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8월 19일 성 루도비코 주교

수성구 2022. 8. 19. 04:35

8월 19일 성 루도비코 주교

Altar of St Louis of Toulouse - SIMONE MARTINI
c.1317.Tempera on wood,200x138cm(without predella).Museo Nazionale di Capodimonte,Naples

 

축일: 8월 19일

성 루도비코 주교

St.LOUIS of Toulouse

St.Ludwig of Toulouse

St.Ludovicus, E

San Ludovico d'Angiò (di Tolosa) Vescovo
Brignoles (Provenza), febbraio 1274 - 19 agosto 1297
Born :1274 at Nocera
Died :1297 of natural causes
Canonized :1317 .  작은형제회

 

 

 

그는 찰스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84년, 그의 부친 찰스가 아라곤왕과의 해전에서 포로가 되자,

석방 조건으로 그의 아들 세 명을 보내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져,루이도 인질로 잡혀갔다.

그는 7년 동안 바르셀로나에서 지내면서 여러가지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하는 한편,

프란치스꼬회원들의 영향을 받아가며 공부하였다.

 

이윽고 그는 프란치스칸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밤낮으로 기도하고, 철학과 신학 공부에 매진하였다.

1295년, 그가 석방되었으나, 아라곤 국왕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러므로 그는 가난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세속적인 모든 것을 물리치고는,  

"나의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고 외쳤다고 한다.

 

 

그후 그가 뚤루즈의 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보니파시오 8세로부터 관면을 받고 23세의 나이로 사제서품 후 착좌하였다.

그후 그는 로마로 가서 프란치스칸으로서 서원하였다.

 

그는 가난한 수도자로서 주교직을 수행하였으나,

뚤루즈 사람들은 그를 왕과 못지않게 공경하였다.그의 신심과 자태는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주교관의 모든 화려한 물건을 배격하고 프란치스칸 답게,

오로지 프란치스칸에 알맞는 의복과 음식으로 만족하며 살았던 것이다.

요한 22세로부터 아비뇽에서 시성될 때(1317), 그의 모친은 그때 생존해 있었다.

 

 

The Oath of St Louis of Toulouse-LORENZETTI, Ambrogio.

1324-27.Fresco.San Francesco, Siena

 

성 루도비코는 1274년 네아펠 왕의 왕자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애스빠냐에 볼모로 잡혀가서 작은형제들과 만나는 기회가 있었다.

자유를 되찾은 후에 왕위를 포기하고 작은형제가 되었고,

22세때 툴루즈의 주교가 되어서도 작은형제회 수도복을 선호하고

사목자로서 겸손하고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이들을 열성적으로 돌보았다.

 

교회의 많은 봉사를 했고  톨로사의 주교가 되었다.

이곳에서 감옥에 갇친이 병든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아직 젊은 나이인 1297년 폐병으로 로마에서 선종했고 톨로사 교구의 주보 성인이 되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St Thomas in Glory between St Mark and St Louis of Toulouse-CARPACCIO, Vittore

1507.Tempera on canvas, 264 x 171 cm.Staatsgalerie, Stuttgart

 

북 이탈리아 가톨릭 신학계의 두 혜성,

프란치스코 회의 성 보나벤투라와 도미니코회의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존재가 사라진 1274년

남 이탈리아 상공에 또 하나의 혜성이 나타났다.

이는 프랑스 툴루스 주교로 성덕의 빛이 더욱 찬란했던 루도비코 성인이다.

 

그는 시칠리아 섬의 왕 가롤로 2세의 아들이며 헝가리의 왕 스테파노 5세의 딸 마리아를 모친으로,

또 프랑스 왕 루도비코는 아버지의 친족이고,

투린기아(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은 어머니의 친척이 되는 고귀한 신분으로서,

그의 졍결한 마음, 그의 독실한 신앙은 일찌기 타인들의 감탄을 사게 되었으나,

이처럼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던 왕후의 집안에도 하느님의 시련은 내려졌다.

