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성인

8월 7일 성 가예타노 사제

수성구 2022. 8. 7. 05:58

8월 7일 성 가예타노 사제

축일:8월7일

성 가예타노 사제

Saint Cajetan

St. Cajetan of Tienne
San Gaetano Thiene Sacerdote
(Vicenza, ottobre 1480 - Napoli, 7 agosto 1547 )
Born :October 1480 at Vicenza, Italy as Gaetano dei Conti di Tiene
Died :1547 at Naples, Italy
Beatified :8 October 1629 by Pope Urban VIII
Canonized :12 April 1671 by Pope Clement X
Gaetano = nativo di Gaeta, dal latino


 

 

 

1480년 이탈리아의 비첸차에서 태어났다.

파도바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법률가로서 평범한 삶을 살았던 성인은

36세에 서품을 받고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데 일생동안 헌신했다.

 

그는 테아티노회라는 수도회를 설립했는데 이 수도회는 당시의 부패된 교회를 개혁하려는 운동이었다.

베네치아와 나폴리 지방에 이 수도회를 파급 시키는 데 노력했다.

나폴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가예타노도 평범한 삶을 살았으며 처음에는 법률가로서,

후에는 사제로서 로마 교황청에서 일했다.

그는 36 세에 서품을 받고 곧 로마에 있는 하느님 사랑의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했다.

이것은 그의 인생의 커다란 전환이었다.

이 단체는 동정과 자비를 위해 헌신하는 회였다.

그는 42 세 때 베네치아에 불치병 환자를 위한 병원을 세웠다.

비첸차에서는 가장 하류층의 남자들로만 구성된 평판이 나쁜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 때문에 그는 친구들로부터 가문을 손상시킨 사람이라는 노골적인 비난을 받았다.

그는 여러 마을을 다니며 환자와 가난한 이들을 찾아내어 도와주었다.

 

 

그 시대의 가장 큰 요구는 ’책임자와 구성원들’이 병들어 있는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가예타노와 3 명의 동료들은,

개혁의 최선책은 사제의 정신과 열정을 소생시키는 것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함께 테아티노회로 알려진 수도회를 세웠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후에 교황 바오로 4 세가 됨).

최초의 장상인 그들의 주교가 주교좌를 두고 있던 테아테(치에티)에서 테아티노회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들은 칼 5 세가 1527 년 로마를 약탈하는 와중에 로마에 있던 그들의 집이 파괴되자 베네치아로 피신했다.

테아티노회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이 있기 전에 일어난 가톨릭 개혁 운동 중 가장 뛰어난 운동이었다.

그는 나폴리에 몬테 디 피에티(자선 기금)를 설립했다.

이는 많은 자선 단체 가운데 하나로서

저당물을 담보로 돈을 빌려 주는 비영리적 신용 기관 중의 하나이다.

이 기관의 목적은 가난한 사람을 돕고 고리 대금업자들에게서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가예타노의 이 작은 기관은 마침내 정치적인 큰 변화와 더불어 나폴리 은행이 되었다

 

 

 

가스팔 디 티에네 백작과 마리아디 포르토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비첸사에서 세례를 받고, 두 살 때 그의 부친이 전사하는 불운을 안았다.

그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나, 파두아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민법과 교회법의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곧 비첸사의 시의원이 되었고,

1506년에는 로마로 가서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 최초의 공증인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신심 깊은 사제들로 구성된 신애회를 재생시켰다.

1513년, 율리오 교황이 서거하자 자신의 직책을 사임하고, 1516년에 사제로 서품된 후, 비첸사로 돌아왔다.

그는 거기서 성 예로니모의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여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베로나에서 이와 비슷한 회를 창설하였다.

 

1523년, 그는 로마로 가서, 후일 교황 바오로 4세가 된 요한 피에트로 카라파, 바울로 콘시글리에리

그리고 보니파시오 다콜레 등과 함께 교회를 개혁하고, 백성들에게 설교하며, 병자를 돕고,

최악의 경우에서 허덕이던 성직자의 신분을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성직 수도회를 창설하여,1524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승인을 받았다.

 

테아턴회라 부르는 이 수도회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정규 성직자들로 구성하고,

서원을 발하며, 사목직에 종사하였다.

