenheit’라는 신비사상을 터득하게 된다. 1347년경 소이세는 독일 울름의 수도원으로 옮긴다. 그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는 ‘두루 버리고 떠나 있기’라고 하는 자신의 신비사상을 익히며 살았으리라 추측된다. 136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울름 수도원에 머물렀다. 소이세는 《진리의 서書》 《지혜의 서》 《생애》 등 중세 독일어 저서를 남겼으며 1831년 복자福者 위에 올랐다.

 

소이세는 스승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스승의 이러한 가르침을 잘못된 오해로부터 건져낸다. ‘놓아두고 있는 사람’은 소이세에 의하면 ‘단순하고 순수한 하나’를 가지고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과 하나가 된다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순하고 순수한 하나’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있는 것이 아니다.’ ‘무無’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모든 것의 그리고 일체의 것의 ‘근원根源’이며 동시에 ‘목표目標’이다.

‘놓아두고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리고 ‘저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으로부터 그리고 일체의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그리고 심지어 자기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두루 놓아두고 있는 사람’은 그리하여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단순하고 순수한 하나’와 ‘하나가 된다’. ‘이렇게 있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아니-있는 것’ 즉 ‘무無’로 드러나는 ‘단순하고 순수한 하나’와 ‘하나가 된다’. 이것이 하인리히 소이세의 ‘신비사상神秘思想’이다.


 

그르게’ 놓아두기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 그리고 ‘두루 놓아둔다는 것’은 잘못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잘못된 놓아두기’가 될 수 있다. 즉 ‘그르게 놓아두기’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 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의 ‘과업課業’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결코 하나의 되어버린 ‘상태狀態, Zustand’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과정으로 머물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하나의 완성된 그리하여 고정된 상태로 오해하고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마르게리테 폰 포레테Marguerite von Porete, 1310년 사망)은 ‘무無가 되어버린’ 영혼에 대해서 그리고 ‘자유로워진’ 영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한 영혼(사람)은 ‘옳은 일’이나 ‘선한 일’을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옳은 일’이나 ‘선한 일’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무無’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옳은 일’이나 ‘선한 일’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제 이렇게 ‘자유로워진’ 영혼(사람)은 ‘단식’ ‘고행’ 그리고 ??竪덧?등을 따로 힘쓰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상관없는 일’이다. ‘관심 밖의 일’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람(소이세의 작품에 나오는 ‘이름 없는 무법자無法者’)도 있다. 어느날 소이세에게 사람의 모습을 가진 하나의 형상이 다가 왔다. 소이세가 물었다. 그리고 그가 대답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어느 곳도 아니다.”
“너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을 원하는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네 이름은?” “이름없는 무법자다.”
“네 이성理性이 목표로 하는 것은?”
“구애받지 않는 자유다.”
“무슨 말이냐?”

“사람이 전적으로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도 세계도 상관하지 않고, 앞도 뒤도 가리지 않는 것이다. 구애받지 않는 자유는 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는다.”

 

 

올바로 놓아두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내가 설교할 때, 나는 언제나 첫 번째로 ‘버리고 떠나 있기’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즉 사람은 ‘자기 자신과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사람은 단순한 선성善性 즉 ‘신神 속에’ 들어가서, 그와 ‘하나의 모습eingebildet werden’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 말하려 한다”고 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어떤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선한 일werke로부터 벗어나’, ‘전적으로 자유로워지려 한다’하여 그들을 나무라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루가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10,38-40)를 가지고 그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분주하게 음식을 장만하고 있는 마르타와는 달리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그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는, 단순히 ‘일에서 벗어나’ ‘자유롭기 위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마리아는 앞으로 ‘일’을 하기 위해서,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 잠잠히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마리아는 그 후 사도들을 따라 다니면서, 부지런히 빨래하고 밥하는 일을 했다.

