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봉헌 생활의 날)/성녀 가타리나 데이 리치

수성구 2014. 1. 26. 15:28

오늘의 묵상
젊은이들이 즐겨 부르는 『가톨릭 성가』 469번 ‘사랑하면 알리라’라는 젠 성가의 가사는 이러합니다.
“언제나 나는 물었다. 언제나 주께 물었다./ 세상은 사랑 찾는데 왜 고통이 있냐고?/ 오직 한마디 내게 주었네, 마치 물음에 답하듯이./ 사랑하라 알고 싶거든 빛이 솟음을 너 보리라./ 사랑하라 말해 주네. 사랑을 하면 알리라./ 사랑하라, 슬픔 가고 기쁨을 찾으리.”
오늘 주님 봉헌 축일에 교회는 ‘봉헌 생활의 날’을 지내며 주님께 봉헌된 삶을 선택한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들은 위 성가 가사처럼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찾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십자가의 주님께 세상의 모순과 고통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정직하고 강렬하게 물었던 이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논리와 복음의 가르침 사이의 적당한 타협에 만족할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에 대한 추구는 사랑의 선택 안에서만 그 참된 길을 발견하는 것임을 깨닫고 그 길을 걷기로 결심한 이들입니다.
독일에 머물렀던 시절, 오랜 숙고 끝에 봉헌의 삶을 선택한 한 분과 교분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욕심과 바람이 아니라 오직 정직하게 ‘진리와 진실을 찾는 이’가 되기를 바라던 성실한 젊은이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공동체와 이웃을 위한 사랑의 삶에 그토록 애타게 찾던 진리가 있음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많은 수도자가 자신의 서원을 더욱 새롭게 다지는 이 복된 날, 문득 자신의 응답의 결실에 감사하고 있을 그가 떠올랐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봉헌 생활의 길은 수도자들만이 아니라 조금은 다른 방식이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주어져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생살이에서 실천할 사랑의 소명을 주님에게서 부여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봉헌 생활의 날)/성녀 가타리나 데이 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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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콘]예수의 성전 봉헌. 모스크바 화파. 72 X 62cm. 1500년경. 개인소장.

 

복되신 동정녀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여.

당신으로부터 어둠에 있는 자들을 밝히는

주님의 의로우신 태양이 솟아 오르셨으니

기뻐하소서. 의로우신 시므온이여.

우리 영혼을 해방시키시는 분을 품에 안으셨나니

용약하소서.

 

2월2일 주 입당 축일 아뽈리띠끼온 중.

 

여기에서 성가정이 깊은 믿음을 가졌으며,또한 지극히 가난했다는 것도 암시적으로 표현한다.

동방교회는 봉헌의 예식 속에서 두마리의 비둘기는

그리스도가 옛 계약과 새 계약 모두의 으뜸(머리)이시라고 지칭하는 찬미가를 담고 있다고

예리하게 해석한다.

 

 

성모 뒤의 요셉이 안고 있는 비둘기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교회와, 그리스도가 유일한 머리이신

신.구약성서의 상징이다.

 

마리아는 두 손을 외투 자락으로 감싼채로 봉헌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시므온은 흠숭의 표시로 몸을 앞으로 숙이며 역시 외투 자락으로 감싼 손으로 받아 안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임마누엘이신 아기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맨발에 짧은 겉옷을 입고 쭉 뻗은

시므온의 팔에 앉아 축복을 내리는 자세를 하고 계신다.

 

즉 시작이 없으신 성부의 말씀이 당신의 신성을 분리시킴이 없이 시간 안에 시작으로

들어오심을 뜻하는 것이다.

 

 

즉 세상의 주인이신 분이 육신을 취하여 아기가 되셨고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던 분이 그 율법을 준수하여 당신 자신을 성전으로

데려오게 하셨다는 것이다.

 

 

시므온의 뒤에 있는 안나는 역시 옛계약의 한 대표자이다.

그녀는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인내, 기다림 그리고 갈구함을 표상한다.

 

4세기경 예루살렘에서는 이 날을 행렬을 곁들인 장엄 축일로 지냈고, 성무일도를 촛불과

함께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7세기경에는 로마에서도 이 축일을 지내기 시작했고 촛불 켜는 풍습을 보존하여 오늘날 초

축성 미사로까지 발전하였다.

