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예언자의 십자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수성구 2022. 8. 29. 02:59

예언자의 십자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예레 1,17-19; 마르 6,17-29 /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2022.8.29.(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레미야나 세례자 요한 같이 하느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은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거역하는 무리들과 맞서야 하는 운명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언자의 소명을 주시며 하신 말씀은 이러합니다: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예레1,18).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등을 떠밀으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예레 1,19)이라고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언자의 운명에는 박해라는 어려움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행운도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더 큽니다. 그가 예언자로서 활약했던 시기는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야 했던 암울했던 때였으므로, 지도자들의 죄악 탓으로 큰 불행을 겪게 된 백성을 위로하는 일이 먼저이긴 했지만, 그러고 나서는 자신이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처럼, 백성들에게도 그들과 함께 하시고자 하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희망이 결국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예레미야에 이어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드디어 메시아께서 오실 때가 임박했음을 알렸고, 죄악에 대해 단호한 결별을 호소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만, 이 역시 예레미야처럼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백성에게 호소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것이 요르단 강물로 죄를 씻는 세례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회개에 대한 호소를 외면하고 여전히 죄악을 저지르던 자들, 특히 헤로데 영주에게는 추상같은 어조로 단죄하며 비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상황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의로운 희생을 슬퍼하시면서도 그 뒤를 이어 백성들에게는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호소하시면서 불의한 권세가들에 대한 서슬 시퍼런 경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당신 제자들에게는 의로움 때문에 받는 박해를 각오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왜냐하면 박해를 받을 각오로 의로움을 행하는 이들이야말로 하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이어서,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12)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삶을 본받도록 교회가 가르치는 직무가 세 가지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바치고 이를 전례에서 봉헌하는 사제 직무, 가난한 이웃에 대한 봉사를 실천하는 왕 직무, 그리고 사회악에 맞서라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또 말씀대로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한 예언자 직무입니다. 이 세 가지 직무에서 모두 희생이 뒤따릅니다만, 그 중에서도 예언자 직무로 말미암아 권세가들에 의해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그래서 박해가 두려워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2)고 하시면서 십자가의 영성을 일러주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어쩌다가 재수없이 권세가들에게 밉보인 예언자들이 예외적으로 치루는 희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단언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십자가를 걸어 두는 것이며, 기도를 시작할 때면 십자 성호를 먼저 긋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예수님처럼 복음을 선포하다가 대사제들에게 불들려 가서 매를 맞고 모욕을 당했을 경우에도,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사도 5,41)고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은 모욕을 당해서 기뻐했다기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동참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죄를 보속할 수 있었던데다가 드디어 자신들도 스승의 십자가 수난에 동참할 수 있게 된 바로 그 점을 두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마만큼 예수님과,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예레미야나 세례자 요한은 그 좋은 본보기였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솔선수범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이 십자가 희생과 수난으로 사제 직무의 봉헌과 왕 직무의 봉사도 완성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 희생과 수난 속에는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구원의 영적 효과도 있고, 지나쳤거나 어긋났던 점을 바로 잡아주는 정화의 효과도 있으며, 의로웠으면서도 당당하지 못하고 주눅들었던 비겁한 자세를 강화시켜주는 수련의 효과도 있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를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