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8월 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수성구 2022. 8. 11. 06:09

8월 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St Clare - SIMONE MARTINI

1317.Fresco,Cappella di San Martino,Lower Church,San Francesco, Assisi

 

 

 

8월 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Santa Chiara Vergine
Saint CLARE of Assisi
(Assisi, 1193/1194 - Assisi, 11 agosto 1253)
Born:16 July 1194 at Assisi, Italy
Died :11 August 1253 of natural causes
Canonized:26 September 1255 by Pope Alexander IV
Chiara = trasparente, illustre, dal latino
Name Meaning :bright; brilliant

 

 

그리스도의 연인,우리의 연인!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작은형제회 한국 관구장)

- 클라라의 향기 2002. 제2호에서

 

....(중략)

교회는 그녀가 이 지상에서 하늘로 옮아가신 지 750년이 되었지만

그녀를 새롭게 조명하고 그녀의 귀천 750주년을 성대하게 준비하고 기념하려고합니다.

그것은 성녀의 이름이 의미하듯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와

두분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역사에 빛나는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성중심적 사회와 문화를 비판하고 여성의 위대성과 그 역활을 새롭게 들추어내는 요즈음

이 운동의 선구자들 중에서도 가장 앞서신 분으로 성녀 클라라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클라라 성녀가 모든 여성의 선구자인 이유가 당시 여성을 연약한 존재로 치부하고

그래서 기존의 수도 생활 회칙을 받아들이라는 교황들의 요청을 죽을 때 까지

거부하고 끝까지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였기 때문만은 아니고, 요즈음 여성 운동처럼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싸웠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녀가 남성 중심적 문화가 강요하는 대로의 그런 여성적 여성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그런 남성들과 싸우는 남성적 여성도 아닌, 즉 하느님적 여성이었기때문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면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적 여성이었습니다.

 

성녀는 남성을 혐오하지도, 남성과 싸우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프란치스코를 지극히 사랑하였고, 그것은 그녀와 프란치스코가 만나 대화를 나눌 때에

사랑이 타올라 마치 집에 불이 난 듯 멀리서도 환할 정도였습니다.

신문을 보면 만인이 우러러 볼만한 연인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일컬어 세기적 사랑이라고 떠들썩하는데,

그녀와 프란치스코의 사랑이야말로 세기적 사랑 중에서도 세기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자신을

’그의 작은(나무)가지’라고 할 정도로 존경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서로를 닮게 하고 마침내는 하나가 되어 같은 것을 바라보게 하지만 서로를 ’그’로서 있게 합니다.

이것이 풋사랑과 다른 점입니다.

미숙한 사랑은 서로에게만 머물고, 서로에게 빠져 서로를 삼켜바리는 것으로 끝나지만,

진정한 사랑은 삼위일체의 사랑과 같이 따로 또 같이 존재하고 바라보며,

’우리의 사랑’을 ’우리 너머의 사랑’ 에로 확장케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양평 성클라라수도원.2000년.이태리.원목조각

 

성녀는 프란치스코가 바라 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고,

프란치스코가 사랑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녀의 일생은 프란치스코가 바라보고,소명을 받은 다미아노 십자가의

그 예수 그리스도를 관상하는(바라보는)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꾸밈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갔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프란치스코가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ti)’라 불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적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임종을 앞두고 한 형제가 갖가지 병고의 기나긴 형극의 길에서

마지막으로 인내하라고 격려하였을때,그녀는 매우 편안한 어조로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그분의 종 프란치스코를 통하여 한 번 알게 된 다음부터는

어떠한 고통도 나를 괴롭히지 못했고,어떠한 고행도 격렬하다 할 것이 못되었으며,

아무리 병이 들었어도 힘들지 않았습니다.나의 사랑하는 형제여!"라고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주십사고 청한 것을 상기시킵니다.

프린치스코는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이 얼마나 큰지 할 수 있는 한

많이 느끼고, 그러한 고통을 감수할 정도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할 수 있는 한 많이 느끼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 결과 프란치스코는 오상을 은혜로 받았는데, 성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사랑(Passion)을

수난의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는 은총, 고통의 두려움을 몰아내는 강인한 사랑의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셩녀 클라라-양평 성클라라수도원.2000년.이태리.원목조각

 

성녀는 프란치스코를 사다리 삼아 예수 그리스도께 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다리 삼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사랑에 안기고 잠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의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난 것 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역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보내주신 하느님의 현현(顯現)이며

프란치스코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이고,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가 형제라 부른 모든 것들도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배로 사랑한 그녀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인 우리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 모두의 연인입니다.

