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축일:1월 7일/안티오키아의 성 루치아노 순교자

수성구 2014. 1. 4. 17:04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군중이 목자 없는 양처럼 보여 가여운 마음이 드셨다는 복음 말씀을 들으며, 시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살아 있는 전설’이라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인 고은의 ‘별’이라는 시입니다. “저문 강 다리 있어라/ 건너갈 다리 있어라/ 강 건너 기다리는 언덕 있어라/ 산 너머 저녁연기 오르는 마을 있어라/ 그 마을 기다리는 사람 있어라/ 하루 일 다 하고 기다리는 사람 있어라/ 하늘에 별 있어라/ 기다리는 사람의 눈에 별 있어라/ 별 있어라, 별 있어라.”
이 시에서 묻어나는 애절한 마음이 예수님의 눈앞에 있던 군중의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깊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소박하게 살아가는 군중에게 채워지지 못한 그리움과 따뜻한 사랑에 대한 갈구를 예수님께서는 놓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고된 삶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별’에 대한 갈망에 응답하시어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빵과 물고기로 배불리 먹게 하시는 기적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이 기적은 바로 사랑의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하시며 작은 이들이 내어놓은 것, 곧 지상의 양식을 축복하시고 변화시키십니다. 이러한 자비의 체험 속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란 사실이 우리에게 더욱 분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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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1월 7일

안티오키아의 성 루치아노 순교자

St. Lucian of Antioch

San Luciano di Antiochia Martire

mid 3rd century at Samosata, Syria -

tortured, starved, and run through with a sword in 312 at Nicomedia, Bithynia;

buried at Drepanum (later renamed Helenopolis)

Canonized:Pre-Congregation

 

 

시리아의 사모사따 출신인 그는 수사학과 철학에서 당대의 최고 권위자였으며,

에데싸에서는 마카리오란 사람의 지도로 성서를 연구하였다.

이윽고 그는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자신의 최대 임무로 자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말과 행동으로 모범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신구약 성서에서 오류를 제거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리하여 그는 70 인역 성서의 다른 간행본을 서로 비교하고 또 히브리 원문을 참조하여

구약 성서 개정판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성 루치아노 사본이다.

 

그러던 중에 디오클레씨안의 크리스챤 박해가 일어나, 루치아노는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갇혔는데,

이때 그는 다음의 글을 남겼다 :

"모든 순교자들이 귀하께 인사드립니다. 교황 안토모도 순교로써 당신의 인생을 끝맺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의 무덤은 헬레노폴리스에 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칠십인역 七十人驛

라틴어 Septuaginta 그리스어 Septuaginta  

약어(略語)로는 LXX로 표기한다.

셉튜아진타(Septuaginta)란 단어는 70이란 숫자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전통적으로는 현존하는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 중 가장 오래된 번역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히브리어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세기 중엽이다.

처음에는 모세오경만 번역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PtolemaiosⅡ Philadelpus, 기원전 285∼247)의 통치기간 중

그리스어에 정통한 72인의 유태인 학자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되었다고 한다.

모세오경 이외의 부분은 그 뒤 100여년간에 걸쳐 이뤄졌다.

이러한 번역의 필요성은 당시 유태인들 사이에는 히브리어보다도 그리스어가 더 익숙한 구어(口語)였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는 70인역을 그들의 성서로 채택할 정도였다.

이외 이방인들에게 선교하기 위한 필요성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비교적 신빙성이 없다.

 

70인역에는 히브리어 구약의 정경의 번역 이외에도 수많은 다른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에스델서, 지혜서, 집회서, 유딧서, 토비드서, 바룩서, 예레미야 서신, 마케베오서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경에서도 전통적인 마소라 본문에는 찾아볼 수 없는 많은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70인역의 원문이 마소라 본문과는 다른 계보의 자료를 이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70인역은 마소라 본문비평에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70인역은 번역문서이기 때문에 원문에 의해 제한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알렉산드리아 유태인의 신학적 윤리적 입장을 이해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더욱 중요한 70인역의 가치는 70인역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의 공백을 메워주는 교량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코이네(Koine)로 표현된 신약의 종교적 어휘는 헬레세계로부터 유래된 말이 아니라

70인역의 헬라어를 매개로하여 구약의 히브리 세계로부터 유래된 말이다.

