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8월 9일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따 (에디트 슈타인)

수성구 2022. 8. 9. 02:38

8월 9일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따 (에디트 슈타인)

축일: 8월 9일

성녀 에디트 슈타인 순교자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네딕따

Saint TERESA BENEDICTA of the Cross
Santa Teresa Benedetta della Croce (Edith Stein) Martire
(Breslavia, 12 ottobre 1891 - Auschwitz, 9 agosto 1942)
Born:12 October 1891 at Breslaw, Germany (now Wroclaw, Poland) as Edith Stein
Died:gassed on 9 August 1942 in the ovens of Auschwitz
Beatified:1 May 1987 by Pope John Paul II in the cathedral at Cologne, Germany
Canonized:11 October 1998 by Pope John Paul II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무신론자가 되었다가 다시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가르멜에 입회하였고

아우슈비츠의 독가스실에서 최후를 맞이했던 에디트 슈타인은

온 삶을 진리를 찾기 위해 헌신했던 철학자요 수도자요 순교자로서

우리 시대의 활동적이고 자주적인 여성 중의 빼어난 본보기가 되며,

여성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어 사회와 교회에 철저히 봉사하도록 격려할 수 있는 인물이다.

 

 

1998년 10월 11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로마에서 시성된 그녀는

민족과 종교 사이의 평화와 화해를 추구하는 오늘날,

우리의 방향 선택에 등대가 될 수 있는 성인이라 하겠다.

 

1987년 시복식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에디트 슈타인을 재래의 의미로 "순교자"라고 칭할 수 없어서 "사랑의 순교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칭호를 통해 교황은 에디트 슈타인이

주위에 있던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을 마지막 극한 상황에서까지 남김없이 드러냈으며

그녀의 모습이 성서의 하느님의 자비로 빛났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적 영성과 성성의 모범으로 악의 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한 에디트 슈타인은

신앙의 진리를 추상적 차원이 아니라 경험과 열정으로 실천해야 할 진리임을 제시한다.

 

 

현대의 문제인 물질주의, 세속주의, 이교도주의로부터 이탈하는 길로 사랑과 기도의 힘을 제시하고 있다.

에디트 슈타인의 삶은 나의 계획이 없는 하느님의 계획이 어떤 것인가

그리고 어떤 사상을 우리 삶에 새겨 넣어야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묻고 또한 가르쳐 준다.

 

20세기 전반의 격동의 시대를 산 특이한 인물로

빼어난 지성과 재능을 겸비한 그녀의 생애는 파란만장하고, 비참하고 숭고한 일생이었다.

에디트 슈타인은 현대라고 하는 정신적인 사막에 단단히뿌리를 내리고,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 어둠과 갈등을 나눠 가지고 그것을 정화하여 재생시켜 주는 사람이다.

현대의 정신적 위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상황들이 위험인 동시에

하느님을 만나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기회임을 깨닫게 해준다.

 

 

19세기 말 독실한 유다교 집안에서 출생한 에디트 슈타인은

25살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뛰어난 학자로서 독일에서 강의와 연설을 하였다.

그가 43살이 되었을 때 가르멜 수녀회에 들어가기 위해서 세상의 지식과 학문이 담긴 책들을 덮어 버렸다.

유다인 혈통이었던 그는 나치의 의해 체포되어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1942년 8월 9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

 

 

성인들 중에는 에디트 슈타인처럼 뛰어난 학자가 있는가 하면 읽거나 쓸 줄도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성인들이 한결같이 가르치는 것은

지식이나 교육 정도와 상관없이 누구나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시험 성적이나 학위에 따라 평가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이 성적을 평가하는 과목은 사랑, 인내, 자비와 같은 덕목들이다.

하느님은 학교에서처럼 우리의 성적을 합격 점수, 불합격 점수로 평가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얼마나 성공했느냐 하는 것보다

얼마나 마음을 다해 노력하였는가를 보시고 그에 상응하는 상을 주실 뿐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노력하는 것뿐이다.

