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되리라
묵시 21,9-14; 요한 1,45-51 /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2022.8.24.; 이기우 신부
오늘은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입니다. 복음서에서 나타나엘로 알려진 그는 필립보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났는데, 단박에 그의 인간 됨됨이를 알아보신 예수님께서,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자 동지들과 함께 수시로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 모여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열만해 오던 바르톨로메오 역시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 1,49) 하고 화답하였습니다. 당신을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세례자 요한에 이어 이 바르톨로메오가 두 번째였던지라, 예수님께서도 화끈하게 예언의 덕담을 내려주셨습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1).
마지막에 바르톨로메오에게 하신 말씀의 주어가 “너희”로서 복수 2인칭임을 감안하면, 하늘이 열리는 모습은 제자들에게 모두 해당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베푸신 숱한 기적들을 목격한 것이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성령으로 함께 하시면서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에게 공동생활 양식으로 보여주신 것도 바로 그 ‘열린 하늘’의 모습이었고, 오늘 독서에서 보여주는 ‘거룩한 도성’(묵시 21,10)이나 ‘새 하늘과 새 땅’(묵시21,1) 또한 ‘열린 하늘’의 그 모습입니다. 그들에게는 권력이 신앙을 박해하고 세상 사람들이 우상숭배에 물들어 무신론 사조가 만연해있을망정 예수님께서 희망을 열어젖히신 열린 하늘에 대한 비전이 살아 있었습니다. 아니, 권력의 신앙 박해와 세상의 무신론 풍조 때문에 더욱 더 열린 하늘에 대한 열망이 더 컸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세를 거치면서는 12세기에 프란치스코의 청빈 운동이 반짝 일어났을 뿐 이 ‘열린 하늘’에 대한 기억도 잊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8세기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동력기관의 발명으로 생산력이 갑자기 증대되어 갑자기 부유해 진 자본가들이 생산력을 더 늘려서 돈을 더 벌겠다고 농민들까지 데려와 도시 노동자들이 늘어나자 노동자들의 임금은 더 떨어져서, 자본가들은 더 부유해지고 노동자들은 더 빈곤하게 되는 빈익빈부익부 사태로 번져버렸습니다.
이러한 사태 속에서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을 형성할 만큼 대량으로 발생했고, 장시간 노동을 해도 생존하기에도 모자라는 저임금에 시달리게 되자, 노동자들이 단체를 결성하여 생존권을 주장하는 노동운동이 자생적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갔습니다. 이에 따라 시대의 혼란상이 극심해지던 이 무렵에 예수님의 말씀, 즉 하늘이 열리는 모습과 초대교회의 공동생활 양식을 기억하고 이를 재현하고자 했던 그리스도인들이 유럽에 출현했습니다.
제일 먼저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노동자들의 빈곤 문제가 심각했던 영국에서는 로버트 오웬(Robert Owen, 1771~1858)이나 윌리엄 킹(William King, 1786~1865) 같은 선구자들은 소비자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산업혁명의 여파가 50여 년 늦게 밀려든 프랑스에서는 생 시몽(Saint Simon, 1760~1825), 샤를르 푸리에(Chales Fourier, 1772~1837) 같은 생산자 협동조합의 선구자들이 출현하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서도 산업혁명의 전파 속도가 백 년 정도 늦었던 독일에서는 고리대금의 폐해로 빈곤해 진 도시와 농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신용협동조합 운동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도시 빈민들을 위해서는 슐체 델리치(Shulze-Delitzsch, 1808~1883), 농촌 빈민들을 위해서는 빌헬름 라이파이젠(Wilhelm Raiffeisen, 1818~1888)이 선구자였습니다.
이런 협동조합 운동 선구자들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비웃으면서,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와 함께 1848년에 공산당 선언을 필두로 유물론적 역사관과 계급투쟁론에 입각한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무신론적 공산주의 운동이었지만, 제도교회가 부자들 편에 서서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형편에서 노동자 신자들이 대거 교회를 이탈하여 이 공산주의 운동에 합류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알아차린 교황청에서는 1891년에야 빈익빈부익부 사태를 다룬 최초의 사회회칙 ‘새로운 사태’를 반포하기에 이르렀고, 후임 교황들도 이 노선을 따라서 사회적 관심을 표명하였고, 이 흐름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어지고 보편화되었습니다.
뒤늦었지만 확고해진 가톨릭교회의 이 노선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를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메시지로 구체화되었습니다(사목헌장, 1항). 예수님께서는 바르톨로메오에게 ‘열린 하늘’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고 대단히 강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목헌장은 이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는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실현한 ‘공동생활 양식’의 새로운 모델을 발견해 냄으로써 예수님께서 열어젖히신 하늘을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계승하기 위한 실사구시적 실천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진실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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