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축일:1월 10일/성 아가토 교황

수성구 2014. 1. 7. 21:34

오늘의 묵상
‘나병’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에서 매우 인상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병으로 여겨져 그 병을 앓고 있는 이는 참으로 비참한 처지의 삶을 이어 가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보여 주신 예수님의 깊은 연민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 대한 그분의 자비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병이 끔찍하다는 사실을 제가 처음 느낀 것은 아주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극장에서 본 ‘벤허’라는 영화에서였습니다. 주인공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나병에 걸린 장면이 나오는데, 이들이 동굴에 숨어 살고 또 온몸이 종기투성이여서 사람들이 피하는 것을 굉장히 무서워하며 본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한하운이라는 나환자 시인의 시를 배우며 그의 기구한 인생에 먹먹해지기도 했고, 고등학생 때에는 경남 산청에 있는 음성 나환자촌에서 봉사 활동을 한 기억도 있습니다. 소록도에서 나환자들을 보살폈던 오스트리아 수녀님들의 미담을 언론을 통해 보고 듣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유럽에 가서는 학생 때 전기를 읽었던 ‘나환자의 성자’ 다미안 신부님의 출신지인 루뱅이라는 벨기에의 작은 도시를 들러 그분의 묘소를 참배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돌아보니, 저에게 나병 환자란 그저 간접적이고 피상적인 차원에서 애처롭게 여기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깊이 그들의 고통과 처절함에 함께하셨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당사자와 주님께서만 아시는 고통이 얼마나 많겠는지요? 그럼에도 지금까지 얼마나 자주 피상적인 이해와 말로 그 아픔의 무게를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대하였는지 저 자신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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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1월 10일

성 아가토 교황

St. Pope AGATHO

St. Agathus

Sant’ Agatone Papa

in Sicily, possibly at Palermo

Papal Ascension:27 June 678 - 10 January 681 in Rome, Italy of natural causes

Canonized :Pre-Congregation

 

 

시실리 사람으로 팔레르모에서 20여 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였고, 사업적으로도 꽤 성공하였으나,

그는 팔레르모의 성 헤르네스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678년 6월 27일, 도누스 교황에 이어 교황이 되었다.

그는 요크의 윌프리드 주교와 켄터버리의 테오도로 대주교 사이의 논쟁을 화해시켰다.

 

그러나 그의 재임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680년 11월~681년 9월까지 열린 콘스탄티노블 공의회였다.

아가토는 대표자를 파견하고, 서한을 통하여 그리스도 단성론자를 단죄하였으며,

천주성과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공고히 하였다.

 

콘스탄티노블의 그레고리오 대주교 이하 그곳에 모인 대부분의 주교들은

 "아가토를 통한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대환영하며 이를 쾌히 수락하였다.

그리스도 단성론 이단은 이렇게 단죄되므로써,

콘스탄티노블 공의회는 교회를 올바른 길로 이끈 6대 공의회 중의 하나가 되었다.

 

 

 

 

 

공의회 公議會 ecumenical council

교황에 의해 소집된 전세계 가톨릭 주교들의 모임.

교황은 공의회 회의록을 준비하고, 그 결정들을 재가한다.

이 모임은 보편교회에 관련되는 중대 사안들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다(교리서 884).

 

 

보편공의회 普遍公議會 ecumenical council

(보편)공의회란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권위 밑에 모든 가톨릭 주교들(’주교단’)이 함께 모인 모임을 가리킨다.

교회법에 따르면 "주교단은 보편교회에 대한 권력을 보편(세계) 공의회에서 장엄한 양식으로 행사한다."

(교회법 제337조 1항).

보편공의회와 관련된 교황의 권한에 대해서 교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보편(세계)공의회를 소집하고 이를 몸소 또는 타인을 시켜 주재하며,

또 공의회를 옮기거나 중지하거나 해산하거나 또한 그 교령들을 승인하는 것은 오로지 교황의 소임이다."

(교회법 제338조 1항).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는 21회의 보편공의회가 열렸다(교리서 883-885).

 

단성론 單性論 Monophysitism

육화(肉化)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의 본성(本性)만을 가지고 계신다고,

다시 말해 그분의 인성(人性)이 그분의 신성(神性)에 의해

완전히 흡수 통합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단적 오류.