현존하는 70인역의 여러 사본(寫本)들은 기원정 3세기경 복잡하게 전해져 내려오던 사본들을

오리게네스가 집대성하여 비판적으로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최초의 70인역을 원상태대로 회복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70인역의 자료적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해문서라 불리는 쿰란 동굴들의 두루마리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자료들도 70인역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70인역은 종교학적 가치 외에도 문화사적 언어학적 자료로서도 크게 평가된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성 루치아노는 시리아의 사사모다에서 태어나 12세 때 부모를 잃었다.

그는 부모가 남겨놓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에데사의 마카리오라는 학자의 슬하에서 성서 연구를 시작했다.

그가 얼마나 성서에 대한 연구가 깊었던가는 뒤에 그가 사제가 되어 여러 가지 성서의 엣 사본(寫本)을 보면서

그 중에서 부주의로 인해 잘못 기록한 장소나 악의(惡意)로 고쳐 기록한 곳을 일일이 교정한 사실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엄격한 금욕 극기(禁慾克己)의 생활을 즐기고 끊임없이 많은 기도를 올리고,

특히 밤중에도 깨어 있기를 기도하며 육류를 취하지 않고 포조주를 입에 대지 않고 더위와 추위를 잘 참았다.

게다가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로써 말을 삼가며 어디에서든지 하는님의 말씀과 영혼에 대한 이야기 외에는 하지 않기도 했다.

 

그는 안티오키아에 가서 그곳에 학교를 세워 무보수로 아이들에게 학문과 종교를 가르쳤다.

그가 목적한 것은 다만 그들을 덕망이 높은 그리스도교 신자, 거룩한 신앙의 용감한 옹호자가 되도록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루치아노는 착한 신자들에게는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이 공경을 받았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학문과 덕행이 탁월했기 때문에 도리어 미움을 받았다.

어떤 때는 아리우스파(派)의 이단자들이 그를 중상모략하여 그가 주장하는 설은 그 저서에 의하며 온전히 아리우스파와 동일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그는 즉시 자기의 정당한 신앙을 명백히 했으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도 그를 변호해 준 일이 있지만,

루치아노는 이같이 진리를 위해 이단과 싸운 결과 9년 동안이나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간신히 감옥에서 나온 그는 니고메디아의 어느 마을을 향해 여행을 떠났는데

마침 그곳에선 박해가 심해 40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그 고통에 못 이겨 삽시간에 배교하게 되엇다.

그러나 루치아노가 그 배교자들에게 일장의 설교를 하자 그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전죄를 통회하며 전과 같이 믿음을 지키기를 선언하여 용감히 순교했다.

그 박해로 말미암아 많은 배교자가 있었으나 그의 설교로 인해 그들도 역시 회개했다.

 

311년 막시미아노 황제 시대에 유혈의 박해가 다시 일어나자, 학문과 덕망이 높아 유난히 원수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던 루치아노도 결국 법관 앞에 끌려나갔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게 바친 ’그리스도교 옹호의 반박문’은 황제를 대단히 감동시켜

"너는 참으로 훌륭한 학자다. 배교만 하면 재산이나 명예나 네가 원하는대로 주리라"는 말까지 들었으나,

그의 마음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라고 대답했으므로 재차 투옥되었다.

 

투옥된 후 수일간이나 음식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몹시 배가 고팠다.

그때 그의 앞에는 우상에게 바쳤던 좋은 음식이 식탁 위에 산더미처럼 차려 놓여져 있었다.

그러나 루치아노는 신자들에게 악한 표양이 될까 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먹기보다는 차라리 굶어 죽는 것을 더 원했다.