하인리히 소이세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면서 ‘두루 놓아두고 있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서술해 내고 있다. ‘놓아두고 있는 사람der gelassene Mensch’은 ‘자기 자신과 모든 것을 놓아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옳은 일’이나 ‘선한 일’을 한다. 다만 그는 이 모든 일을 그에 마지막까지 ‘집착하지 않고’ 그 일들을 ‘놓아두는’ 그러한 마음으로 한다.

‘참으로 놓아두고 있는 사람’은 ‘일 속에서’ ‘쉬고 있다’. 그리고 ‘일 속에서’ ‘한가롭다’.

그리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그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는 일이나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고요하다. 

 

- 정달용 / 신부. 대구가톨릭대 교수(철학). 저서로 《그리스도교 철학》, 다수의 철학 논문이 있다.

 

도미니코 수도회 성인들
베로나의 성 베드로 순교자 1205-1252.축일:6월4일(4월29일).게시판1196번.
폴란드의 성 히야친토.1185-1257.축일:8월17일.게시판1319번
복자 베르셀리의 요한 (6번째 총장). 1264-1283. 축일:12월1일. 게시판1500번
헝가리의 성녀 마르가리타 수녀. 1242-1271.축일:1월18일(1월26일) 게시판1588번
페냐포르트의 성 라이문도 학자. 1175-1275 축일:1월7일.게시판1556번.
성 대 알베르토 주교학자1207-1280. 축일:11월15일.게시판1471번.
성 토마스 아퀴나스 학자1225-1274. 축일:1월28일.게시판1590번.
몬테풀치아노의 성녀 이녜스 수녀1268-1317.축일:4월20일,게시판1720번

성 빈첸시오 페레르 사제 설교가. 1350-1419. 축일:4월5일.게시판1697번.
복자 피에솔레의 요한(프라 안젤리코) 1386-1455. 축일:2월18일.게시판1624번
피렌체의 주교 성 안토니노 (S. Antonino). 1389-1459. 축일:5월10일.게시판1754번
교황 성 비오 5세(1566-1572)트렌토 공의회.1504-1572. 축일:4월30일.게시판1739번.
리치의 성녀 카타리나 수녀.1522-1589. 축일:2월13일(2월2일).게시판1613번.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 [빗자루 수사] 1579-1639.평수사.축일:11월3일 게시판1451번.
리마의 성녀 로사 동정 1586-1617. 축일:8월23일.게시판1327번.

신비가 복자 하인리히 소이세 Heinrich Seuse (1295 ∼1366)축일:3월2일.게시판1643번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Eckhart Meister(1260?∼1327?)
신비가 복자 요한네스 타울러(Joh. Tauler, 1300-1361)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

 

가난한 이들의 귀한 보물이여!

죄를 짓고 지극히 높으신 우리 임금님을 잃었을때
천사들의 마음을 아프게하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를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보물이신 당신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당신을 향해 충고를 구하고
도움을 청하며 몸과 마음의 눈길을 당신께 올립니다

제 마음의 기쁨 유일한 희망 내 삶의 즐거움이여

 

쓰디쓴 영혼과 동요하는 마음과 눈물맺힌 얼굴로
얼마나 여러번 당신을 바라보는지 당신은 아십니다

지극히 경건하고 복된 동정녀여 당신의 도움이 있기에
온갖 위험에서 벗어납니다

어머니 저의 희망 제 삶의 유일한 위로이신 어머니

오시어 제 상처를 낫게 하소서 제 슬픈 마음에 위안을 주소서


- 엔리코 수소네

 

 

 

 

 

축일:3월2일(3월6일)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 동정

St. AGNES of Prague

St. Agnes of Bohemia

Santa Agnese di Boemia (o di Praga) Monaca

1205 at Prague, Bohemia (modern Czech Republic) -

6 March 1282 at Saint Saviour convent, Prague, Bohemia of natural causes

Beatified:1874 by Pope Pius IX

Canonized:12 November 1989 by Pope John Paul II at Rome

 

 

성녀 아녜스는 1205년경 보헤미아의 왕 프레미슬라우스의 딸로 태어났다.