 

(이콘.신비의 미에서)

Presentation of Jesus in the Temple-ANGELICO, Fra

1440-41. Fresco, 158 x 136 cm.  Convento di San Marco, Florence

 

 

루가2,29-32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기다림의 끝

시므온은 평생을 조용히, 참을성 있게 하는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40,1이하)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시편 130-,6)도 더, 시므온은 이스라엘이 그렇게도 고대하던

새로운 날이 오고 있음을 이 아기에게서 알아보았다.

 

그의 기다림은 끝났으며, 약속은 이루어졌다.

 

시므온의 예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전성과 만나게 된다.

아기 예수의 눈을 들여다 본 시므온은 죽음의 그림자와, 재개된 창조의 영광을 동시에 보았다.

안나도 시므온과 함께 이 예언에 동참하고 있다.

시므온이 한 말들과 루가의 이야기에 나오는 이 나이든 여인의 생애는 하나의 예언 그 자체였다.

그 날이 왔다.

주님께서 당신의 성전에 들어오셨다. 이 분이 바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주님이시다.

 

나는 모든 인간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주리니

너희 아들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리라.(요엘3,1 ; 사도2,17)

 

 

[ICON]The presentation at the temple

XV c., Novogorod Museum. (Russian Icons)

 

축일:2월2일

주님 봉헌 축일 (봉헌 생활의 날)

Presentation of the Lord

Presentazione del Signore

Praesentatio Domini

Candlemas

 

성탄 후 40일째 되는 날에 지내는 이 축일은

예수님을 낳으신 마리아께서 모세 율법대로 정결례를 치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성전에 바치신것(루가 2,22-38)을 기념한다.

그리고 이날 전통적으로 교회는 1년 동안 사용할 초를 축복하며 전례 때마다 그 불을 켜 놓는다.

(정결례 <취결례> : 산모 축복식이라 할 수 있는데, 모세 율법에 따르면,

산모는 출산한 지 40일 만에 성전에 나아가 몸을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주님 봉헌 축일’(2월2일)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제정하시고, 전 세계 교회가 이를 거행하도록 하셨다.

봉헌 생활에 대하여 어버이다운 배려를 해 오셨던 교황께서는

봉헌 생활은 형제 자매들에게 예수님의 삶과 행동을 일깨워 주는 "살아 있는 기념"이라고 하셨다. (교황 권고`봉헌 생활` 22항 참조).

수도회성은 이 봉헌 생활의 날을 적극적인 성소의 날이 되도록 준비하여, 모든 신자,

특히 젊은이들이 하느님의 커다란 은총인 봉헌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는 계기로 삼자고 당부하였다.

 

 

성 소프로니우스 주교의 강론에서

(Orat. 3, de hypapante, 6.7: PG 87,3,3291-3293)

 

밝고 영원한 빛을 받아들입시다.

 

경건한 신심으로 주님의 신비를 받들고 경축하는 우리 모두는 영접하는 마음을 지닌 채

그분을 맞으러 나갑시다.

 

이 만남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하고 또 등불을 들고 가기를 거절하는

사람도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들고 가는 촛불의 광채는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만사를 밝게 해주시고 암흑을 몰아내시며 영원한 빛의 풍요함으로 비춰

주시면서 오시는 분의 신적 광채를 보여 주고,

 

또한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갈때 영혼에게 광채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지극히 정결하신 천주의 동정 모친께서 당신 팔에 참 빛을 안고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찾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그 빛으로 밝혀져 모든 이들을 비추는 빛을 우리 내부에 들고서 참 빛이신 그

분을 맞으러 나갑시다.

 

 

빛께서는 "참으로 세상에 오시어" 어둠에 싸여 있는 세상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 데서 우리를 찾아오시어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셨습니다." ;

우리가 오늘 경축하는 신비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비추어 준 빛을 표시하고 장차 그분에게서 받을 광채를 나타내 주는

등불을 손에 켜 들고 마중 나갑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함께 모여 하느님을 맞으러 나갑시다. 모든 사람을 비추어 주시는

참 빛께서는 참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 모두 그 빛으로 밝혀져, 그 광채로 빛납시다.

