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3월 3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수성구 2017. 3. 3. 06:21

2017년 3월 3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3월 3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제1독서 이사 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복음 마태 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어제 밤에 양심성찰을 하면서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일들도 꽤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루라는 시간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를 은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시간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행하고 있을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또 후회할 일만 만들어 버린다면 어떻게 나의 시간을 은총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분으로부터 죄로 기울어지는 마음이 들 때에는 손톱으로 자신의 손등을 꾹 누른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른 이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 손등을 손톱으로 꾹 누르고, 기도하는 것이 귀찮다는 마음이 들 때에도 손등을 또 손톱으로 꾹 누릅니다. 이렇게 손등을 계속해서 공격하다보니 어느 순간에 그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은총이 얼마나 내 삶 안에서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를 알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죄로 기울어질 때 당연히 하느님을 바라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지요.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할 때,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의 삶 안에서 환하게 비춰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단식 논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판하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율법에서 제시하고 있는 단식을 하면서 과연 하느님의 은총을 깨달을 수가 있었을까요? 단식은 진정한 참회가 선행되어야 하고, 이를 통해 정의와 사랑의 실천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히 율법의 이행을 위한 단식이었던 것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는 진정한 마음과 행위가 따르지 않는 단식 행위를 질타했습니다.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이사 58,4-5)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가 제시하는 단식과 같은 외적 행위들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루라는 시간 내에 내가 해야 할 참회,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과 정의의 실천이 없다면 절대로 은총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남의 조그만 허물을 꾸짖지 말고, 남의 비밀을 드러내지 말며, 남의 지난날 잘못을 생각하지 마라. 이 세 가지는 가히 덕을 기르며, 또한 해로움을 멀리할 것이다(채근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악덕에 맞서 싸우는 방법(파울로 코엘료, ‘마크툽’ 중에서)

서른두 살 된 환자 하나가 정신치료사 리처드 크롤리에게 상담을 받으러 왔다. 환자가 하소연했다.

“엄지손가락 빠는 버릇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크롤 리가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냥 각각의 요일마다 다른 손가락을 빠세요.”

환자는 그 조언을 따르려고 애썼다. 손을 입으로 가져갈 때마다 그날 빨 손가락을 의식적으로 선택했다. 일주일이 못 되어 그는 버릇을 고쳤다. 리처드 크롤리는 이렇게 말한다.

“악덕에 습관이 들면 맞서 싸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습관이 새로운 태도, 결정, 선택을 요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비로소 그 습관이 그런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악덕에 맞서 싸우는 나만의 방법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혹시 도저히 이길 수 없다면서 악덕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