황제의 청혼을 거절하고 1236년 왕궁 근처에

가난한 자매 수도원을 지어 동정녀들을 살게 한 후 스스로 그곳에 입회하였고

오랫동안 수도원장으로 봉사하였다.

성녀 클라라와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고 여러 번에 걸쳐 서신 교환을 하였다.

1280년에서 1283년 사이에 선종하였다.

 

*성녀 클라라(축일:8월11일.게시판1312번.1313번. 성클라라수도회창설자.문장:성체 현시대)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는 성 벤체슬라오(축일:9월28일.게시판1389번.체코슬로바키아의 수호성인)의 후손이며,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축일:11월17일.게시판1474번.재속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녀)의 사촌 자매이다.

 

 

 

성녀 클라라가 프라하의 성녀 아녜스에게 쓴 편지

 

프라하의 아녜스가 누구이며 그녀가 어떻게 클라라를 알게 되었을까?

아녜스는 1205년에 프라하에서 태어난 공주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보헤미아의 Premsyl Ottokar I세 임금(1197-1230)이고,

어머니는 헝가리의 Arpad 왕조 출신 Constance이다.

아녜스의 사촌 자매가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인 헝가리의 성녀 엘리자베스이다.  

 

아녜스가 3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믿을만한 전통에 의하면

Silesia의 공작의 아들인 Boleslaus와 약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 사람이 금방 세상을 뜨게 되었다. 그녀는 Premonstratensian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한 때 그녀는 후에 헨리 4세 황제가 되는 프레데릭 2세 황제의 아들과 약혼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그는 오스트리아의 Luke Leopold 공작의 궁정에서 살았었다.

그래서 아녜스는 그 궁정으로 보내졌지만,

헨리가 Leopold의 딸과 결혼하는 바람에 그녀의 약혼은 후에 그녀의 아버지에 의해서 파기되었다.

 

아녜스는 프라하로 되돌아왔는데, 그 때 영국의 헨리 3세로부터 다시 한 번 약혼 신청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젊은 공주는 동정 서원을 하였고, 모든 혼인 신청을 거절하였다.

 

 

성녀 클라라와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1225년에 첫 번째 작은 형제들이 오게 되었다.

아녜스는 그들을 통해 아시시의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한 편, 그녀의 사촌인 엘리자베스는 성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참회자들의 회에 가입하여,

Marburg에 병원을 짓고,거기에서 병자들을 돌보며 살았다.

 

1230년 아녜스의 아버지 Premsyl Ottokar I세가 죽자

그녀는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의 생활양식에 따라 자발적으로 가난의 삶의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녀의 오빠인 Wensenslaus I세가 1232년에 그녀에게 땅을 주어서

거기에 성 프란치스코에게 봉헌하는 병원을 지어

그 병원을 Crosiers of the Red Star(빨간 별이 새싹들? -

이들은 나중에 성 아오스딩의 회칙을 받아들인 봉사단체이다)

에게 맡겨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또한 작은 형제들을 위하여 성당과 수도원을 지어 주었고,

1233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명확히 청원하여 자신의 삶을 인준 받은 후,

트렌트에서 그녀의 삶에 함께 하고자 들어온 가난한 자매들을 위해 수도원을 지어 주었다.

아녜스는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이 받아들인 복음적 삶이 양식에 따라 살기를 원했다.

그녀는 1282년에 프라하에서 죽었으며, 1874년에 비오 9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9년 11월 12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를 시성하였다.  

 

 

성 다미아노 수도원 회랑

 

클라라는 아녜스네게 여러 편의 편지를 썼다. 4개의 편지가 다 보존되어 있다.

첫 번째 편지는 1234년 6월 11일 이전에 쓰여졌다. 이때는 아녜스가 아직 서원을 하기 전이었다.

클라라는 그녀를 아직 “보헤미아의 위대한 왕 각하의 따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두 번째 편지는 1234-1239년 사이에 쓰여진 것인데, 이때 작은 형제회의 총장은 엘리아 형제였다.