 

우리 중 아무도 이 광채로부터 제외되어서는 안되며 아무도 어둠 속에 남아 있기를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광채를 발하면서 앞으로 나아갑시다.

우리 모두 함께 모여 빛나는 모습으로 연로한 시므온과 더불어 맞으러 나아가 밝고

영원한 그 빛을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모두 시므온의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에게 참 빛을 보내어 어둠을 몰아 내시고

우리 모두를 빛나게 해주신 빛을 낳으신 아버지께 감사의 찬미가를 부릅시다.

 

우리 역시 그  빛을 통해서 뭇 민족 앞에 마련해 주시고 새 이스라엘인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밝혀 주신 하느님의 그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이 그리스도를 본 후 현세의 사물에서 해방된 것처럼 우리도 그 빛으로

말미암아 어두운 옛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베들레헴에서 우리에게 나아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포옹하셨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이방인이었지만 이제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십니다.

우리는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을 우리 눈으로 보았고 우리 마음이라는 품안에서 하느님의

가시적 현존을 받아들여 새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축제를 매년 지낼 때마다 이것을 기념함으로써 미래에도 이 신비를 잊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가톨릭홈에서)

 

 

Presentation at the Temple-MANTEGNA, Andrea

c. 1460. Tempera on wood, 67 x 86 cm. Staatliche Museen, Berlin

 

동방의 옛 전례는 이 축일이 갖는 의미를 매우 잘 표현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탄생 후 40일째 되는 날, 모세법(출애 13,11-13; 레위 12,6-8)에 따른

첫 봉헌 예식으로써

 

성전에서 선조들의 하느님을 보여 주시고, 믿음의 백성을 대표하는 시므온과 안나를

만나셨다.

 

 

시므온과 안나는 "만민의 빛"이신 예수님의 현현을 증언하고 찬양한다.

이 사건의 여러 부분들은 강생의 대축제를 끝마치는 이날의 축제를 특징짓고 있다.

오늘은 무엇보다 주님의 봉헌을 기념하면서 빛의 행렬 때에 주님과 당신 백성의 만남의

상징인 시므온의 만남도 기억한다.

 

그리고 부수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의 정결 예식도 기억한다.

이러한 관습에서 오랫동안 2월 2일을 ’마리아의 정결례 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이날 미사는 먼저, 성전에 봉헌되신 주님(입당송, 본기도, 감사송)과 시므온의 만남(감사송,

영성체송, 영성체 후 기도)을 기억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될 수 있기를 청하며(본기도) 은근히

정화를 보이고 있다.

 

빛의 행렬은 하느님 집에 들어가는 우리의 발걸음을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하고,

우리 모두 한 형제가 되게 한다.

 

우리는 하느님 집에서 빵을 나누며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오실 때까지" 그렇게 할 것이다(행렬전의 사제의 권고)

 

우리는 오늘 시므온과 안나처럼 "세상의 빛"이신 분을 만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깊은 믿음으로 이 빛을 환영한다.

살아서 이 믿음을 충실하게 고백한 이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에서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주님과 만날 것이 약속된다.

 

(가톨릭홈에서)

The Presentation of the Temple-CHAMPAIGNE, Philippe de

1648. Oil on canvas, 257 x 197 cm. Musees Royaux des Beaux-Arts, Brussels

 

구약 시대 모세의 울법에 의하면, 사내아이를 낳은 부인은 누구든지 40일째 되는 날 성전에

참배하고 감사의 희생을 바치게 되어 있었다.

 

그 희생물로서는 양 한마리와 작은 비둘기 한 마리가 보통으로 되어 있지만, 만일 가난한

사람이라면 비둘기 두 마리도 무방하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더구나 낳은 사내아기가 첫 아이일 때에는 그 외에도 다소의 헌금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든 율법을 항상 잘지키시는 성모는 이규정도 충실히 완수하셨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께서는

반드시 지키셔야 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이유는 성모는 어머니시기는 하지만 세상의 어머니와는 전혀 달라 대천사 가르비엘의

알림으로 잉태하심을 알고,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낳을 때까지 어머니인 동시에 또한 아무 하자 없으신 깨끗한 동정녀였고,

그의 아들은 인간에게 율법을 제정하여 주신 하느님의 성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자게서는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신 만큼 무슨 일이든 인간이

본받아야 할 모범을 보여주시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항상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생각하시는 성모께서는 자진해 성전으로 올라가셨다.