 

 

1891년 10월 12일 독일 동북부 지역의 브레슬라우(Breslau)의 전통 유대인 가정에서 11번째 아이로 태어난 성녀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은 두 살 때 목재상을 하던 아버지 지그프리트(Siegfried Stein)를 일사병으로 여의고, 열심한 유대인이었던 어머니 아우구스트(Auguste Stein Courant)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거행되는 유대교 전통 예식을 보며 자랐고, 유달리 고집스럽고 사색과 독서를 좋아하는 학구적인 성격의 아이였다. 11세 때 숙부의 갑작스런 죽음을 경험하면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 그리고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또 가족과 친지들의 형식적인 유대교 의식과 기도에 실망하여 더 이상 참석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까지는 브레슬라우에서, 그리고 1913년부터는 괴팅겐(Gottingen) 대학으로 옮겨 심리학, 철학, 역사학, 독일어학 등을 공부하였다.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잠시 간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녀는 1916년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서 후설(Edmund Husserl)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고 그의 개인조교가 되었다. 그 후 독자적인 연구 활동을 하며 교수 취임 논문을 제출하고 후설이 직접 추천서까지 작성해 주었으나, 당시 독일 학계에서 여성이 교수로 재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브레슬라우로 돌아와 계속 철학 연구 논문들을 집필하던 중 1921년 여름 같은 괴팅겐 학파 친구인 콘라트 마르티우스와 그녀의 남편이 경영하던 농장에 머무르게 되었다. 친구 부부가 외출한 어느 날 서재에서 우연히 손에 잡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생애”를 읽고, 그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실존적으로 회의하고 있었던 신이 그녀를 사랑해 왔으며, 그녀가 전 인격으로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기다려 왔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 후 그녀는 평화를 얻었고, 이듬해 1월 1일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할 의지를 확고히 하였으나, 어머니의 반대와 지도신부의 만류로 이를 연기하였다. 그 대신 지도신부의 제안으로 1931년까지 슈파이어(Speyer)에 있는 성 막달레나 수도원 교사 양성 학교와 도미니코 수녀회의 여학교에서 독일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그리고 점차 후설의 관념론적인 철학 노선을 떠나 그리스도교 철학의 실재론적인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계속 왕성한 교육 및 학문 활동을 하던 그녀는 발처 아빠스로부터 카르멜 수도원 입회를 허락받고 어머니와 힘겨운 이별을 나눈 뒤 1933년 10월 14일 쾰른의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하면서 수도명을 십자가의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a Cruce)로 정하였다. 입회한 후에도 수도원 원장의 적극적인 학문 지원에 힘입어 지속적인 연구와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다.

 

1936년 9월 14일 첫서원을 하였으나, 바로 그 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어머니가 지녀왔던 유대교 신앙을 존중해 주었다. 1938년 4월 21일 종신서원을 하였다. 그러나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위협은 날로 심해져 갔고,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이를 피하기 위해 수도원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그녀의 언니 로사(Rosa)와 함께 네덜란드의 에히트(Echt) 카르멜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녀는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저서 “십자가의 학문”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때 네덜란드의 주교들이 독일의 반유대주의를 비난하였고, 이에 화가 난 히틀러는 모든 비아리안계 가톨릭 신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1942년 8월 2일 언니 로사와 함께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그녀는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함께 아메르스포르트(Amersfoort) 수용소를 거쳐 베스터보르크(Westerbork)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해 8월 7일 이들 중 987명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는데, 두 자매는 이틀 후인 8월 9일 가스실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가 사망한 지 20년 만인 1962년 1월 4일 쾰른의 대주교 프링스(Josef Frings) 추기경은 그녀의 시복을 위한 소송을 제기하였고, 1980년에는 독일 주교회의를 거쳐 로마에서 시복절차를 위한 공식적인 청원이 이루어졌다. 그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독일을 방문한 1987년 5월 1일 쾰른에서 순교자로 시복되었고, 1998년 10월 11일 로마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시성식에서 그녀를 “이스라엘의 탁월한 딸이자 전세계를 위한 성인으로서 교회의 충실한 딸”이라고 칭송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듬해 10월 1일 자의교서를 통해 시에나의 카타리나(Catharina) 성녀와 스웨덴의 비르지타(Birgitta) 성녀와 함께 유럽 대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가톨릭홈에서)

 

 

 

유대인 여자 에디트 슈타인-저자 마르타 메스자로스(시간 97분,베네딕도미디어)

 

유대인 철학자이며 가르멜 수녀였던 에디트 슈타인(1891-1492)의 생애와 사상을 담은 영화.

독일의 브레슬라우(현재 폴란드령)에서 태어난

에디트 슈타인은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몬드 후쎌의 애제자요,

조교로서 끊임없는 진리추구에 헌신했으며,

스피르, 뮌스터 등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였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1921년 아빌라의 대 데레사 자서전을 읽고

"이것이 진리다"라는 깨우침과 함께 가톨릭에로의 개종을 결심한다.