 

그는 또다시 황제 앞에 끌려나갔다. 그곳에서도 그는 "나는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라고 되풀이 할 뿐이었다.

그는 그 말 이외에는 모두 의미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관리들은 헛수고만 하여 그를 다시 감옥에 돌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Last Supper - DUCCIO di Buoninsegna

1308-11. Tempera on wood,50x53cm Museo dell’Opera del Duomo,Siena.

 

 

같은 해 주님 공현 대축일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면회하러 왔을 때 루치아노는

등에 판자를 대고 받듯이 누워있기만 할 수 있어서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고통을 잘 참으며 아무런 원망스러운 기색도 없이 오히려 방문 온 사람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끝까지 신앙을 잘 지키시오"라는 말로 격려했다.

 

신자들이 그에게 성체를 받고자 하자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는 자기 가슴을 제대로 삼고

그 위에 빵고 포도주를 놓도록 하고서,

성찬 제정과 축성문을 외우고 둘러 있는 사람들에게 영해 주었는데, 이것도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리라.

그 기이한 미사 성제는 간수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무사히 끝마칠 수가 있었다.

 

 

루치아노가 순교한 것은 그 이튿날 1월 7일이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도토모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목을 잘리었다고 하나,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황제는 이 거룩한 사제를 공공연하게 사형에 처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감옥에서 몰래 죽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순교한 후에도 박해를 받았다.

황제가 어떠한 수단으로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을 노하여, 그 사제에 큰 돌을 매달아 깊은 바다속에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2, 3일 후에 그의 시체가 바닷가에 떠 있는 것을 신자들이 발견하고 이것을 비디니아라는 곳에 정중히 매장했다.

그 후 그리스도교를 보호한 콘스탄티노 대제는 이 성스러운 순교자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그 장소에 도시를 건설하여 헬레노폴리스라고 이름지었다.

성 루치아노의 유골은 가롤로 대제 때 프랑스의 아루루에 이전되어 오늘까지 보존되어 온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축일:9월13일.게시판1363번

성 콘스탄티노 대제 축일 : 5월21일,게시판1773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축일 : 1월 7일

페냐포르트 성 라이문도, 사제

St. Raymund de Penafort

St. Raymond of Penyafort

San Raimondo de Penafort Sacerdote

1175 at Penafort, Catalonia, Spain

- 6 January 1275 at Barcelona, Spain

Canonized:29 April 1601 by Pope Clement VIII

Patronage:attornies, barristers, canonists, lawyers, medical record librarians

Writings :Summa Cassuam

 

 

스페인 카탈로니아의 페냐포르트 태생인 라이문도는

1222년에 도미니칸이 되었는데,이때는 이미 바르셀로나와 볼로냐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또 설교한 경험이 풍부하였다.

 

1230년, 그는 로마로 초빙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교황청의 회의와 칙서 등을 소장하는 업무를 맡았고, 이것의 결과로 "숨마까수움" (Summa Casuum)이 발간되었다.

1236년, 스페인으로 돌아 온 라이문도는 2년 동안 총장직을 역임한 뒤, 모슬렘과 유대인의 개종을 위하여 헌신 노력하였다.

 

이 즈음에 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격려하여

"숨마 꼰뜨라 젠띨레스" (Summa Contra Gentiles)를 쓰게 하였으며, 아라비아어와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웠다.

 

또한 그는 성 베드로 놀라스꼬와 함께 "메르체다리오회"의 창설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100살 가까이 살았다고 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1월28일.게시판917번,1590번.

성 베드로 놀라스코 축일:1월28일.게시판919번.1591번.

메르세데의 성모 마리아 축일:9월24일.게시판1381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페냐포르트의 성 라이문도는 100세까지 살았기 때문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스페인 귀족이었으므로 멋진 인생을 누리기에 충분할 만큼 많은 교육과 재산을 받았다.

