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자연 현상, 역사 현상 그리고 기적

수성구 2022. 8. 2. 05:54

자연 현상, 역사 현상 그리고 기적

예레 20,1-22; 마태 14,22-36 /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2022.8.2.; 이기우 신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각각에 맞는 본성을 부여하셨습니다. 자연의 물질이 보여주는 일정한 질서와 현상이 그래서 생겨난 것이고, 생명체 중에서도 식물과 동물 역시 일정한 자율성이 있지만 스스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에게서만 하느님께서는 자유라는 본성을 허락하셨습니다. 당신을 닮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 자유의 특성은 피조물의 본성을 관찰하여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등 각종 학문을 발달시키기도 했고, 문명을 떠받치는 온갖 기술과 발명품으로 인간의 삶과 복지를 향상시키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 학문과 기술과 그 복합체인 사회 체제에서 생겨난 정치 공학적 관행과 경제 공학적 산물을 사용함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도 있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예언자들을 보내서 알려주셨습니다. 예레미야도 예언자로서 하느님에게서 전해 받은 뜻을 전하기를,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그 행위가 죄악이 되고 허물이 되는 것이며, 하느님의 뜻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주님이 되시도록 정치와 경제의 질서를 이룩하는 것임을 알려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결정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가르침과 동시에 모범을 보여주시기도 하여,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자기 마음대로 하고자 하지만 사실은 사탄의 유혹과 계략에 빠져 악을 저지르게 되는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주의 기도’ 후반부에 있는 맨 마지막 두 가지의 청원기도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유를 선용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시고자 예수님께서는 종종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치유와 구마의 기적은 물론 빵의 기적과 물 위를 걷는 기적도 그래서 일으키신 하나의 표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 앞에서나 제자들에게 일으키신 그 많은 기적들이 하나같이 겨냥하는 목표가 있었으니, 그것은 자유라는 본성을 부여받은 인간이 그 자유를 믿음으로 선용하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믿음만은 인간 자유에 내재된 고유한 영역으로서 하느님께서도 인간에게 강제적으로 부여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뜻하셨던 대로 기적을 체험한 인간이 가까스로 믿음을 갖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놀라시면서도 기뻐하셨고, 그것이야말로 그분이 체험하시는 또 다른 기적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자유를 선용하게 된 인간은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 하느님의 권능을 인정합니다. 세상의 본성인 자연 법칙은 물론, 사람들이 욕망에 이끌려 모이고 흩어지고 분열하는 역사 법칙조차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도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모습을 보여주신 숨은 뜻입니다. 

 

  사실 그 기적은 일부러 보여주시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홀로 기도하시려고 저녁 늦은 시간부터 새벽 시간까지 산에 계시던 예수님께서 기도 중에 제자들이 위험에 빠졌음을 감지하셨습니다. 그래서 급히 제자들을 도우러 가시느라고 호수 위를 걸어서 가시게 되었던 사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본 제자들은 두려워 소리를 질러 냈지만, 베드로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자신도 물 위를 걷고 싶어 했습니다. 물 위를 걷게 된 베드로는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예수님의 모습을 놓쳤고 그 결과 두려워졌습니다. 그의 발이 물에 빠져들기 시작한 때는 그 때부터였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보고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를 비롯해서 많은 예언자들 역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을 향해서 외쳤던 그 많은 예언의 목소리 역시,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믿지 못하느냐?”입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리라”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왜 믿지 못하느냐 하고 질책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예레미야뿐만 아니라 모든 예언자들이 공통적으로 받들었고 또 전해주었던 기본 메시지입니다. 정치와 경제의 영역에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책임을 수행한 그 많은 엘리트들이 자유를 행사하되 하느님께 향한 믿음으로 선용하여 행사했었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그 많은 불행과 비극이 있었습니다. 그네들은 그러기보다는 하느님 종교의 권위를 자신의 왕권과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요 방패로만 썼으므로 결과적으로 악용한 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네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백성 안에서 명성이 높아지는 모습을 보고 회개하기는커녕 그분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는 마태오의 기록은 이를 읽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그분처럼 자유를 믿음으로 선용하라는 강력한 촉구 메시지입니다. 자유를 믿음으로 선용해야 우리네 실존도, 인류 문명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기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