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감사는 신앙의 척도 ^^*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의 강론입니다.)

수성구 2013. 10. 14. 03:54

감사는 신앙의 척도 ^^*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의 강론입니다.)


- *♥* 감사는 신앙의 척도 ^^* *♥* -

찬미 예수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지난 한 주간 동안 만나는 사람들을 경쟁자가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시기와 질투의 시선이 아니라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하느님 자녀답게 사랑하셨나요? 그렇게 하시니까 참된 행복이 상으로 주어졌죠? 형제 자매님, 오늘은 강론을 이렇게 늦게 보내게 되었습니다. 제겐 경대사대수학과 동기들 중에 아주 친한 친구들이 4명 있습니다. 요즘도 일년에 두 번은 꼭 만납니다. 어제 그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만에 만나서 술 한 잔 하면서 대학시절 얘기도 하고 그들이 사는 얘기도 듣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부인들의 얘기도 듣습니다. 신자가 아닌 친구들도 있으니까 그들이 느끼는 것을 진솔하게 들을 수가 있어서 참 좋답니다. 그런데 이 친구들과 만나면 요즘도 새벽 3~4시가 되어야만 잠을 잘 수가 있습니다. ^^* 그래서 이렇게 강론을 보내는 게 늦었습니다. 형제 자매님은 이해가 되시나요? 그리고 형제 자매님께도 그런 친구들이 있으시죠?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죠? 형제 자매님,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오늘의 전례 말씀들도 감사에 초점이 맞춰져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오만했던 시리아 장수 나아만은 엘리사의 지시대로 했을 때 자신의 나병이 깨끗이 나은 것을 알고 바로 엘리사를 찾아가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열 사람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보다 치유된 열 사람이 취한 서로 다른 행동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나병은 사람을 참으로 비참하게 만드는 병입니다. 눈썹이 빠지고, 손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오뚝하던 코뼈가 내려앉고 나균이 그 뼈마저 갈아먹어 나중에는 콧구멍만 남고, 맑고 투명하던 눈동자도 썩어 들어가 마침내 시력마저도 잃고 맙니다. 그렇게 서서히 죽어가면서도 사람들에게 위로나 동정은커녕 공동체로부터 추방되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나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병환자는 천벌을 받아 하늘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하여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병환자들이 예수라는 사람이 어떤 병이든 다 고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문으로만 들었던 예수님이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가까이 가지를 못하고 멀찍이 서서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부르는 것을 보아서 그들은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기대로 예수님의 동정심에 호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다른 곳에는 전혀 기대를 걸 수가 없었기에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몸은 깨끗이 나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단 한 명만 예수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에게 돌아가는 것만 생각했나 봅니다. 형제 자매님, 왜 이렇게 전혀 다른 행동이 나왔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형제 자매님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감사를 드린 한 사람은 낫게 된 과정 곧, 원인을 생각했고 다른 아홉 사람은 결과만 생각한 차이라고 봅니다. 그 한사람은 어떻게 내가 나았나를 생각하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 돌아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가 예수께 드린 감사는 바로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와 감사를 드린 그 사람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들이 나았다는 결과만을 생각했기에 그 결과를 가족들에게 빨리 알리는 것이 급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신통한 의사에 불과했습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도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는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을 많이 체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형제 자매님께선 얼마나 자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까? 형제 자매님께선 평소에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은 많은가요? 제가 들었던 애기를 하나 들려드릴게요. 동업을 하는 두 친구가 장사를 위해서 함께 여행을 했는데 한 사람은 신자이고 한 사람은 무신론자였습니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신자가 “하느님은 좋은 분이시네. 그러니 항상 감사를 드려야 하네.”하고 말하자 친구는“이 여행이 끝나고 보자.”하고 대답했습니다. 물건을 다 팔고 나귀에 돈을 싣고 돌아오다가 한 마을에서 잠자리를 구했으나 없어서 동네에서 좀 떨어진 큰 느티나무 아래에서 잠을 자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신자는 “이런 잠자리라도 주시니 하느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 하고 말했으나 친구는 “따뜻한 방 하나 못 얻어주는 하느님이 좋기도 하겠네!” 하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새벽에 깨워줄 닭 한 마리를 옆에 두고 신자는 촛불을 켜놓고 성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서 불이 꺼지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피곤한 것을 아시고 일찍 자라고 불까지 꺼주시니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 하고 잠을 청했습니다. 그 친구는 “바람이 껐지 하느님이 껐나?” 하면서 비웃었습니다. 잠결에 닭의 비명을 듣고 깨어보니 살쾡이가 닭을 물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래도 자네 하느님이 좋은 분인가?”하고 친구가 비아냥 그렸고 신자는 “그래도 나귀가 있잖아.” 하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둘은 겁이 나서 돈만 들고 나무 위로 올라가서 잤습니다. 조금 있으니 사자가 나귀를 물어갔습니다. “자네 하느님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군!”하면서 친구는 더욱 비웃었고 신자는 할말을 잃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으러 어제 지나왔던 마을로 다시 갔습니다. 그런데 마을이 텅 비어있었습니다. 간밤에 마적들이 마을을 몽땅 틀고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렸던 것입니다. 신자는 “여보게 만일 우리가 이 동네에서 잤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불이 계속 켜져 있었다면, 닭이나 당나귀가 울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나?” “우리가 나무 위에서 자게 하신 하느님은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 하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물론 그 친구도 하느님을 믿게 되었답니다.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어쩌면 우리는 믿지 않는 친구와 같은 시선으로 우리 삶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만 바꾸면 많이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감사할 일을 계속 찾을 수 있다면 참으로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를 느낄 때 우리의 신앙은 자라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 더 풍성한 은총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베르나르도 성인은 “감사는 또 다른 은총을 부르는 도구”라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삶은 성숙한 신앙인의 표시요, 감사는 병든 우리 영혼에 영약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갑시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8) 대구 가톨릭대학교 하양 신학관에서 안드레아 신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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