그는 20세가 되었을 무렵 모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으며, 30대 초반에는 교회법과 민법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47세에 도미니코회 수사가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부름을 받아 그는 로마로 가서 교황을 위해 일을 했으며 교황의 고해 신부가 되었다.

교황이 그에게 명한 일 가운데 하나는, 교황의 칙서와 공의회의 회칙들을 모으는 것이었는데,

이미 80년 전에 그라시아누스 수사가 이와 비슷한 수집을 한 적이 있었다.

 

라이문도는 [교회법전]의 제5권을 편찬했다. 이것은 1917년 교회 법전이 나오기까지 가장 잘 정리된 교회법 책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었다.

라이문도는 60세가 되었을 때 아라곤의 수도인 타라고나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나

명예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그는 결국 병이 들어서 2년 만에 사임하고 말았다.

그 후 30년여 동안 이단과 싸워 가며 스페인에 있던 무어인들의 회개를 위해 일했다.

그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반(反)이교도 대전]이라는 책을 쓰게 했다. 그는 100세가 되던 해 죽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1175년경 바르셀로나 근처에서 태어났다. 바르셀로나 주교 좌 성당의 참사 위원이 되고 그 후 도미니꼬회에 입회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의 명에 따라 교회 법령집을 편찬했다. 도미니꼬회의 총장으로 선출되어 훌륭한 법으로써 회를 다스렸다.

그가 남긴 저서 중 고해성사를 올바로 집행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례전집(Summa casuum)은 가장 훌륭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1275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 라이문도 사제의 편지에서

(Monumenta Ord. Praed. Hist. 6,2, Romae 1901, pp. 84-85)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진리의 전파자는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은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했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이 말을 할 때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려 바르고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바울로 사도의 말을 모르거나 무시해 버리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 일반적 법칙에서 면제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람들의 부류에 들어가면 안되겠습니다.

하느님의 채찍이 그들을 위협하지 않을 때 그들의 집은 평화롭고 고요하며 만족을 누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풍족하게 세월을 보내지만 결국에 가서는 지옥으로 곧장 떨어지고 맙니다.

 

한편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받아 주시고 그분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에,

여러분의 순수성과 경건함은 정화되어 완전한 것이 되기 위해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하고 또 그 시련을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칼로써 두 배 세 배 그리고 그 이상으로 위협당한다 하더라도 ?위협을 완전한 기쁨과 사랑의 표시로 여겨야 합니다.

 

이 칼은 쌍날칼로서 한쪽 날은 외부 세계의 위협이라는 날이고 또 다른 쪽의 날은 내부 세계의 두려움이라는 날로 되어 있습니다.

내부 세계의 두려움이라는 날은 악령이 깊숙한 마음을 사기와 매혹으로 뒤흔들 때 두 배 세 배의 힘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런 종류의 공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내적 평화와 안전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외부 세계의 위협이라는 날은 영적인 영역에 대해 교회의 사람들이 아무 까닭 없이 박해를 일으킬 때 두배 세 배의 힘을 갖게 됩니다.

실은 친구들이 입히는 상처가 언제나 가장 중한 상처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용맹한 안드레아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의 복되고도 바랄 만한 십자가입니다.

또 뽑히운 그릇인 바울로는 우리가 이것만을 자랑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성자이시며 보존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무죄하셨지만 당신 백성의 손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범죄자의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의 이 보배로운 잔을 마시고 만선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 드리십시오.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를 주시고,

여러분의 도정에서 여러분의 속도를 늘려 주시어 당신 얼굴이 지켜 보시는 가운데 사람들의 위협에서 해방시키시며,

마침내 여러분을 영광의 충만함에 들어가게 하시어 평화의 아름다움과 신뢰의 장막과 풍요의 안식 가운데 영원토록 좌정하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가톨릭홈에서)

 

 

Beata Vergine Maria della Mercede

메르세데의 성모 마리아 축일:9월24일.게시판1381번.