이 얼마나 큰 순명의 덕이고 또한 겸손의 덕인가!

 

성모께서 겸손하시다는 제일 첫째 이유는 하느님께서 대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셔서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아가씨,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함게 계십니다"하고 찬미를 하게 할 만쿰 존귀한 몸이시지만,세상의 보통

어머니들을 위해 준 율법까지 준수하신 점이다.

 

또한 성모 마리아의 겸손의 둘째 이유는 성자께서 만물을 맞드신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의 희생물인 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신 사실이다.

 

물론 아들이 첫아기였기 때문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약간의 헌금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같이 참배하러 간 양부이시고 보호자이신 성 요셉은 평일의 노동으로 피와 땀을

흘리며 번 돈으로 제정된 헌금을 하게 되엇다.

 

아드님이 성전의 주인이신데더 불구하고 이를 행하신 요셉은 이또한 얼마나

겸손하신 분이신가!

 

그의 순종과 겸손은 모든 이에게 칭찬을 받았다.

 

주님의 봉헌 예식 중 시메온이라는 노인이 성전에 와 있었느데, 이 사람은 약속된

구세주의 강림을 오랫동안 기다리며 매일같이

 

이 성전을 방문하고는 열심히 이것을 하느님께 구했으므로 하느님께서도 그의

열성에 탄복하셨을 것이다.

 

하루는 구세주를 뵈옵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계시를 하느님께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시메온은 즐거워하며 든든한 마음으로 살아 왔는데, 어느날,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와서 성모님께서 안고 계시는 성자를 뵈옵자

 

즉시 주님의 계시로 오래 기다리던 구세주시라는 것을 깨닫고 성스러운 기쁨에

충만된 그는 어린 아기를 자기 품에 안고 소리 높이 부르짖었다.

 

 

 

[ICON]La Presenta de Jesus au Temple. 15c. (ICONES DE TVER)

 

"주여, 이제는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루가 2, 29-32)

 

 

이것은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온전히 성령께서 시메온의 입을 빌어

말씀하신 것이다. 그만큼 이 말씀은 존엄한 것이다.

 

우리는 구약이 성취됨을 목격했다. 주님께서는 진실로 만민의 빛이시다. 동정 성 마리아는

시메온의 말씀을 들었을 때 성스러운 기쁨으로 충만되었을 것이다.

 

자신은 그와 같이 존귀하신 성자의 어머니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성 요셉도 동일한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자기의 수고가 보람이 있어 자신과 성모의 겸손과 청빈이 이제는 모든 이에게 칭송을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네들은 가난하고 비천한 신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세상을 구속하실 자를

위탁받고 이 성전에서 거룩한 성자의 영광을 같이 누릴 수가 있었다.

 

이 얼마나 행복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이와같은 즐거움 속에 있으면서 성모는 슬픈 말씀도 듣게 되었다.

즉 시메온이 마리아를 향하여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를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 "(루가 2,34-35)하고 말했다.

 

그와 같이 말하는 시메온은 마치 예언자와 같았다. 성모나 요셉이 잠시 그 자리에서 떠나지도 않고

이 기이한 말씀을 잠잠히 생각하고 있을 때

 

뜻밖에 거기에 나타난 것은 84세인 한 과부였다. 그녀의 이름은 안나라고 부르며 다년 간 성전을

떠나지 않고 오로지 기도와 단식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는데,

 

성모의 품에 안기신 성자를 보고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자기와 함께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던

이들에게 이 거룩한 아기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주님의 율법대로 예식을 거행한 후 마리아와 요셉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마리아는 성서에

기록되기를 이러한 말씀을 모두 마음에 간직했다고 한다.

