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하느님의 일, 사람의 일

수성구 2022. 8. 4. 06:12

하느님의 일, 사람의 일

 

예레 31,31-34; 마태 16,13-23 /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2022.8.4.

 

  십자가로 인한 구원의 섭리는 우연히 일어난 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어쩌다가 궁지에 몰린 개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일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경륜에 비추어 보면, 그 첫 고리로 택하신 이스라엘이 그 소명을 외면했을 때 인류 전체의 복음화와 세상의 완성을 이루시려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실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섭리가 바로 예수님께서 짊어지셔야 했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예수의 강생과 부활은 십자가로 인한 이 구원 섭리를 위한 준비요 결과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소명을 외면한 채 어깃장 놓고 있던 그 무렵에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래도 하느님께서 그들이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심을 알렸고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31,33). 

 

  하지만 그 후 바빌론 유배와 귀환 후 4백 년 넘는 세월이 흘러서야 예레미야의 이 예언이 예수님에 의해서 실현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예레 31,31). 그러나 이 ‘새 계약’은 종살이하던 이집트 땅에서 해방될 때에 맺었던 옛 계약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에 속한 유다인들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내다본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고, 둘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나 풍요로운 자손의 축복 같이 하느님을 믿어서 현세에서 얻을 수 있는 영광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의 내세에서 얻어 누릴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며, 셋째 더욱 결정적으로는 하느님을 믿기만 하면 마치 철부지 어린이를 보호하는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일방적으로 보호하는 유아기적 축복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련과 문제를 직면하여 맞갖은 수고와 희생을 치룸으로써 더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갈 줄 아는 성숙한 축복을 조건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이것이 메시아 백성으로서 십자가로 부활하겠다는 계약입니다. 또한 현세에서 위세를 떨치는 메시아 백성이 아니라 내세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품고 그 품위를 현세에 침투시키는 고난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계약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메시아 백성답게 자신의 힘으로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메시아의 현존 안에서 성령의 이끄심으로 이 십자가와 부활 또한 현세의 천상적 변화를 감당하겠다고 다짐하는 계약입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살과 피로 맺은 새롭고 영원한 계약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한 의무로 주어져 있는 성체성사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에 앞서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아보았기에 수제자로서 천국의 열쇠를 받을 수 있었지만 십자가의 의미를 미처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꼭 붙들고 그분의 수난을 만류하러 들었습니다. 수제자가 된 처지에서 스승에 대한 인간적인 충성심의 발로였을 것입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하지만 베드로의 이 충성스런 반응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의외로 호된 꾸지람을 치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오늘날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면서도 부활의 영광과 그에 따르는 현세적 은총과 행운만 그리워할 뿐 십자가의 아픔과 고뇌와 시련에 대해서는 한사코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이 베드로가 대변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하느님을 모르고 자신의 욕심대로 살고자 하는 끈질긴 속성을 말합니다. 몸이 편하고자 하고 남을 누르고자 하며 누군가에게 기대려고 하는 원죄적 경향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을 넘어선 하느님의 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더욱 결정적으로는 부활과 그 후 성령으로 인한 현존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일을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수백 년에 걸친 로마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과 진리로 증거하여 인류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넘겨진 복음 진리가 우여곡절의 과정과 오묘한 섭리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전해져서 오늘날 이렇듯 번듯하게 한국교회가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한국이 식민통치와 전쟁과 독재의 질곡에서도 서구화를 수행하여 우뚝 서게 된 것 이상으로, 교회의 2천 년 본산인 유럽교회를 잘 따라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범적으로 진행된 서구화 작업의 결과로 오늘날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는 눈이 감기는 바람에 신앙이 침체된 유럽교회의 복음적 둔감성까지 따라 배운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미래가 어두운 유럽교회의 아류(亞流)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을 모른 척하고 사람의 일만을 앞세우려는 이 속성과 경향은 노화의 특징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알아보지 못하고 복음화를 두려워하며 십자가를 멀리하려는 복음적 둔감성에서 떨쳐 일어나서, 부활과 성령 현존에 민감한 모습으로 살아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