즉 가롤로 왕에게 불만을 품은 시칠리아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생포하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유폐한 일이다.

  

왕은 4년후에 겨우 석방되었으나 그 대신 공작(公爵)50명과 왕자 3명을 인질로 남기게 된 것이다.

루도비코도 그 중 한사람으로 바르셀로나에 감금되어 갖가지 냉대와 모욕을 받았다.

 

그는 이러한 처지에서도 조금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잃지 않고

잘 인내하며 동료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리고 감금 중에 프란치스코회 신부의 지도를 받아

세속적 영화의 허무함과 사람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알고

더욱 더 세속을 싫어하며 하느님만을 사랑하려는 굳은 결심과,

부호의 아들로서 모든 것을 끊고 오직 가난한 생활만을 택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사모하여

때가 이르면 그를 본받아 모든 것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신성한 복음적 생활을 하려는 동경심을 갖게 되었다.

 

 

 

한 때 중병으로 위독하게 된 루도비코는 만일 하느님께서 도움을 베풀어 낫게 해 주신다면

꼭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들어가 일생을 그분께 봉헌 할 것을 맹세했던 바,

즉각 기적적으로 완쾌되었다. 그 후 자유의 몸이 되어 나폴리에 돌아오자마자,

즉시 수도회 총장을 방문하여 자기의 수도원 지망을 표명했다.

그러나 총장은 부왕의 의사를 두려워하여 우선 승낙을 받아 올 것을 명했다.

 

루도비코는 아버지에게 하느님께 일생을 바치고 싶다는 소망을 알렸으나

본래 그런것을 반대하던 아버지는 펄쩍 뛰며

"세상을 버린다는 건 말도 안된다.

너는 아라고니아 왕의 여동생을 왕비로 맞아들여 내 상속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느님과 맺은 서원은 교황께 알리면 되지 않는가?"하며 완강히 거절했다.

그러나 루도비코의 결심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후세에 상속받을 천국의 보물에 비하면 현세의 왕위나 궁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하며

시종일관 뜻을 변치 않으므로

하는 수 없이 아버지도 차남인 로베르토에게 그 상속권을 넘기기로 하고 루도비코의 수도원 입회를 승낙했다.

 

루도비코는 열심히 학문을 연마하여 사제가 된 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집전 아래 주교로 축성되었다.

그가 하느님과 맺은 서원대로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한 것은 그 후의 일이고,

장엄한 종신 서원을 발한 것은 1296년 예수 성탄 축일 전날이었다.

 

St Francis and St Louis of Toulouse-SIMONE MARTINI.

1318,Fresco, 120 x 152 cm.Low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그는 한때 시칠리아의 왕자였고, 교황께 특별한 총애를 받는 주교였지만,

교구에 부임할때는 몸에는 검소한 수도복을 걸치고 맨발로써 부임했다.

그에게는 아버지이며 스승인 아시시 성자의 겸손과 청빈을 방불케하는 점이 있었다.

그는 신분에 맞지 않을 정도로 검소한 방에 거주하며 엄한 고행의 생활을 보내고,

그 수입의 태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며 매일 극빈자에게 어진 어머니와 같이 대했고,

죄인의 회개를 위해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심으로 노력했다.

그러자 그의 성덕은 온 천하에 알려져 그 주교를 탐내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빨리 불러 가셨다.

1297년 7월 뜻하지 않은 열병에 걸려  루도비코는 병석에 누운 지 1개월만에 병자 성사를 받고

8월 19일, 열렬한 기도 중에 그의 순결 무구한 영혼을 하느님께 바쳤던 것이다.

그의 나이 24세요, 그 생애는 세상사람이 생각하는 평균 생명의 반도 못되는 짧은 세월을 이 세상에서

보냈으나, 남들이 백년에도 이룰 수 없는 공적을 남겨 놓았다.

1317년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