 

참으로 성모는 몇 번이고 이에 대해서 생각하셨는지 모른다. 그것은 즐거운 말씀이기도 했고

동시에 슬픈 말씀이기도 했다.

 

 

주님 봉헌 축일은 예수 성탄 축일부터 40일째 되는 날에 지낸다.

또 노(老)시메온은 성자를 빛이라고 불렀으므로 이날 미사 전에 초를 축성하는 예절을 행한다.

가톨릭의 나라에서는 이 축성한 초를 보관했다가 임종시에 켜 놓는 습관이 있다.

이 초를 축성할 때의 교회의 기도문은 임종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며,

그 초가 임종하는 이로 하여금 하느님께 신뢰를 갖게 하고,

 

그 사람이 성모의 전구로 인하여 곧 영원한 빛을 받을 수 있도록 구하는 것이다.(대구대교구홈에서)

 

 

[icon]La Presenta de Jesus au Temple 15c (detail)

 

봉헌생활 (Vita Consecrata)

요한 바오로 2세 (1996년 3월 25일)

교회 안에서 역할이 대단히 중요한 봉헌생활의 중대한 의미와 그 미래 전망을 새로운 천년기를

맞이하여 고찰하는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

 

 

하느님 나라에 봉사하는 봉헌생활

105. "수도자가 없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

봉헌생활은 바로 그 가없는 헌신과 사랑 때문에 그 유용성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며,

무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질식할 위험에 놓인 현대에서는 더욱더 중요합니다.

"봉헌생활 같은 구체적인 표징이 없을 때 교회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는 사랑은 식어지고,

복음이 전하는 구원의 역설은 무디어지며,

 

세속화로 치닫고 있는 세상에서 신앙의 ’소금’은 그 맛을 잃게 될 위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3)

교회와 사회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게 자신들을 완전히 봉헌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는 결코 봉헌생활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부"인 교회의 가장 깊은 내적 본질을 웅변으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에 대한 복음선포는 봉헌생활에서 신선한 열정과 능력을 발견합니다.

하느님의 아버지다운 모습과 교회의 어머니운 모습을 보여줄 주 있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이

생명과 희망을 갖도록 일생을 바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고귀한 목적을 위한 봉사에 투신하기 이전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변모되도록 자신들을 내맡기며 복음에 완전히 순응하는 봉헌된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 전체는 그의 수중에서 이 큰 은혜를 발견하며, 이를 받아들이라는 명백한 초대와 존경과

기도로서 이 은사를 증진하는 데 기꺼이 헌신합니다.

 

이러한 생활의 복음적 탁월성을 활신하는 주교, 신부, 부제들이 설교와 식별,

현명한 영성적 권고를 통하여 성소의 씨앗을 발견하고 장려하도록 노력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신자들은 봉헌된 사람들의 열정과 사랑의 역략이 계속하여 자라남으로써 오늘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향기(2고린 2,15 참조)를 전파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사목자, 평신도, 봉헌된 사람들,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봉헌생활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새로운 성소자들을 기꺼이 환영하고 지원할 책임이 있습니다.4)

 

 

 

[전례] 주님 봉헌 축일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하였나?
에제리아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386년 예루살렘에서는 성탄-공현 후 40일 째 되는 날 이 축일을 지냈다고 합니다.
그 후 450년에는 초 봉헌 행렬이 여기에 덧붙여졌습니다. 이 축일이 시리아까지 퍼져 간 것은 6세기였습니다.

 

그리고 이 축일에는 처음부터 행렬 예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 교회는 7세기 후반에

 

이 축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레고리오 성사집」은 Ypapanti(만남)이라는 이름으로 이 축일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황 연대기(Liber pontificalis)는 "그리스인들이 Ypapanti라고 부르는

 

성 시메온의 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후 프랑크 지방에서는 이날을 '성모 취결례(정화) 축일

 

'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2세기 동안 이 두 호칭을 동일한 지방들에서 같이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두 번째 호칭이 더 자주 사용됩니다. 그리고 18세기 프랑스 전례에는 이 축일의 이름을

 