 

 

 

공의회 公議會  라틴어  Concilium  영어  Councils  

1. 역사적 고찰 : 일반적으로 공의회라 부르는 종교회의는 교회를 사목할 책음을 받은 주교들이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문제나 사목문제를 협의 결정하는 공식회인인 바 주교단 교도권의 단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교회사에서 최초의 공식회의라고 볼 수 있는 회의는 기원 후 49~50년에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사도회의(使徒會議)이다(사도 15:1-29). 초대 교회에서 유태인 신자들이 모든 그리스도 교인은 구약의 율법을 그대로 준수해야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큰 논쟁이 일어났고, 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도들과 장로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그리스도 교인들에게 구약의 교리는 받아들이지만 율법의 규정은 부과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그 뒤 2세기, 3세기의 박해시대에도 지역별로 주교들이 모여서 사목문제를 협의하였는데 이런 회의를 지역 공의회(Concilium provinciale, 혹은 regionale)라 하였고, 이러한 회의는 인근지역 교회 상호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교리상의 일치를 보존하며 같은 신앙을 선포하는 통상적인 방법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하여 교회가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되고 차츰 로마제국 전역에 교회가 확장되고 신학(神學)이 성립 발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단설(異端設)이 생겨 교리논쟁이 심하게 되자 교회의 문제가 제국의 문제로 나타났고, 황제들은 국가의 평화와 교회의 안정을 바라면서 여러번 공의회(Concilium oecumenicum)를 소집하였다. 제1차 공의회에서 제8차 공의회까지는 주로 황제가 소집하고, 황제의 보호 하에 제국의 동방지역인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에페소, 칼체돈 등지에서 개최되었다. 고대교회의 신학논쟁은 주로 동방에서 일어났고,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동방지역 주교들이 많이 참석했고, 서방지역에서는 소수의 주교들과 로마 교황의 대리들이 참석하는 정도였다. 공의회가 거듭되면서 이단설이 단죄되고 정통교리가 선포되었으나, 차츰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언어(희랍어 대 라틴어), 관습의 차이가 정치적인 여건과 결부되어 신앙의 일치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제에서 견해차이를 드러냈으며 대립이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덟 공의회는 다음과 같다. (각개 공의회에 대하여 해당 항목 참조). (1)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소집), (2)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소집), (3) 에페소 공의회(431년, 테오도시우스 2세 소집), (4) 칼체돈 공의회(451년, 마르치아누스 황제 소집), (5)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년, 유스티누스 황제 소집), (6)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681년, 콘스탄티누스 4세 소집), (7) 제2차 니체아 공의회(787년, 이레네 섭정 소집), (8) 제4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869~870년, 바실리우스 황제 소집), 이 8차 공의회에서 포시우스 총주교는 파문당하고 동서방 교회는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리된(1054년) 후부터 공의회는 로마교황이 소집하고 주로 서방교회 주교들이 참석하여 교회 내부의 개혁과 교권(敎權)과 속권(俗權)의 관계 등을 다루었다. (9) 제1차(1123년, 갈리스도 2세 소집), (10) 제2차(1139년, 인노첸시오 2세 소집), (11) 제3차(1179년, 알렉산데르 3세 소집), (12)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 인노첸시오 3세 소집), (13) 제1차 리용 공의회(1245년, 인노첸시오 4세 소집), (14) 제2차 리용 공의회(1274년, 복자 그레고리오 10세 소집), (15) 비엔 공의회(1311년, 글레멘스 5세 소집), (16)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년, 요한 23세 소집), (17) 피렌체 공의회(1439~1445년, 에우제니오 4세 소집), (18)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1517년, 율리오 2세 소집). 그러나 중세의 10차에 걸친 공의회는 교회 개혁문제에 대하여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효과는 보았지만 근본적이고 항구한 개혁에는 실패하였다. 제5차 라테란 공의회가 폐막된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문에 95개조의 선언문을 게시하여 프로테스탄트운동의 봉화를 올렸다.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의회의 소집을 원하였지만 교황들은 공의회 우위설(優位說, Conciliarism)의 재현을 두려워하여 주저하다가 바오로 3세교황이 칼 5세 황제의 지지를 얻어서 트리엔트에 제19차 공의회를 소집하였다(1545~1563년). 공전의 대개혁 공의회인 트리엔트 공의회는 18년 동안에 여러 차례의 위기를 극복하고 3차의 회기(1545~1548, 1551~1552, 1562~1563년)를 거치면서 여러 가지 교리를 확정짓고 교회 생활 전반에 대한 철저한 개혁을 결의하였다. 다행하게도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역대 교황들은 강력한 개혁의지와 거룩한 모범으로써 공의회의 결의를 착착 실천하여 교회를 위기에서 구하였다.