처음에는 그리 성공적이 못되었다.1530년, 가예따노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가예따노의 주요 업적 중의 하나는 전당포의 설립이었다.

후일, 그는 복자 요한 마리노니와 함께 몬테스 피에타티스를 설립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로써 시민들의 복리를 위해 일하였다.

그는 트렌트 공의회 전에 있었던 가톨릭 개혁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인이다.

그는 기도 생활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뛰어났으며,

1547년 8월7일 나폴리에서 운명하였고 1671년에 시성되었다.

 

 

 

 

성 가예따노 사제의 편지에서

(Epist.ad Elisabeth Porto: Studi e Testi 177, Citta del Vaticano 1954, pp.50-51)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죄인이고 내 자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하느님의 뛰어난 종들의 전구에 당신을 맡기고

그들이 당신을 위해 그리스도와 그 모친께 기도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당신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마음에 들게 할 수 있는 것만큼

다른 성도들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열쇠는 당신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사랑해 주시고 도와 주시기를 바란다면,

당신은 먼저 그분을 사랑하고 모든 지향을 언제나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과 피조물이 당신을 버린다 행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필요한 어떤 것이 있을 때

언제나 도와주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승에서 우리는 아직 여행 중에 있는 순례자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교만으로 부풀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바른길에서 벗어나 죽음으로 달려가고 맙니다.

우리는 이땅에 살고 있는 동안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애써야 합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생명을 잃었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 스스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그것을 되찾아 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께 항상 감사 드려야 하고 그분을 사랑해야 하며

그 분께 순명해야 하고 할 수 있는 한 그분과 함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양식으로서 당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렇게도 큰 은총의 선물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우리는 동정 마리아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를 차지 할 영예를 얻었는데 그분을 포기하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불쌍합니다.

나의 딸이여, 내가 내 자신을 위해 하느님께 청하는 것을 당신을 위해서도 간절히 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참으로 얻고자 한다면 하나의 길 밖에 없습니다.

 

동정 마리아께서 그분의 위대한 아드님과 함께 당신께로 오시도록 간청하고 더 나아가

제단의 거룩한 성사에서 영혼의 참된 양식이 되시는 그분의 아드님을 주시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동정 마리아께서는 아드님을 당신께 기꺼이 주실 것이고

또 아드님은 당신을 아주 기쁘게 찾아 주시어 당신은 온갖 원수들이 잠복해 있는

이 어두운 숲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원수들은 우리가 그러한 도움에 의탁하고 있음을 알게 될 때

멀리 떨어져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내 딸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당신의 뜻에 복종하기를 희망하면서 그분께 접근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당신 자신을 주님께 맡기어

주님께서 당신을 맞아들이시고 원하시는 대로 당신을 인도하시도록 하십시오.

나는 이것을 바라고 이것을 권고 합니다.

또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억지로라도 당신이 그렇게 하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만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1962년 첫 회기중에 바로 중지되었다면 교회 성장에 큰 일격이 가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에타노도 트렌트 공의회에 대해 똑같은 느낌을 가졌다.

그러나 가에타노가 말했듯이 하느님은 베네치아에서처럼 나폴리에도 똑같이 계시며,

트렌트 공의회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혹은 제3차 공의회)가 있든 없든 언제 어디서 나 계시다.

 

우리 스스로가 처한 환경이 어떻든 간에 하느님의 전능에 자신을 열어 보이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하느님은 우리와는 다른 성공의 기준을 가지고 계신다.

 

 

가에타노가 자기 수도회를 위한 집을 짓기 위해 나폴리에 파견되었을 때,

어떤 백작이 그에게 토지 소유권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백작이 "나폴리 사람들은 베네치아 사람만큼 풍족하지 않기 때문에 돈이 필요할 것이다."하자

가에타노는 "그 말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두 도시에 똑같이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성인은 1480년 이탈리아의 비첸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근위병 총지휘자였는데 성인이 두 살때에 세상을 떠났다.

어린 두 형제는 성실한 어머니 슬하에서 고이고이 자랐다.

가예타노는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될 결심으로 열심히 공부해 24세에 이미 법학 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는 잠시 교회의 행정관으로 지낸후, 1516년 그의 나이 36세에 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후로는 예전보다 더 열성을 내어 자기 성화에 온 힘을 다했다.