 

페냐포르트의 성 라이문도는 스페인 국왕의 친척되는 귀족 페냐포르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런고로 어려서부터 충분한 교육을 받고, 20세의 약관으로 일찍이 바르셀로나 시(市)의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겸손한 그는 이 특별한 출세에도 오만하지 않고, 도리어 면학에 힘?으며, 이탈리아의 볼로냐에 유학하여 그곳 대학에서 다시 법학을 전공했다.

 

공든 탑이 이루어져 그는 법학박사 학위를 얻어 동대학의 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우연히 고국 바르셀로나의 주교가 로마에 순례하던 도중 볼로냐에 들리게 되어,

라이문도의 명성을 듣고 그에게 귀향할 것을 간절히 청하여 마침내 데리고 가 자기의 주교좌 대성당의 성직자로, 나중에는 부주교로 등용했다.

 

라이문도는 항상 영적으로 하느님을 맞이하여 살아 나가며, 자기의 일상 생활의 책임을 양심적으로 완수하여 나가는 중에 어느덧 45세가 되었다.

그 전에 이미 세상 명예의 허무함을 통감한 그는 결심한 바 있어

당시 겨우 창립된 도미니코회의 수사가 되어 나중에는 윗사람의 명령을 받고 강론 신부가 되는 동시에 고해신부가 되었다.

 

그 당시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 남 유럽 제국은 아프리카에서 빔번히 침략해 온 마호메트 교도인 사라센 인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해안 지방의 시골 마을에서 마음대로 약탈을 하며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노예로 끌고 가, 감옥에도 가두고 고역도 시키는 등 말할 수 없는 학대를 하며

몸의 대금을 내고 속량해 오지 않으면 영원히 포로된 사람들을 석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를 염려한 베드로 놀라스코 성인은 성모 마리아의 권고를 받고,

스페인 국왕 야고보와 더불어, 사라센 인의 수하에 있는 가련한 신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메르세데의 성모 마리아회를 창립했다.

 

라이문도는 전술한 바와 같이 국왕의 친척인 동시에 그의 고해신부였을 뿐 아니라, 베드로 놀라스코와도 친구였고

또한 교회법에도 능통했기 때문에, 동 수도회의 회칙을 기초하는 책임을 맡고 이를 완성했다.

그러므로 그도 메르세데 성모 마리아회의 창립자의 한사람으로 찬양을 받고 있다.

 

그 후 라이문도는 교황 그리고리오 9세의 총애를 받아 부름을 받고, 로마에 가서 그의 비서인 동시에 고해 신부가 되었다.

그가 자기 직무에 얼마나 엄중하고 충실했던가를 일례를 들어 본다면, 교황의 궁전 앞에는 가끔 가난한 사람이 자선을 청하러 모여 오는데,

그들에 대한 수위의 태도가 너무나 냉정한 것을 때달은 라이문도는 교황의 고해를 듣고 죄의 보속을 명할 때에 더욱 그 빈민을 위로해 줄 것을 충고했다.

교황은 솔직한 그의 말을 대단히 기뻐하여 즉시 수위에게 주의를 시키고, 그 후에도 기회 있는 대로 여러 사람에게 이것을 말하면서 그를 칭찬했다고 한다.

 

그는 교황의 명령으로 교회법을 개정하게 되었는데, 3년이란 햇수를 소비하며 이를 완성했다.

교황은 그 공로로 스페인의 사라고나 시의 대주교로 임명하려고 했을 때, 세상의 명예를 원치 않은 그는 그 영전(榮轉)을 사양하므로

교황도 그의 겸손에 감동되어 그대로 두셨다고 한다.

 

라이문도는 대주교의 중책은 면하게 되었지만, 다음은 자기가 속하는 수도회의 총장직에 있으면서 회를 위하여 진력했다.

그러나 그 직책을 그만두자 즉시 본국으로 돌아와서, 일개의 평수도 사제로 지내며 이단 이교자들의 개종에 노력했다.

