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축일 ; 11월20일 /발로아의 성 펠릭스

수성구 2013. 11. 18. 22:29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비유는 주인의 처지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인은 자신이 머지않아 임금이 될 것이지만, 백성이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임금이 된 뒤 어떤 신하를 둘 것인지, 어떤 사람에게 각각의 고을을 맡겨야 할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그가 자기 종들에게 각각의 고을을 다스리는 중책을 맡긴 것은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고을을 다스리기에는 종의 신분이 너무나 미천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인은 종들에게 고을을 다스릴 권한을 주고자 열 미나를 각각 나누어 주며 그것으로 벌이를 하라고 합니다. 한 미나가 백 일 동안의 품삯임을 감안하면 상당한 금액입니다. 이처럼 주인은 종들에게 큰돈을 맡기며 그들의 성실한 태도와 능력에 따라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까지 줄 정도로 종들을 신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인을 믿지 못하는 종이 있었습니다. 그가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사실 주인은 냉혹한 사람이 아니라 종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종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백성이 그 주인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을 신뢰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믿은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요한 1서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4,18).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두려운 분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신뢰하시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고, 그 선물을 통하여 더 큰 것을 주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신뢰하시는 하느님을 우리 또한 굳게 믿고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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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11월20일

발로아의 성 펠릭스

San Felice di Valois

St. Felix de Valois, C

1127 - 1212

 

 

세르프로와의 은수자이던 펠릭스와 그의 제자 성 요한 마타(축일:2월8일)는

무어인들로부터 포로들을 대속하기 위하여 성삼회를 세우고 교황청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요한은 스페인과 바르바리아에서 활동하고,

펠릭스는 70 고령이었으므로 파리에 남아 마투룸 수도원을 세우는 한편, 프랑스 지방을 사목하다가,

1212년 11월 4일에 세르프로와에서 운명하였다.

 

1240년경, 그의 수도회에는 6백명의 수도자들이 있었으니, 대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회원들은 그와 요한이 교황 우르반 4세에 의하여 1262년에 시성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1666년에 알렉산델 7세가 그들의 공경을 승인하였다.(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교회에서 장려하는 일곱 가지 육신적 자선 사업 중에 포로나 죄수를 구제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죄 없이 포로가 된 사람을 구출함은 물론이요,

죄를 범해 부자유의 몸이 된 죄수도 가능한 한 위로해 주라는 것이다.

이런 뜻을 받들어 회교도인 해적에게 납치되어

아프리카의 노예시장에서 억울하게 매매되고 있는 이들을 구출할 수도원이 중세기에 창설되었다.

 

이 수도회는 배상금을 모금해 노예가 된 사람들을 구출한다던가,

혹은 회원 자신이 인질이 되던가 하여그 노예가 된 사람들을 석방시키려는 목적 아래

마타의 성 요한이 성 펠릭스와 협력해 조직했으며 삼위일체회라 이름지었다.

 

 

펠릭스가 발로아의 성자라 불리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그의 고향이 발로아 주였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은 그가 발로아 왕가의 인척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를 밴 어머니가 해산이 가까워 순산을 기원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녀는 어린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님 옆에 귀여운 사내아기가 나타나 아기예수에게 꽃다발을 바치니,

아기예수는 십자가를 선물로 주었다는 환상을 보았다.

그 어머니는 이것이 곧 자기가 낳을 아기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펠릭스가 첫 울음을 터뜨린 것은 1126년의 일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연민의 정이 두터워,

집에 거지가 왔을 때는 어머니 손에서 무엇이던가 받아서 자선을 베푸는 것을 가장 즐겼다.

이런 자애심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날로 더 깊어갔고,

나중에는 자신의 음식까지 줄여가며 불쌍한 이들에게 나누어줌을 습관처럼 했다.

 

후에 신학을 배워 사제가 되었으나, 얼마 후 은수 생활을 동경하여 산중에 몸을 감추었다.

이는 평소 어머니에게들은 환상의 이야기에 충격을 받아,

주님에게서 받은 십자가의 상징대로 세속을 떠나 하느님께 대한 것만을 생각하고,

기도와 고행으로 수도에 전념하려는 결심에서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가 세속을 등지고 또 세속도 그를 거의 잊었을 무렵,

뜻하지 않게 은수 생활 20년만에 파리 대학 교수인 마타의 요한 박사가 그에게 와서 지도를 청했다.

이것이 곧 두 성인의 성스러운 공동 생활의 시초가 된 것이다.

 

 

어느 날 그들이 샘 근처에서

영적 문제와 또 회교도에게 잡혀간 동포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버석하는 소리가 나서 돌아다보니,

크고도 흰 사슴 한 마리가 우뚝 서 있고,

그 뿔 사이에는 청(靑), 적(赤)의 십자가가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그들이 노예 구제 수도회를 조직하고

그 제복에 청·적의 십자가를 표시한 것은 이 같은 사실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에 앞서 그들은 로마로 가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알현하고,

수도회 창립 취지를 설명하며 지도와 축복을 청했다.

그러자 교황도 매우 기꺼이 여기시며 이에 적합한 규칙을 제정해 주고

그 수도회를 하느님 성삼께 봉헌하여 ’포로로 된 노예 구제의 성 삼위일체회’라 명명했다.

 

 

펠릭스는 당시 71세의 고령으로 요한과 더불어 프랑스로 귀환,

전에 사슴이 나타난 곳에 수도원을 건립하고 이를 셀프로아 수도원이라 불렀다.

 

그후 요한은 아프리카에 건너가 포로석방에 노력했으며,

펠릭스는 셀프로아에 머무르며 형제들을 모집하고 그들의 수련을 맡았다.

이렇게 회의 목적과 관찰을 위해 진력한 지 14년만에 펠릭스에게 임종의 날이 다가왔다.

 

 

임종시 그는 남아있는 제자 수사에 대해 걱정하자

성모께서 나타나셔서 "내가 그들의 어머니가 되어 지도할 터이니 너는 아무 염려 말아라"고 말씀하시므로,

자신의 사명이 성취됨을 기뻐하며 1212년 11월 4일 셀프로아에서 편안히 눈을 감았다.(대구대교구홈에서)

 

 

 

 

 

마타의 성 요한 축일:2월8일

St.JOHN of Matha

23 June 1160 at Faucon, Provence, France

-12 December 1223 at Rome

Beatified ;1655

Canonized ;1694

 

프로방스의 포콩 출신인 그는 젊어서 엑스로 가서, 무술과 말타기 등을 배웠는데,

그의 관심은 자선활동과 기도에 있었으므로, 고향으로 돌아와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후 그는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와 더불어 사제로 서품되었다.

 

첫 미사 때에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고,

모슬렘인들로부터 노예를 해방시키는 일에 헌신하기 시작하던중,

거룩한 은수자인 발로와의 성 펠릭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와 함께 지냈다.

이리하여 이 두 사람은 노예해방을 위하여 수도회 창설을 계획하고,

인노첸시오 3세의 인가를 받았으며, 이때 요한이 총장으로 뽑혔다.

이것이 "성삼수도회"이다.

이 수도회는 1201년에 186명의 크리스챤 포로를 석방하고,

다음 해에는 요한 혼자서 110명을 해방시키는 등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