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수성구 2022. 9. 26. 05:27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욥기 1,6-22; 루카 9,46-50 /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 2022.9.26.;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에 나오는 욥은 자기 탓 없이 사탄의 계략으로 억울한 피해를 보았으면서도 결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의인입니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을 겪을 경우에도,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하는 영성으로 마음을 흐트러뜨리지 않았습니다. 욥의 이런 자세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진정한 자세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서열 문제로 다투던 제자들에게 제발 서열에 대한 관심을 접고 꼴찌같은 마음으로 서로 섬기라고 가르치셨고,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으로 간주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공동체 안에서는 겸손을, 공동체 바깥에서는 관용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실, 공동체 내부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겸손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사람들 안에서의 서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십보백보라는 말이 여기에 어울립니다. 서열은 종종 뒤집어지기 일쑤여서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흔히 인간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의 구분은 서로가 공동선을 위해 기여해야 할 역할을 정해놓는 기능적인 것이지, 존재의 서열을 구분하거나 자격이나 가치를 매겨 놓은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 외부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는 관용을 들어야 합니다. 인류는 생명체들 가운데에서 동족을 죽이고 괴롭히는 유일한 종입니다. 인류 역사상 수도 없이 일어난 전쟁과 국제 분쟁, 내전 중에서 그 어떤 경우에도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고 죽여야만 할 정도로 중대하고 위급한 상황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저 서식지로서의 영토를 확장하려거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욕심의 결과였던 경우가 대부분이고, 심지어는 통치자의 위신을 세우려고 일어난 전쟁도 있습니다. 우리가 힘의 우열에 따라서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질서가 지배하는 정글을 동물적이라거나 야만적이라고 폄하하지만 동물도 필요 이상으로 다른 동물을 죽이거나 잡아먹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인간이라는 종만 쓸데없이 넓은 영토를 차지하려 들거나 이미 먹고 살만한 충분한 재산이 있는데도 더 축적하고 쌓아두려고 욕심을 부리는 가장 어리석은 종입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는 세간의 평은 그저 하기 좋고 듣기 좋은 말일 따름이고 실제 역사적 사실이나 현재의 상황에 비추어 보아도 진실이 아닙니다. 현재에도 인류 자신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환경을 오염시키고 생태계의 균형을 파괴하는 물질문명을 보아도 그렇고,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립이 사라진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패권 다툼으로 날이 지새고 있는 인류 지성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사랑과 평화, 행복과 자유를 위해서 쓰여져야 할 지성과 정성이, 패권 유지와 영토 확장, 대량 학살을 위한 파괴적인 무기 개발에 쓰여지고 있는 한심한 형편이 이를 웅변합니다. 하여, 지구 바깥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세력은 아무데도 없는데도 오직 지구 안에서 인류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며 지성과 노력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치를 위하여 주어진 능력을 활용하는 일이고, 이를 위해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도와주며 섬기는 것입니다. 

 

  이 나라와 우리 민족이 지난 이백 년 동안의 근현대사에서 천주교 신앙을 들여오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치명하기까지 하면서 저항한 가장 큰 이유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최고선과 서로가 서로를 돕는 공동선의 질서를 확립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 최고선의 가치는 진리를 추구하는 가운데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양심과 신앙의 자유는 물론 신분으로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각자의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누리는 세상을 열망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에 따라오는 공동선의 가치는 정의와 공정을 지키고, 평등과 행복을 목표로 모두가 힘을 합치되 특히 더 많이 혜택을 받은 이들이 솔선수범함으로써 인간을 존중하라는 데 있었습니다. 이렇듯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를 구현하려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문화를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으뜸으로 쳐 왔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조선 왕조와 유림들은 이러한 역사의 징표를 보지 못하고 하느님을 흠숭하는 대신 인간을 신분으로 나누어 차별하는 대표적인 우상숭배를 저질렀습니다. 학문을 숭상하되 지식을 독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식을 독점한 양반들이 농지의 소유권까지도 독점했습니다. 공업과 상업, 문화와 예술에 종사하는 일들도 천시했습니다. 이 불공정한 질서에 저항했던 순교자들은 물론이고 천주학을 신봉하던 모든 이들의 값진 희생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우리 민족이 전 세계에 드높은 문화를 퍼뜨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욥은 우리네 인생의 기준이 될 가치관을 보여 주었고, 섬김과 관용을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세워야 할 새 세상의 내부와 외부 질서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에 대한 모범을 증거했던 우리 신앙 선조들은 현대 한국판 욥들이었으며, 우리가 이룩해야 할 새 세상의 선구자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