라이문도는 1275년 1월 7일 거의 백세에 이르러서 세상을 떠났다.

 

성인이 얼마나 정의를 존중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스페인 국왕 야고보의 고해 신부로 있을 때다.

왕이 어떤 부인과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것을 눈치챈 그는, 조금도 서슴지 않고 "폐하, 아무쪼록 저 부인과 멀리 하소서"라고 솔직하게 충고했다.

왕은 분노하여 그를 마요르가 섬에 유배 보내며, 섬의 사람에게 그에게 배를 빌려주지 못하게 엄금했으나,

그가 바닷가에 서서 기도하고 하느님께 굳은 신뢰심으로 망토를 바닷물 위에 펴고서 이를 올라 타니까 망토는 마치 경쾌한 배와 같이 떠나가

무사히 바르셀로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임산부,교회법학자,병원진료실의 주보

(대구대교구홈에서)

 

 

The Virgin Appearing to Dominican Saints TIEPOLO,Giovanni Battista

1747-48 Oil on canvas,340x168cm Santa Maria del Rosario(Gesuati),Venice.

 

도미니코수도회(천주교 설교자회)에서 www.opkorea.org

 

1. 생애

성 라이문도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근처의 베냐디스의 빌라프란카에서 1175년에 출생하였고 1275년에 바르셀로나에서 귀천하였다.

성 라이문도가 태어날 당시 신심이 깊은 가톨릭 가정에서는 그들의 자녀중 한사람 혹은 그 이상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관습이 있었고  성 라이문도도 이런 가톨릭 가문의 전통에 영향을 받아 어릴때부터 자비심과 참다운 지식을 배웠고

이 세상의 쾌락과 허무를 물리치고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천상가치를 귀중하게 여기는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그는 학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서 1196년 당시 스무살 때부터 교양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204년에는 바르셀로나 주교에게 제출 되어진

어떠한 법률적 사례를 조정함으로써 그의 교회법에 대한 소질을 보여 주기 시작하였다.

 

당시 볼료냐 대학과 파리대학은 당시 크리스찬 세계의 학생들에게 꽤 매력적이었으며,

성 라이문도는 이러한 매력과 함께 더욱 고차원적인 학문세계로 이끌려서 1210년에 스페인을 떠나 볼료냐 대학으로 갔다.

그때 성 라이문도의 나이는 35세였으며 그 시대에는 그와 비슷한 나이로(나이가 들어서)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다.

그는 거기서 법률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바르셀로나에 이어서 두 번째로 가르치기 시작하 였다.

 

볼로냐에서도 바르셀로나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모든 강의는 무료로 이루어졌다.

거기서(볼로냐) 그는 3년동안 교회법을 가르쳤으며 지금도 바티칸에는 이때에 발표한 그의 교회법률에 관한 논문이 소장되어있다.

 

그당시 베랑게라는 바르셀로나 주교가 로마를 순례하는 도중 볼료냐에 들리게 되어 그 당시에 새롭게 설립되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설교자회 (도미니코 수도회) 형제들의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고 자기 관할 교구에 설교자회를 설립하기를 원했으며

[나중에 바르셀로나에 땅을 주어 성녀 카타리나 순교자라는 수도원를 짓게 하였음],

이와 동시에 성 라이문도의 명성을 듣고(당시 그는 도미니칸이 아니었음)그에게 귀국할 것을 간절히 청하여,

마침내 데리고 가서 자기의 주교좌 대성당의 성직자로, 나중에는 부주교로 등용하였다.

그러나 성 라이문도는 이러한 생활에 만족하지 않았고 보다 거룩하고 완전하게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봉헌하기 원했다.