 

우리가 그녀의 연인이라면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바라보며 치장하고 닮아갔듯이

우리도 거울인 그녀를 바라보며 치장하고 닮아

"말구유 위 강보에 싸여 계시는 그 가난을,

천사들의 임금이시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분이 구유에 누워 계시는 그 겸손을,

그리고 십자가나무 위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거기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항상 깊이 바라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클라라의 향기2002.제2호에서- 양평 성 클라라 수도원 www.clara.or.kr

 

 

성 다미아노 성당은 글라라가 봉쇄 관상생활을 살았던 곳이었는데,

1253년 세상을 하직하던 그 날까지의 한 번도 성 다미아노 성당을 떠난 적이 없었다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의 회(Order of Poor Ladies of San Damiano)가

창설된 곳이 바로 이곳인 것이다.

그녀의 삶은 사도적 삶의 엄청난 지평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동시대의 다른 위대한 여성들의 역할에 필적하는

훌륭한 신비주의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낸 독자적인 중세여성이었다.

 

성프란치스코는 21세의 그녀를 여자대수도원 원장으로 임명했으며,

그녀는 죽을 때까지 순명으로 그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다.

수녀들은 맨발로 지내고, 맨바닥에서 자며 고기를 먹지 않고, 완벽하게 침묵을 지켰다.

물론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복음적 가난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하루를 생활해 나가는 데 필요한 재물조차도 소유하지 않았다.

성녀는 교황으로부터 ’가난의 특권’을 허락받고 이를 유지하는데

너무나 엄격하다는 주장들 때문에 많은 반대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글라라회원들은 높은 수준의 관상가들이며, "복음적 완덕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첼라노 2생애는 세 동료들의 전기 24항에서 전하고 있는 내용,

즉 프란치스코가 산 다미아노의 십자가로부터 들은 명령에 따라 그 성당을 수리하면서,

산 다미아노 수도원, 혹은 산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의 회의 창설에 대해서 예언했다는 내용을

반복해서 전하고 있다.

204항은 프란치스코의 생애에 있어서 클라라와 가난한 자매들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첼라노는 이 동정녀들이 겸비한 덕들을 찬양하고 있으며,

프란치스코가 1212년에 클라라에게 생활양식을 주었다는 사실 또한 언급하고 있다.

205-207항에서 첼라노는 프란치스코가 그들과의 영적인 일치가

실제로 함께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가난한 자매들을 방문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같은 이유 때문에,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이 별 이유 없이 산 다미아노를 방문함으로써

가난한 자매들의 마음의 평화를 깨지 말 것을 자주 권고하였다.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자매들에게 설교해 줄 것을 부탁 받게 되면,

자매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머리에 재를 쓰고 시편 51편,“Miserere”를 낭송하고 왔다고 한다.

자매들은 이러한 행동을 다른 어떤 설교보다도 더 좋아하였다.

 

 

아시시의 클라라(1193-1253)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여성적으로 표현한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녀의 이름은 “현명한 사람”(the enlightened one)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녀의 삶은 종종 프란치스코의 철저한 복음적 삶에 반대되는 배경을 지니는 것처럼 비춰진다.

그런데 클라라가 프란치스코의 이상에 아주 특별한 공헌을 한 사람으로 부상되게 된 것은 최근의 일로서,

1993-94년에 클라라 탄생 800주년 기간에 있었던 일이다.

 

클라라는 자신을 종종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라고 불렀다(회칙 I,3; 유언 37; 49).

그녀의 이상은 프란치스코의 이상에 부합하는 것이기는 하나,

복음에 대해 참으로 여성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철저한 복음적 삶이

남성들의 사도적 영성에 있어서만 적용되는 특권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녀의 삶을 간략하게 살펴 볼 것이고,

그 다음으로 동시대의 다른 위대한 여성들의 역할에 필적하는

훌륭한 신비주의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낸 이 독자적인 중세 여성에 대해 잘 묘사해 주고 있는

그녀의 글들을 연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클라라의 관상의 삶은

외적으로 설교를 하러 다녔던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의 삶을 보충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프란치스코가 관상의 삶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전기 12장 2항에서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코가 관상과 사도적 설교 중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하느님의 뜻을 찾고 있던 그 중요한 순간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실베스텔 형제와 클라라 자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 두 사람은 같은 대답을 하게 되었다.

즉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사자(herald)로서 설교하는 것이” 하느님의 원의라는 것이었다.

 

그는 보통 몇 명의 형제들과 함께 몇 달 동안이나

자신이 이태리의 Appennines 산맥을 따라 만들었던 여러 은둔소들 중 한 곳에서 지냈다.

이 은둔소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시시 위쪽에 위치한 수바시오 산에 있는 Carceri 은둔소일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또한 은둔소에서 살고자 하는 형제들을 위해서 짧은 회칙을 써주기도 하였다.