현재의 '주의 봉헌'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 호칭은 1969년의 로마 전례력에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이 축일의 의미는?
이 축일의 핵심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낳으신 마리아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 예식을 행한 것과 예수님을 성전에서 봉헌한 두 가지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의 행렬에 사용되던 초를 장엄하게 축복하던 전통이 한 해 동안

 

사용할 초를 축성하고 모든 전례에서 그 촛불을 켜놓는 관습으로 정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날

 

성전에서 그리고 각 가정에서 사용할 초를 축성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마리아가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였듯이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사람들이 자신이 선택한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하기 위해서 교회는 이날을 '봉헌 생활의 날'로 함께 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날의 예절은?
주의 봉헌 축일 전례는 초를 강복한

다음 초를 들고 행렬하는 데서 그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사제가 하느님의 집으로 나아가는 행렬이

 

무엇을 기념하는지를 밝히는 말을 함으로써 이 예식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사제는 성수를 뿌려

 

초를 축복리고 행렬이 시작됩니다. 행렬하는 동안 시메온의 노래-'주님,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주의 종을 편히 떠나가게 하소서-를 부릅니다.
행렬이 끝난 다음은 제대에 경의를 표하고

 

향을 드린 후 대영광송을 노래한 다음 본기도를 드림으로써 미사 전례로 이어지게 됩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축일:2월13일(2월2일)

성녀 가타리나 데이 리치 동정

St. Catherine dei Ricci

Santa Caterina de’ Ricci Vergine

Firenze, 25 aprile 1523 - Prato, 2 febbraio 1590

Caterina=donna pura=pure woman.

Dominican

 

가타리나 데이 리치는 투스카니의 프라또에 있는 도미니꼬 수도원의 수녀이다.

그녀는 좋은 감각과 정성을 다하여 맡아온 수련장과 장상직을 사임하였는데,

그녀의 놀라운 신앙 체험들은 많은 여론을 불러 일으켰다.

 

 

예를 들면, 매주일 같은 시간에 아주 오랜 시간동안 탈혼하였는데,

이때 그녀는 되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수난에 흠뻑 취하곤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2년 동안이나 정기적으로 일어났다.

 

가타리나의 영향은 수녀원의 벽 안에서만 인정된게 아니다.

그녀의 편지에서 나타난 그대로, 교회의 개혁 운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성녀 가타리나는 성 필립보 네리와 성 가롤로 보로메오, 그리고 성 비오 5세와 함께

현대 교회의 개혁자로서 높은 칭송을 받아왔다.(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필립보 네리 사제 축일:5월26일.게시판1182번.1785번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축일:11월4일.게시판734번,1454번.
*성 비오 5세 교황 축일:4월30일.게시판1130번.1739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The Virgin Appearing to Dominican Saints-TIEPOLO, Giovanni Battista

1747-48. Oil on canvas, 340 x 168 cm. Santa Maria del Rosario (Gesuati), Venice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철학자 성녀 가타리나가 법정에서 교회 옹호의 웅변을 토하고 순교한 후

그 성녀를 보호자로 삼고 그의 이름을 자기 본명으로 짓는 사람이 적지 않았고 성녀 중에서도

같은 본명을 가진 이도 몇 분 계시다.

 

그러므로 이를 구별하기 위해 그 이름에도 보통 고향이나 도시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교회에서 기념하는 리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녀도 그 중 한 분이시다.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순교자 축일:11월25일.게시판771번,1491번.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축일:4월29일.게시판1129번.1738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이 성녀는 1522년에 태어나 세례 때에는 알렉산드라라고 이름 지었다.

4세때 어머니를 잃고 잠시 대모 손에서 자라난 후 아버지 베드로의 두 숙모가 있는

도미니코 수도원으로 갔다.

 

그녀는 수녀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교육을 받기 위함이었다.

 

수도원에서 수녀들의 교육을 받은 알렉산드라는 학문만이 아니라 신심상으로도 대단히 진보했다.

4, 5년후 아버지는 그녀를 집에 다시 불러 모든 가정 일을 그녀 손에 맡겼다.

그녀는 아버지의 마음에 들도록 집안 일을 잘 처리해 나가는 동시에 수도원에 있었을 때와 같은

신심의 의무도 게을리 하지 않고 계속해 나갔다.