이 편지에서 엘리아 형제가 언급되고 있다.

 

세 번째 편지는 1238년으로 연대를 추정하는데,

그것은 1237년에 그레고리오 교황이 클라라회원들에게 시토회원들처럼 금육을 지키라고 권함에 따라

금육을 지키는 것과 관련한 어렴움들에 대한 답을 이 편지에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 편지는 또한 자신이 성 프란치스코에게 봉헌하여 지은 병원(혹은 간호시설)이

다른 수도 단체에 의해 관리되어서

그녀 자신은 현세의 관심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한다는 것이 언급하고 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이 생각에 대해 애초에는 반대하였으나,

후에는 Crosiers of the Red Star에게 병원을 넘겨주는 것을 받아들였다.

 

마지막 편지는 한참 후인 1253년에 쓰여지는데, 이때는 클라라가 죽을 무렵인데,

연대를 그렇게 보는 이유는 이 편지에서 클라가 자신의 동생 아녜스를 언급하면서,

아녜스가 클라라의 죽음 몇 달 전에 Monticelli 수도원으로부터 돌아왔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성 다미아노 수도원 회랑의 다른 모습

이 편지들은 상당히 신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편지들은 여성적 영성의 다양한 주제들을 발전시키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정배에 관하여;

봉헌된 동정성; 가난의 찬미; 가난하고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관상;

육화의 신비 안에서의 복되신 동정녀; 단식과 금식에 관한 실질적인 규정들;

그리스도의 여러 신비들 안에서 관조되는 그분의 겸손.    

 

여기서 우리는 이 편지들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들을 던지는 것으로 자족함이 좋겠다.

보헤미아의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들은 1,2,3, 또는 4LAg라고 표기될 것이다.  

 

“자매는 그분을 사랑할 때 정결하고,

그분을 만질 때 더 깨끗해지고,   

그분을 맞일할 때 그대는 동정녀입니다”(1LAg 8)

 

“가난을 사랑하고 포옹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부(富)를 부여하는, 오 복된 가난이여!  

가난을 소유하고 또 소유하기를 열망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하늘나라를 약속하시고

의심할 여지없이 영원한 영광과 복된 생명을 주시리니, 오 거룩한 가난이여!  

 

말씀 하시자 존재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존재한 하늘과 땅을 다스리셨으며  

지금도 다스리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황송하옵게도 무엇보다 특별히 포옹하신,

오 성스러운 가난이여!“(1LAg 15-17).

“오히려 가난한 동정녀여,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포옹하십시오”(2LAg 18).

"고귀하신 여왕이여, 그대의 정배를 닮으려는 열망으로 바라고, 깊이 생각하고, 관상하십시오“(2LAg 20).

“그대의 마음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혼을 영광의 광채 속에 두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신적 실체의 형상 가운데에 두고,

그대의 전존재를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 안에서 변화시키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태초부터

하느님 몸소 마련해 놓으신 분의 벗들이 느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3LAg 12-14).  

 

“동정녀께서 잉태하시고 거룩한 태중의 작고 은밀한 곳에 보셨고,

동정의 품에서 기르신 그 위대한 하느님의 지극히 감미로우신 어머니께 매달리십시오”(3LAg 18-19).  

 

“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는 자매여, 주님 안에서 부탁하고 간청합니다:

그대가 지켜 온 단식은 무분별하고도 불가능한 것으로 내가 알고 있는데

이 엄격함을 지혜롭고 신중하게 삼가시고...”(3LAg 40).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요. 오, 왕후이신 자매여,

이 거울을 매일 들여다보시고 지존하신 임금님의 딸과 지극히 정결한 정배가 단장해야 하는

모든 덕행의 꽃과 의복으로 속속들이 단장하고...

 

먼저, 거울의 맨 밑에서부터 보시고,

말구유 위에 강보에 싸여 주워 계시는 그 가난을 깊이 바라보십시오.

오, 놀라운 겸손이여, 오, 기막힌 가난이여!