그 이듬해 성탄 절, 그가 말구유 앞에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성모님께서 발현하시어 아기예수를 그의 품에 안겨 주셨다.

그때부터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사양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굳게 했다.

 

1518년에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임종하시는 어머니의 머리맡을 떠나지 않고 시중해 드린 가예타노는

그 후 오랫동안 비첸자에 머물러 있으면서 병자를 돌보기 위한 형제회를 세웠다.

또한 불치의 환자만을 수용하는 요양소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항상 환자들과 지내고자 햇다.

그러다가 장상의 명령대로 베로나에서 베네치아로 옮기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또한 병원을 세우고 손수 그 간호에 종사했다.

그의 친척들은 그런 사업을 대단히 반대하며 그에게 갖은 비난을 퍼부었으나

가예타노는 아무 말도 없이 겸손과 인내로 모든것을 받아들였다.

 

그를 만난 사람, 더욱이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은

그의 독실한 신앙심과 경건한 모습에 감화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실 그가 미사 성제를 올릴 때의 모습은 마치 천국에서 움직이는 성인과 같았으며

그의 강론의 힘은 가장 완고한 죄인이라도 능히 움직일 수 있을 힘을 가졌었다.

 

 

가예타노는 인류의 구원 사업을 더욱 크게 넓히기 위해 성직 수도회를 세울 생각을 하고

이런 일에 매우 신중을 기하고 심사 숙고하여 열심히 하느님의 가르치심만을 구했다.

그러면서 이 계획을 법학 친구에게 말했는데

그 친구는 이를 기뻐하며 격려해 줄 뿐 아니라 제일 먼저 회원이 되어 주었다.

 

그 시대의 유명한 주교 가라파가 이 수도회에 입회한 것은 그 후 얼마 안되어서였다.

이분도 역시 성인이시지만 성격 상으로는 가예타노와 아주 다른 분이었다.

대단한 정력가로서 아무리 활동을 해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 분이며, 대단한 정치적 수완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가예타노에게 있어서는 수도회의 발전상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였다.

 

수도회 설립에 있어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교황의 인가였는데

교황은 새 수도회의 인가를 대단히 주저했으므로 곤란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가예타노를 아는 많은 명망가들의 간절한 청원도 있고 더욱이 가라파 주교의 덕망을 보고

마침내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24년 이 회를 인정했다.

 

 

수도회의 창립자는 가예타노지만 명칭은 테아틴회(Theatines)라 했다.

이는 겸손한 가예타노가 그 회의 초대 총장인 가라파 주교의 거주지인 테아티노를 따서

그 회를 불렀기 때문이다.

가라파 주교 역시 그 회의 창립자인 가예타노를

회의 창립자(사부,師父)로 섬기기를 서슴지 않았던 겸손한 분이었다.

 

회의 목적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병자들을 돌보며

하느님께 대한 흠숭의 예식을 성대히 하며 순명, 정결, 청빈의 서원을 지키며 자신을 성화하는 것이었다.

가예타노는 곳곳에 수도원을 건립하게 되어 각 지방에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되엇다.

 

그럼으로써 가는 곳마다 그의 덕망이 나타났고 그의 열렬한 기도로 때로는 기적도 일어났다.

가예타노는 쟁론을 조정시키는 역할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현명한 재판으로 당사자들을 언제나 감복시켰다.

 

 

이런 성인에게도 고통이 없을 수는 없었다.

1547년 나폴리 지방에 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시민들은

가예타노에게 불의 부당한 비방과 갖은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마침내 중병에 걸리게 되었고 담당 의사의 모든 치료에도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동료들은 다른 의사를 또 초청하려고 했으나 이 말을 들은 가예타노는

"저같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의사 한 분 이면 충부합니다"하며 거절했다.

 

그는 병 중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편안함을 찾지 않았다. 오직 열렬한 마음으로 성체를 영하고,

동료들에게는 자기의 부덕함을 깊이 사과하고

그들의 후의(厚意)를 감사하며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때는 1547년 8월 7일이었다.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 전에 있었던 가톨릭 개혁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인으로 1671년에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