가톨릭 개종을 결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영화는 가족,

특히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봉쇄 수도원안에서 관상생활을 하는 가르멜 수녀가 되기로 결심한다.

 

대 데레사 성녀의 삶과 저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슈타인은 서원을 발하기 전날밤,

자신의 동료수녀에게 "영혼의 7개의 궁방(성)"을 얘기해주며,

동료가 자유로운 삶을 선택하기를 권고한다. 또한 자신의 앞으로의 길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교수시절부터 슈타인을 사랑하며 수용소에까지 찾아온 헬러박사에게까지 마지막으로 죽기전에 용서를 청하며,

유대인 어린아이를 대신하여 가스실로 들어가는 죽음의 길을 택한다.

에디트 슈타인은 처형되기 전에, 유대인들의 회개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

 

지칠 줄 모르는 진리에 대한 추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축복에로 이어졌으며,

수용소에서 이스라엘의 딸인 동시에 십자가로 성별된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따 수녀로 운명하였다.

 

자기 민족과 함께, 자기 민족을 위하여 죽음을 받아들인 그녀의 삶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으로 가득찬 그리스도인으로서,

파스카 신앙의 신비 안에서 십자가를 얼싸안은 감동적인 모습을 그려내었다.

 

가톨릭 교회는 신앙을 증거하며 순교한 에디트 슈타인을 1998년 10월 11일에 성인으로 인정하고 선포했다.

특별히 주님의 십자가의 여정에 함께하는 사순시기에 볼만한 비디오이다.

 

 

슈타인은 독일 현대철학의 제일선에서 큰 활약을 했던 여성 철학자이면서 독일 가르멜회 수녀다.

한때 무신론자였지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글을 읽고 신앙에 눈을 뜬 그녀는 수도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교 철학을 연구했으며 그리스도인과 유다인의 화해의 제물로 자신의 생명을 바친 성녀다.

 

이 비디오는 유다인 슈타인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고백하는 장면부터 시작해

가르멜수녀회에 입회, 수도생활을 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처형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는 20세기 초 나치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유다인 박해 물결이 일던 상황에서

그녀가 겪은 심적 고통과 가족과의 갈등,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과 진리에 대한 열망을 잘 묘사하고 있다.

 

슈타인은 유다인이라는 이유로 교직도 박탈당하고 끝내는

죽음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지만 절망하지도 반항하지도 않았다.

모든 고통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유다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용서를 구하면서 1942년 가스실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

 

 

철학과 신앙 안에서 진리를 추구했던 에디트 슈타인은

“하느님은 진리이시다.

진리를 찾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느님을 찾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에디트 슈타인 -사랑과 진리의 불길

글쓴이: 수자와 카오리 . 옮긴이: 최경식. 분도출판사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에 대해서 한국에 소개된 책은 극히 드물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 에디트 슈타인 수녀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진척되어 가고

새로운 발견들로 놀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여성론자와 무신론에서 가르멜회 수녀로의 개종만으로 알려진 에디트 슈타인에 대해서 써내려 간다.

지금까지 에디트 슈타인은 그 극적인 생애 때문에 전기적 관점에서 주목되는 일이 많았지만

그녀의 역량을 나타내는 철학적·종교적 저작에 접하지 않고서는 그녀의 삶의 태도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는 그 어떤 해설서나 소개서건 그 원서에는 못 미친다.

독일의 헤르더사에서 에디트 슈타인의 저작 전집이 간행중에 있으며 현재에 14권까지 출판되고 있다.

 

슈타인의 저작은 그 내용과 주제가 주로 네 가지 장르로 나뉘어진다.

우선 첫째로 그녀는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문드 훗설 아래에서

철학 연구의 길로 들어섰다는 점에서 현상학자로서의 본령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저작이 있다.

 

그 다음 그녀의 사상적 과제는 현상학과,

성 토마스로 대표되는 스콜라학과의 만남과 대결로 옮겨간다.

 

 

 

 

슈타인의 주된 저서라고 볼 수 있는 <유한한 존재와 영원한 존재>

그녀의 깊은 명상적 신비성을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교 철학의 집대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세 번재 주제는 여성론관 교육론이다.