1213년 5월 8일에 프란치스코는 San Marino 가까이 있는 San Leo에 있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자신과 형제들에게 Casentino에 있는

라베르나 산을 기증한 Chiusi의 Orlando 백작을 만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이 산을 기꺼이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이 산이 은둔소를 위해서 이상적인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이 산은 1224년 9월, 프란치스코가 오상을 받았던 곳이다.

 

 

성 다미아노 성당 내부 모습과 성 다미아노 성당의 옛 가대

 

가난한 자매들의 초기 공동체의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특정한 성격을 드러내 준다.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은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삶에 자극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작은 형제들과 아주 가까워서“작은 자매들”이라고도 알려졌다.

그들의 생활양식은 봉쇄생활이었으나,그전의 수도승적 수도원의 생활양식과는 다른 것이었다.

성 다미아노에서의 봉쇄구역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더 영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가난한 자매들은 시가지 가까운 곳에서 살았는데,

이것은 자신들과 관상적 삶의 태도를 공유하고 있었던

작은 형제들의 사도적 활동에 가까이서 협력하려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가난한 자매들의 삶은 그들의 아무런 소유도 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여성들의 수도생활 운동들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가난의 특전은 클라라와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이 지녔던 특징적인 점으로 여겨진다.

 

클라라는 자신의 전생애를 통해, 그녀의 카리스마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해석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두 명의 교황은 그녀의 가난의 특전을 인가해 주었다:1216(인노첸시오 4세); 1228년(그레고리오 9세).

그러나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자신이 보호자 추기경이었을 때인 1218년에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에게 준 회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후에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은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에게 다른 회칙을 만들어 주었다.

이 두 개의 회칙은 모두가 베네딕도회의 이상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성 다미아노 공동체에 안정된 생활양식을 보증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클라라는 교회가 인정해 주는 그녀의 고유한 생활양식을 갖고자 결심하였다.

그녀가 실행해 간 계획은 그녀의 용기와 결심을 잘 보여준다.

제 4차 라떼란 공의회(1215년)는 수도회들이 새로운 회칙을 가지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클라라는 1212년에 프란치스코가 자신에 생활양식을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짧은 기록은 생활양식과 함께 클라라가 자신의 회칙 6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실제로, 죽음에 이르러서 더 이상 클라라를

개인적으로 방문할 수 없었던 프란치스코의 마지막 유언이다.

이 유언에서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모델 삼은 복음적 가난의 이상에 대해 강조하고 있고,

클라라와 가난한 자매들에게 그 이상에서 벗어나지 말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클라라는 그녀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즉 교황에 의해 자신의 회칙을 인준되는 것을 보는 그 순간까지

이 말들을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간직하였다.

 

이 생활양식은 1223년 11월 29일 교회에 의해 정식으로 인준된 작은 형제들의 회칙을 모델 삼아 만들어진

그녀의 회칙에 근본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녀의 회칙은 새로운 회칙이 아닐 수 있었던 것이었지만,

이것은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이 지키기로 약속한 복음적 이상을

여성적으로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1253년 8월 9일 자신의 생활양식에 대한 인준을 받아 내었다.

클라라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여성 수도회를 위한 회칙을 쓴 첫 번째 여자이다.

 

클라라는 자신의 회칙 6장을 프란치스코가 그녀와 그녀의 가난한 자매들에게 준

두 개의 중요한 글들에 전적으로 근거하여 쓰고 있다.

이 두 개의 글은 성녀 클라라의 회칙에 있어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이들 중 첫 번째 것은 1212년에,

즉 클라라와 그녀의 자매들이 산 다미아노에 정착하자마자,프란치스코가 그들에게 써 준 것이다.

 

자신의 회칙 6장에서 클라라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복되신 사부님은 우리가 가난도 수고도 고생도 모욕도 세속의 멸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것들을 더 없는 즐거움으로 여긴다는 것을 눈여겨보시고

자비심으로 마음이 움직여 다음과 같이 우리를 위해 생활양식을 써 주셨습니다.”

이 생활양식은 클라라와 가난한 자매들이 했던 복음적 삶에 대한 약속에 있어 기초를 형성한 것이고,

그래서 이 생활양식이 클라라 회칙의 근본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 생활양식은 클라라와 가난한 자매들 그리고 하느님과의 삼위일체적 관계성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프란치스코가 가지고 있었던 그들에 대한 염려와 사랑을 보증해 주는 것인데,

이것이 형제들에게로 이어져 형제들의 의무로까지 확대되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 죽음이 가까워 올 무렵에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이 클라라를 두 번이나 방문하였는데,

클라라는 그때 교황께 자신의 회칙을 인준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래서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은 이 회칙을 1253년 8월 9일에 이 회칙을 인준해 주었다.