 

시간이 지나 알렉산드라의 나이도 찼으므로 아버지는 딸도 필연코 즐거우리라는 생각에 어느

부잣집 아들에게 출가시키려는 생각을 그녀에게 전했다.

 

기뻐하리가 생각했던 그녀는 오히려 우울한 안색을 하며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하느님께 일생을 바치는 수녀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간청했다.

 

의외의 그녀 말에 아버지는 처음에는 대단히 놀라 여간해서 들어줄 것 같지 않았지만 확고

부동한 그녀의 결심을 안 후에는 단념하고,

 

그녀를 위해 도미니코회의 플라도 수녀원에 입회 신청까지 해주었다.

수녀가 된 알레산드라는 가타리나라고 이름을 바꾸고 오로지 완덕의 길에만 노력하고 원래는

귀족이었음에도 가장 천한 일까지도 기꺼이 해 나갔다.

 

 

 

그녀가 가장 즐거워한 것은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십자가 앞에서 무릎꿇고 기도하는 것이었고,

 

그녀 또한 주님과 더불어 고통을 당하고 싶은 희망이 언제나 불과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수녀원에 들어오자 곧 중병에 걸려 몹시 고생했지만 그녀는 이것이야말로 주님을 본받는

데 가장 좋은 기회라는 생각으로

 

조금도 신음이나 불평을 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병고를 참았다.

그녀의 병은 약을 먹을 수록 낫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지므로 그녀는 점점 그것이 인내의

시련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신념을 더욱 굳게 가졌다.

 

 

고신 극기하며 수덕에 노력한 그녀는 자매들에게도 존경을 받아 25세 때 원장이 되었다.

원장이 되어서는 말보다 실천으로 좋은 모범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람들을 선으로 인도했다.

 

가타리나는 모든 수녀들에게 신망이 두터워 존경받는 몸이 되었다.

그러나 더욱 겸손하며 자기를 자매들의 종으로 생각하고 세상 사람들이 탐하는 명예등에는

일절 무관심해 될 수 있는 대로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노력했다.

 

 

경건한 오랑캐꽃은 몸체는 비록 그늘에 숨어있어도 그 향기를 사방에 퍼뜨리는 것처럼

그녀 덕행의 향기도 숨은 데서 나타나 어느덧 세상에 퍼져 유명한 추기경, 주교, 귀족 등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의견을 듣기 위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겸손한 그녀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 되었는지 이러한 것들이 없어지도록 하느님께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어떤 때는 자매들이 자기의 언행록(言行錄)을 편찬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몹시 놀라며

"보잘것없는 나 같은 사람을 대단한 인물처럼 서술하는 것은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며 원고를 빼앗아 찢고 불에 태워 버렸다고 한다.

 

 

가타리나가 십자가를 손에 들고 사랑하는 주님의 품에 자기의 정결한 영혼을 바친 것은 67세 때였다.

(대구대교구홈에서)

 

 

 

묵상

 

 

현대 의학은 수천 년 동안 성인들과 신비주의자들이 수행해 온 묵상법이 건강에 유익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규칙적인 묵상은 혈압을 낮춰 주고 면역 체계를 강화시키며, 우울한 마음을 회복시키는 기능이 있다.

그러나 묵상은 의학적인 이로움보다도 영적으로 더 귀한 가치를 지닌다.

 

묵상은 더 높은 깨달음과 성찰의 단계로 나아가도록 영혼의 창문을 열어 준다.

성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죽음과 수난을 관상의 기초로 삼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합일을 통해 지상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었다.

 

가타리나는 피렌체의 명문가 출신으로 열세 살에 도미니코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는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묵상했다.

스무 살이 되던 어느 날, 그는 깊은 무아지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을 보았고

이를 연극으로 재현하게 되었다.

 

그의 뜨거운 열정은 연극을 본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묵상 시간은 일상적인 스트레스와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시간이다.

 

 

규칙적인 묵상은 갈수록 바쁘고 복잡해지는 세상에서 거룩함이 솟아나는 오아시스가 될 수 있다.

나는 규칙적으로 묵상하는가?

오늘 단 5분만이라도 행동하는 자가 아니라 존재하는 자로 지내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