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전삼용 요셉 신부 / 2022,8,30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 이렇게 했더니 나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어요

수성구 2022. 8. 30. 04:54

전삼용 요셉 신부 / 2022,8,30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 이렇게 했더니 나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어요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2년 다해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루카 4,31-37

 

이렇게 했더니 나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어요.

 

유튜브 채널 ‘책그림’에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한 오래된 동영상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다른 방향으로 뜁니다. 어떤 차를 보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이것만 보면 이 사람은 분명 도망자입니다. 옷도 그렇게 입었습니다. 그러다 어떤 신사의 멱살을 잡습니다.

분명히 그 사람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을 벽으로 밀어붙입니다.

이때 하늘에서 건축 자재들이 쏟아집니다. 

이 사람은 사실 지나가다가 건축 자재가 쏟아지려고 하는 것을 보고 그 신사를 구해주려

급히 달려온 것입니다. 

 

현실은 하나지만 그것 때문에 생기는 판단은 여럿이고 그것 때문에 생기는 감정도 시시각각으로 달라집니다.

처음엔 안 좋은 감정을 가졌던 사람에게 나중엔 감동하게 됩니다. 

 

우리 감정은 어떻게 생길까요? 바로 ‘믿음’에 의해 생깁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감정이 다릅니다. 

 

얼굴에 모반을 가지고 태어났고 또 한쪽 얼굴에 암까지 들었던 김희아 씨는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도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반면 내 안의 자아를 믿으면 그 자아가 하는 말을 믿게 되고 그러면 모든 것에 불만을 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소리 지릅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루카 4,34)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어떤 감정으로 소리 지르는 게 옳은 일일까요?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태 21,9)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입니다. 왜 어떤 이들은 같은 예수님을 보고 기뻐 뛰지만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싫어할까요? 분명히 어떤 이들은 좋은 이득을 주시는 분으로 믿고

어떤 이들은 자기가 가진 무언가를 잃게 만드는 분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죽이고 당신이 주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나’를 주인으로 섬기는 이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거부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를 버리고 싶은 이들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어려움 속에서 당신께 잘못하는 이들을 죽이고 싶은 심정까지 들 때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십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들 곁으로 가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니?”

 

이 말씀으로 어머니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시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한 분으로 모든 서러움이 날아가고 감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음은 좋은 감정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감정은 ‘믿음’의 산물입니다. 연인을 태우고 배를 타고 물놀이하는데 다른 배가 내 배를 들이받아서

심하게 흔들렸다고 가정해봅시다. 멍청하게 배를 젓는 상대 때문에 화가 날 것입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그 배는 빈 배였습니다. 그냥 떠내려온 배였습니다.

그러면 ‘아, 내가 부주의해서 저 배를 보지 못했구나!’로 감정이 바뀝니다.

 

앞에서 화가 날 때의 감정은 ‘분명히 저 배에는 멍청한 놈이 타고 있어!’라는 자기 말을

믿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 말을 믿으면 나쁜 감정이 솟아납니다. 하지만 자신을 믿지 않으면 나쁜 감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게 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믿어 모든 일에 감사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어린이가 사람을 톱으로 자르거나 통에 넣고 칼로 찌르는 마술을 본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매우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그 모든 것이 눈속임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저 ‘저걸 어떻게 했지?’라며 신기하기만 할 것입니다. 

 

이렇게 감정은 믿음에 의해 생겨납니다. 

나는 내 목소리를 믿을 것인가,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믿을 것인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내 목소리를 믿으면 나쁜 감정에 사로잡혀 결국 남도 죽이고 나도 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것이 은총이 됨을 믿어 나도 살고 이웃도 삽니다. 

 

기쁘지 않은 성인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맞아들이지 않고 기쁜 감정으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악령은 ‘나를 믿게 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을 멸망시키러 오신 분으로 믿게 했습니다.

그래서 악령에 들린 사람은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심판이 이뤄집니다.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나를 주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악령이 되어갑니다. 

 

더 늦기 전에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사랑합시다. 그러면 그분이 주인이 되시고

그분의 말씀을 믿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일에 감사한 감정이 생겨나고

그러면 나쁜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나에게 사로잡힌 이들은 나쁜 감정으로 살면서도

좋은 감정으로 구원해주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악령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감정은 믿음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나를 믿던지, 그리스도를 믿던지. 불만족과 불평으로 살든지, 기쁨과 감사로 살든지.

악령에 사로잡히든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든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