이틀 후인 8월 11일 클라라는 성 다미아노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그녀의 시성 절차에 있어서 세 번째 증인이었던 필립파 자매에 의해 기록되었다:

 

“여러분은 훌륭한 호위를 받을 것이기에 평화 안에서 고요히 가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을 창조하신 그분께서 성령을 보내주셨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녀에게 하듯이 여러분을 지켜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 주님, 저를 창조해 주셨으니 찬미 받으소서” (시성조사서 III, 20).

 

 

1260년 가난한 자매들은 전에 San Giorgio 교회가 자리를 잡고 있었던

아시시의  새로운 수도원으로 이사하였다.

그들은 이사하면서 성 다미아노의 십자가와 클라라의 유뮬들을 함께 가지고 갔다.

그녀가 죽은 후,자매들의 수도회는 성녀 클라라의 수도회(OSC)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성녀 클라라의 무덤은 1850년 8월 30일에 발견되었고, 9월 23일에 그녀의 유물들이 공개되었다.

1872년에 순례자들이 경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이 유물들은 대성당의 안치소에 있는 유골단지에 보관되었다.

성녀 클라라의 회칙 원본은 이 회칙을 인준해 준 칙서인 “Solet annuere"와 함께 1893년에 발견되었다.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성녀 클라라에게 허가한(1228. 9. 17.) 세라핌적 가난의 특전

 

하느님의 종들의 종 그레고리오 주교는 아시시 교구의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수도적 공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애하는 딸들인 그리스도의 시녀들,

클라라와 그 자매들에게 인사하며 사도적 강복을 보내노라.

 

1.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대들은

오직 주님께만 자신을 봉헌하기 위하여 세속의 모든 부귀 영화를 포기하였소.

그리하여 그대들은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여지신 그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분의 발자취를 모든 점에서 따르며

어떠한 경우에도 그 길에서 떠나지 않기 위하여,

더 이상 어떠한 재산도 결코 소유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소.

 

2. 이러한 그대들의 결심은 어떠한 물질적 곤란을 당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사랑의 마땅한 도리로 결심하고 스스로를 영의 법에 굴복시킨 그대들 육신의 허약함은

임의 왼손이 머리 받쳐 도와 주실 것이기(참조:아가2,6;8,3) 때문이오.

 

3.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들을 먹이시고(참조: 마태 6,26) 들의 꽃들을 입히시는(참조: 마태 6,26) 그분께서는

그대들에게도 무엇이건 모자람이 없게 보살펴 주실 것이며,

그분을 마주뵈올 영원의 나라에서는 당신 바른손으로 그대들을 안아주시고(참조:아가2,6;8,3),

그분의 식탁에 자리한 그대들 사이를 오가며 손수 시중들어(참조: 루가 12,37) 주시리이다.

 

4. 이렇게 우리는 그대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지극히 높은 가난에의 결심을

사도적 호의로 뒷받침하고  보증하며,어느 누구도 그대들에게 재산 받아들이기를 강요할 수 없게

 이 문서를 통하여 사도적 권위로 확인하는 바이오.

 

5. 어느 누구도 우리가 인준하고 확인하는 이 기록을 훼손하거나 이에 대해 무모한 반대를 하지 말 것입니다

누가 무엄하게도 이런 행동을 하려고 하면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진노를 부르게 되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페루지아에서 교황 즉위 제2년 9월 17일-

 

 

▒우리 수도회의 영성

성 클라라 수도회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따라 성교회 안에서 거룩한 복음을 그대로 본받음을 생활양식으로 하고,

산 위에서 기도하신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기도생활로써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인 그리스도 신비체의 완성을 위해 봉헌된 관상 수도회이다.

성 클라라 수도회, 또는 가난한 자매 수도회라고 불리며, 프란치스코회의 제2회를 이루고 있다.

 

본 수도회의 생활양식이란 교회생활, 형제애, 가난, 관상이다.

우리 수도회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모 마리아의 발자취를 따라 성령의 정배가 되어

오직 하느님만을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가족적 일치를 이루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은 삶을 살아가는 봉쇄 안에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께 그 마음을 두는 관상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성자를 당신 마음에 꼭 들어하시는” 성부와 함께

산 위에서 관상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마태 17,5)를 본받아 증거하며 살아가는 관상 수도회이다.

 

침묵 안에 끊임없이 회개의 정신을 새롭게 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을 끊임없이 바라봄으로써

모든 사람과 사물과 모든 사건 속에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발견하게 되어 찬미와 감사를 드린다.

이 찬미와 감사는 성체신비의 거행에서 절정을 이루며, 교회의 심장 역할을 다한다.

이로써 교회는 이 생명의 샘에서 한없이 새로워진다.

 

이렇게 자매들은 자신의 삶 전체로 온 누리의 찬미를 수행하며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의 축제에 들어감으로써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그 영광스러운 몸의 연약한 지체들을 받치는 받침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