 

한편 볼로냐에서와 바르셀로나에서의 도미니칸들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특히 그가 볼로냐에서 가르치는 동안에 도미니칸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들의(도미니칸) 참신한 생활은 성 라이문도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성 도미니코와 성 라이문도가 만났다는 명확한 증거자료는 없지만 바르셀로나 주교가 성 라이문도를 귀국시킬려고 설득할 당시

성 도미니코로부터 그의 몇몇 제자를 주선받았다는 점에서 이 두 성인이 만났을 것이라는 것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무튼 위에서 말한대로 보다 거룩한 생활을 원하는 성 라이문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보다 철저히 따르기를 간절히 원했고

영혼구원을 위하여 자기자신을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봉헌하기를 갈망하였다.

 

이러한 그의 갈망으로 인하여 1222년에 성 라이문도는 설교자회에 입회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가 47세였다.

이무렵 그는 16세기에서 17세기를 걸쳐서 판을 거듭했으며 가장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진 고해신부 위한 지도서로써 Summa of Saint Raymond를 저술했다.

 

또한 그당시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등 남 유럽 제국은 아프리카에서 빈번히 침약해온 마호메트 교도인 사라센인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해안지방의 촌 부락에서 약탈을 마음대로 하며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노예로 끌고가서,

감옥에도 가두고 고역도 시키고 말할수 없이 학대를 하며 몸의 대금을 내고 속량해 오지 않으면 영원히 포로된 사람을 석방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를 염려한 베드로 노라스고라는 성인은 자비의 성모 수도회라는 수도회를 시작하였는데

성 라이문도는 이 수도회의 회칙을 기초하여 자비의 성모 수도회의 창립자의 한사람으로 찬양받고 있다.

1255년에는 바르셀로나와 튜니지에 유대인과 무어인의 개종을 위하여 아랍어와 히브리어 학교를 세웠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그를 로마로 불러서 그의 비서인 동시에 고해신부가 되게 하였다.

그는 법률에 관하여 매우 조애가 깊었기 때문에 교황은 그를 교회법을 다시 정리하고 편찬 하는 일을 맡겼다.

그는 수세기 동안 증폭되어온 법령을 다시 쓰고 요약했다. 교황은 그 공로로 그를 스페인, 다라고나시의 대주교로 임명하려고 하였을 때,

세상의 명예를 원치않는 그는 그 영전을 사양함으로 교황도 그의 겸손에 감복되어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그는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왔으나 홀로 조용히 있을수 가 없었다.

왜냐하면 1238년에 그는 설교자회 제 3대 총장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총장 임기동안(1238-1240) 도미니칸 회칙을 개정했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교도 대전(Summa Contra Gentes)를 쓰게 된것도 그의 요구에 의해서였다.

성 라이문도 뻬냐포르트는 1601년 클레멘스 8세에 의해서 시성된다. 축일은 1월 7일이다.

 

 

성 빈첸시오 페레르 사제 축일:4월5일,게시판1697번
성 빈체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1월22일,게시판1582번.

 

2. 사상

성 라이문도는 신학자, 교회법학자로써 교회법을 정리, 개정함으써로 성 교회와 설교자회에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1230년 교황 그레고리오에게 소환되어 교회법전을 편찬,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의 제 5권에 해당된다.

도미니칸으로써 그는 회헌을 가다듬고 손질하여 도미니칸의 근본 이념의 뼈대를 세웠다. 또한 그는 학식뿐만 아니라 실천하는데에도 남다른 모범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가 스페인 국왕의 고백신부로 있을 때 왕이 어떤 부인과 너무 가깝게 지내는 것을 눈치챈 그는 왕에게 잘못된 점을 솔직히 충고하다가 섬으로 귀향을 간 적도 있었다.

다시말해서 그는 아는것과 실행하 는 것 사이에 아무런 모순됨 없이 조화로운 삶을 살았다 할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도미니칸이 추구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설교’라는 대전제에 충실한 삶을 산 도미니칸이었고

항상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으로 다가 갔으며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기도와 성찰을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의 이러한 정신은 모든 도미니칸이 공통적으로 가지고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사랑과 열정에서 기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