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성주간 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수성구 2019. 4. 16. 05:14

성주간 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조욱현 신부 강론

       

 

 

성주간 화요일: 유다의 어둔 밤

 

복음: 요한 13,21-33.36-38: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 그분의 마음이 산란해진 이유는 우리의 나약함 때문이다. 그분은 마음으로 우리와 공감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정신적인 고통 때문이 아니라, 연민 때문에 산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산란하다는 표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아신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도 주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에 노하시고 그의 사악함에 동요하심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자신의 양심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기에 자신에 대해서만 확신할 뿐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여기서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서 예수님 품에 기대어 있는 요한에게 그 자가 누구인지 여쭙게 하였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25)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26)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빵을 받았으나, 빵을 물에 적심으로써 빵에서 축복을 씻어 배반자에게 주셨다.

 

그러기에 유다는 축복받은 빵을 먹지 못했고 생명의 잔도 마시지 못했다. 유다는 자신이 생명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화가 났다. 이에 대한 분노는 그로 하여금 예수님의 피의 잔을 마시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들에게 갔고 그래서 축성된 잔을 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유다가 다른 이들과 생명의 성사를 받지 못하게 하려고, 사탄이 그를 그곳으로부터 떠나게 하였다. “때는 밤이었다.”(30)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서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행하며 나아갈 때 그 자체가 언제나 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가 사탄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31)고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8) 했을 때, 그를 높이 들어 올리셨. 이렇게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면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영원하신 말씀께서 취하신 인성도, 즉 그 인간이신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 안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32)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심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면,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일어난 사건들, 땅이 흔들리고 해가 빛을 잃고 땅이 어둠에 덮이고 무덤들이 열리고 바위가 갈라진 일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의 위엄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15,39)고 고백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33)라고 하신다. 주님은 수난 때까지만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며, 당신이 가시는 곳에 제자들은 올 수 없다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이 썩는 육체는 갈 수 없는 영광으로 옮겨가시는 것임을 알려 주신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은 지금은 그들이 용감하게 죽음과 맞서지 못함을 뜻한다. 그들은 모두 도망을 갔고 시몬은 그분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박해와 시련을 잘 이겨낼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36)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37) 베드로가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8) 베드로는 여기서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말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을 이룰 능력이 없었다. 그것은 베드로가 스승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드로를 위해서 하신 일이었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말했던 것이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자신의 욕심에 주님을 배반하고 그분을 죽음에로 몰아넣었으며, 베드로는 필요 이상의 자신감으로 자신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눈물로 다시 살아난다. 우리 안에도 유다와 같은 탐욕이 있어 주님을 버리고 어둠을 향해 나가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또한 베드로와 같은 두려움 때문에 주님께 대한 신앙을 용감히 고백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분의 식탁에서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항상 마시며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항상 이 빛과 어두운 밤을 넘나드는 삶의 연속이다. 베드로는 그렇게 세 번이나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섰고 주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에 빛 속에 살 수 있었다. 유다는 빛 속으로 다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고 말았다. 우리의 실수로 어두운 밤에 떨어졌더라도 즉시 빛을 향하여 머리를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이 시간 주님께 도우심을 청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