천사들의 임금이시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분이 구유에 누어 계시다니!

다음으로, 거울의 중간을 보시고 그분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겪으신 무수한 수고와 고통

그리고 그분께서 지니신 겸손과 함께 복된 가난을 깊이 바라보십시오.

이제 끝으로 거울의 맨 위를 보시고 십자가 나무 위에서 고통 당하시고

거기에서 가장 수치스런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깊이 바라보십시오”

(4LAg 15; 19-23).

 

- 작은형제회홈에서www.ofm.or.kr -

 

 

성녀 클라라와 자매들이 사용하였던 성 다미아노 성당 가대

3월2일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 (2회)  
 성녀 클라라가 쓴 편지 중에 남아 있는 네 통의 편지 수신인인 프라하의 아네스 성녀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1205년 거룩한 동정녀이며 순교자인 아네스의 축일 전날에 보헤미아 왕, 프리미스라우스 오토카 1세의 딸이 태어났다. 그녀는 세례 때 성녀 아네스의 이름을 받았다. 헝가리의 성 엘리사벳의 숙모인 어머니는 어린 딸이 놀랄 만큼 진지함을 알고 기뻐하였다.
그 당시 관습에 따라 공주는 세 살 때 실레지아의 공작의 아들과 약혼하고 당시 헤드위그 성인이 장상으로 있던 트레브니츠에 있는 실레지아 수도원으로 보내져서 교육을 받았다. 3년 후에 약혼자가 죽자 그녀는 보헤미아 도잔에 있는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성 헤드위그에 의해 뿌려진 성덕의 씨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러 제왕들의 청혼에 시달린 그녀는 그레고리오 9세 교황에게 중재해 줄 것을 간청하여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그후 아네스는 거룩한 신랑과 결합하기 위하여 수도생활을 열망하였다. 가난한 클라라회 명성이 보헤미아까지 자자하여 아네스는 프라하 수도에 가난한 클라라회 수도원을 세웠다. 성녀 클라라는 5명의 수녀를 보내주었다. 아네스와 7명의 젊은 귀족여성들이 이 수도원에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그녀는 그들 가운데 기도의 열정에 있어서, 순명과 수도적 수련에 있어서, 극기와 겸손에 이르기까지 덕행의 모범으로 두드러졌다. 수도원장직을 받아들이라는 교황의 명령은 겸손한 그녀에게 큰 시련이었다. 그녀는 그 직함을 지니지 않고 그저 “장상 수녀”로 불리는 것을 허락을 받았다. 거룩한 어머니 성녀 클라라의 거룩한 열정을 닮은 열정으로 가난을 지켰다. 그녀는 왕인 오빠가 보내는 왕가의 선물을 거절하고 수녀들이 개인적인 소유물을 지니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천상의 덕이 가득했던 그녀는 40년 동안 하느님께 봉사하고 1282년 3월 2일에 천상으로 돌아갔다.

 

기도
오 하느님, 복된 아네스 동정녀로 하여금 왕궁 생활의 즐거움을 경멸하고 당신의 십자가를 겸손하게 따르게 하여 천상 높은 곳으로 들어올리셨으니, 저희에게 그녀의 중재와 모범을 통하여 영원한 영광에 함께 하게 하소서.  영원히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묵상
그리고 이 세상에서 순례자나 나그네같이 가난과 겸손 안에서
주님을 섬기며 신뢰심을 가지고 동냥하러 다닐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셨으니
부끄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여러분을
하늘나라의 상속자와 왕이 되게 하고, 물질에 가난한 사람이 되게 하면서도,
덕행에 뛰어나게 하는 지극히 높은 가난의 탁월성입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들, 이 가난에 완전히 매달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하늘 아래서는 결코 다른 어느 것도 가지기를 원치 마십시오. -작은 형제들의 제 2회칙 6장-
(재속프란치스코 한국국가형제회홈에서)

 

 



골고다 언덕위에 (노래 : 차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