그녀 자신이 오랫동안 교육에 종사한 일도 있어

여성들에게 삶의 태도와 사명에 대하여 참신한 생각을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오는 주제는 영성에 관한 것으로 거기에서는 가르멜회의 정신을 계승한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관상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본서는 총괄적인 기술이나 지면 제한 관계로

에디트 슈타인의 철학적·종교적 사상에 관해 깊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전기적·철학적인 삶을 개괄적으로 꼼꼼이 써내려 간 이 책은

그녀의 저작에는 아직 출간되지도, 정리되지도 않은 것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그녀를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의 흥미를 북돋울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더욱더 연구를 해나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와 사상  

글쓴이: F. 메리 오븐. 옮긴이: 유재옥. 출판사: 성바오로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독일 콜렌가의 가난한 집에서 11번째 자녀로 태어난 에디트슈타인,

이미 일곱 살 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적 생활을 체험하고

행복과 영광의 찬란한 생활을 꿈꾸고 있었던 에디트는

그 은밀하게 간직하던 내적 생활을 나중에 관상 수도자로 생활하며 성소를 통하여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된다.

유태인으로서 인류사의 비극인 대학살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성녀의 삶은

탁월한 지성과 진리에 대한 들끓는 열정을 후세들에게 본보기로 보여 주고 있다.

 

"사랑하는 어머니, 저는 진정한 평화를 위하여 희생하는 속죄의 행위로써

예수 성심께 제 자신을 봉헌하고자 하오니 어머니의 허락을 청합니다.

이는 가능하다면 또 다른 전쟁의 발발 없이도

반그리스도의 지배가 파괴되고 새로운 질서가 정착되기 위함입니다.

제가 오늘 이러한 청원을 드리는 이유는 벌써 12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요, 교육자이며, 여성론자였고,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관상 수도자이며 순교자였던 이 놀라운 여성을 만나면서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과 함께 삶을 끌어간 그녀의 사상의 줄기를 발견할 수 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유럽의 여자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성녀 3명의 이력

(에디트 슈타인,그리스도교와 유대교 잇는 ’가교’구실) 평화신문에서

 

 

성 에디트 슈타인과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

그리고 스웨덴의 성 비르짓다가 유럽의 여자 수호성인으로 선포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일(1999년10월)유럽 주교 시노드 개막미사에서

“유럽인들은 세 성인의 거룩한 삶과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교가 유럽의 역사 및 문화와 뗄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깨닫기 바란다”며

3명의 성녀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이로써 3명의 성녀는 성 베네딕도, 성 치릴로, 성 메토디오와 함께 유럽의 수호성인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교황은 특히 “비록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교회역사를 이끌어왔지만

이러한 문제점은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며

“교회는 역사를 통해 보여준 여성들의 역할에 대해 충분히 깨닫고 있다”고 수호성인 선포 배경을 설명했다.

 

 

 성녀 에디트 슈타인(1891∼1942)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치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순교한 유대인 출신의 철학자 겸 수도자.

전통적인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녀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여성의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등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며 독일 현대철학의 제일선에서 활약.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 유대인을 증오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유대인을 박해하는 독일인 사이의 화해는 십자가밖에 없다고 판단해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했다.

교황은 1998년 그녀를 시성하면서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민족에게 드리워진 죽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해한 참 그리스도인”이라며

“그녀의 순교는 20세기 유럽사의 극적인 상징이자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잇는 가교”라고

말한 바 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1347∼1380)

그리스도교의 몇 안되는 신비가 중 대가에 속하는 인물.

불과 6살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생애를 미리 내다보는 신비한 체험을 한 후

나환자와 페스트 환자를 돌보고, 교회를 수호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1376년 아비뇽의 교황좌가 로마로 복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교황은 그녀를 ‘용감하며 겸손한 여성’이라고 칭송했다.

1461년에 시성, 1939년에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축일:4월29일.게시판1129번.1738번)

 

 

▲ [15기도]스웨덴의 성녀 비르짓다(1303∼1373)

8남매의 어머니로 남편이 죽은 후 성삼회(비르짓다회) 수도회를 창설하고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수도회 개혁운동을 펼친 인물.

엄격한 생활과 성덕, 가난한 사람과 순례자들에 대한 관심,

그리고 아비뇽에 유배 중이던 교황 클레멘스 6세의 귀환 노력 등이 높게 평가받고 있다.

교황은 가톨릭과 루터교 양측으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그녀를

‘교회 일치의 지주(支柱)’라고 칭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