 

16세기 이후로 근대사회가 산업화하고 정치가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사상적 대립과 혼란이 극심하여 마침내 프랑스 대혁명과 그 여파에 의한 교회의 위기에 즈음하여 교황 비오 9세는 1869년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공의회는 신앙의 근본문제와 교회에 대한 교리를 천명하려 하였으나 프랑스와 프로시아의 전쟁으로 인하여 1870년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공의회는 신앙의 근본문제와 교황의 우위권(優位權)과 무류권(無謬權)에 대한 교리를 선포하였다.

 

20세기 중반에 와서 현대사회가 점점 탈(脫) 그리스도교의 길을 치닫는 가운데, 고황 요한 23세는, 현대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숙고하고 세상에 대하여 교회를 개방하는 자세로서 1958년에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였고, 1962년부터 1965년까지 4차 회기를 통하여 교회생활의 모든 분야를 검토하고 현대 세계에 적응하는 방법을 토의하고 천명하였다. 21차 공의회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참석자 수로 보아 역사상 가장 큰 공의회였는데, 외부 세력의 간섭이 전혀 없었고 과거를 마무리짓는 데보다는 미래를 준비하는 성겨이 두드러진 교리적이면서 사목적인 공의회였다. 공의회 이후로 일부의 혼란도 있었지만 교회 전체가 공의회의 결의를 실천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公議會 
라틴어  Concilium Constantinopolitanum 
영어  Councils of Constantinople  

 

① 제1차(381년) : 제2차 세계공의회.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1세에 의해 381년 소집, 주된 의제는 니체아 공의회 이후 지속되어 오던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 사이의 논쟁을 니체아 신경에 의거하여 결말짓고 동로마 교회를 일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안티오키아의 주교 멜리시오(Melitius)의 주재로 150명의 정통파와 36명의 이단 주교들이 참가하였다. 서로마제국의 주교나 교황대사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양교회에서 모두 제2차 세계공의회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스도 교리에 관련하여 니체아 공의회의 합의들이 확인되었고,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아폴리나리아니즘(Apollinarianism)을 단죄함으로써 보위되었다. 이 공의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소위 니체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이 공의회와 직접 관련은 없는 것 같다.

 

② 제2차(553년) : 제5차 세계공의회.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황제에 의해 삼헌장(三憲章)에 관련된 오랜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소집되었다. 참석자는 거의 동방교회의 주교들이었으며 이들은 삼헌장을 단죄하고 저자들, 즉 테오도로(Theodore of Mopsuestia), 테오도레트(Theodoret of Cyrus), 이바스(Ibas of Edessa) 등이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물든 것으로 인하여 파문하였다. 그 뒤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참석을 거부하였던 비질리오(Vigilius) 교황은 이에 항의하였으며 교황과 황제는 서로 불목하였으나 황제는 교황과 반목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화해하려고 노력하였다. 교황은 마침내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삼헌장에 대한 이전의 우호적인 결정들을 철회하였다.

 

③ 제3차(680년) : 제6차 세계공의회. 동방교회에서 오랜 논쟁거리가 되었던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의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4세가 소집하였다. 680년 로마 시노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두 의지가 있다는 교리를 확정한 교황 성 아가토(St. Agatho, 재위 : 678∼681)는 황제에게 사절들을 파견하여 이 교리를 설명하였으며, 이들 사절은 18회기의 이 공의회를 거의 주도하다시피 하였다. 그 결과 전(前) 교황 호노리오(Honorius) 1세(재위 : 625∼638)를 비롯한 단성론자들은 파문되었다. 공의회에서 발표된 교령들은 주로 칼체돈 신앙 고백의 재판(再版)이었다. 공의회는 여러 공의회에 걸친 그리스도론(論)을 일단락지었는데, 그리스도 안의 두 의지의 물리적인 일치는 반대하지만, 신과 인간의 의지를 지닌 신인(神人) 사이의 완전한 조화에서 오는 도덕적 일치의 존재는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가톨릭대사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