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밀과 가라지, 리더십의 지혜

수성구 2022. 7. 23. 03:59

밀과 가라지, 리더십의 지혜

 

예레 7,1-11; 마태 13,24-30 /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2022.7.23.; 이기우 신부

 

  이스라엘의 히브리 문명권에서 태어난 복음과 그리스도 신앙이 당시 처음으로 맞닥뜨린 서방 이방인 문명권에 얼추 퍼졌을 무렵인 서기 1세기 경에, 사도 바오로로부터 이 신앙의 정수를 전수받은 그 제자들이 스승의 이름으로 히브리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문명의 경계를 넘어선 진리를 정리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오늘 복음에 나온 ‘밀과 가라지의 비유’도 하느님 말씀의 지혜 중 대표적인 하나입니다. 보통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하느님 나라의 행동을 먼저 보여주신 다음에 그 뜻을 풀이해 주셨는데, 이 비유는 특정 행동이 아니라 당신 삶의 전반을 해석해 주시느라고 말씀하신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는데 그 가운데에 가라지에 해당된 자들도 많았습니다. 당신 제자들이 당신의 뒤를 이어 복음을 선포할 때에도 이 현실은 어김없이 되풀이될 것이기에 교훈 삼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백성을 위한 ‘밀과 가라지 비유’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 등 사회적 약자를 돌보라시던 하느님의 뜻은 소홀히하면서, 심지어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는가 하면, 바알 신에게 분향하며 우상숭배를 버젓이 자행하면서도 하느님의 축복을 기대하던 당시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그는 주님의 이름으로 경고하였습니다: “너희 길을 바꾸고 행실을 고쳐라.” 

 

  하지만 옛 하느님 백성은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그래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었던 소수 아나빔들을 주축으로 하느님께서는 새 하느님 백성을 모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교회였는데, 이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을 그리스도교화시키는가 싶더니 어이없게도 교회가 로마화되어 유럽 대륙에 그리스도교 문명을 세우게 되었는데도 이교도들의 문명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동서방 교회가 다투다가 갈라섰고, 이슬람 문명의 침공을 막아보겠다고 교회 스스로 십자가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퇴하는 바람에 신앙과 교회의 도덕적 권위가 추락했으며, 그 여파로 서방 교회 안에서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나뉘어졌고, 산업혁명으로 노동자들이 대량으로 가난해지게 되었을 무렵이나 시민혁명으로 시민들이 왕족과 귀족들로부터 유린되던 인권을 옹호하고자 일어섰을 무렵에 이들 세력을 단죄함으로써 근세 시민사회로부터나 노동자 대중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하게 된 사태 등이 그러합니다.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자율적 성장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그 가운데 밀과 가라지를 식별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함으로써 고립 사태는 더 심화되고 말았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올 당시에도 조선 왕조와 유림들의 리더십 역시 영락없는 가라지 꼴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견딜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하느님의 도우심과 신자들의 굳건한 믿음도 작용했지만, 당시 사회의 강자들이 자행했던 제도적 폭력이 워낙 끔찍했던 탓도 작용했었습니다. 그래서 출신 신분에 상관없이 천주교 신자들은 항복이나 다름없는 배교를 하여 그 지옥 같은 사회구조 속으로 들어가느니 차라리 치명하여 하늘을 보며 천당에 가겠노라고 고백하며 죽어갔던 것입니다. 

 

  이제 박해가 종식되고 하느님 백성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마음껏 세울 수 있는 시대가 되었어도 가라지들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밀과 가라지 비유에 담긴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이 비유에 담긴 말씀의 지혜가 가라지들의 존재와 활약에도 불구하고 밀을 보호하고 키우는 내공과 영성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선을 상주시고 악을 벌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최후의 순간에 가서만 심판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밀과 가라지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공존하는 그 과정에서도 어김없이 심판을 하고 계십니다. 

 

  밀과 가라지는 세상 현실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우리 내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자랍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심판주 하느님을 굳게 믿으면 우리 마음 안에 일어나는 갈등과 의심을 가라지로 알아볼 수 있고,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밀당’ 역시 가라지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반대자와 방해꾼들의 시기와 질투와 모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심판주이신 하느님께 가라지의 처분을 내어 맡겨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대신에 우리가 정작 신경을 써서 노력해야 할 것은, 우리 안의 초심을 유지하려 애쓰고, 하느님과 공동의 선을 키우는 밀 농사에 집중하는 일입니다. 가라지 처분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우리 안의 밀을 키우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세상이 짊어지워주는 십자가를 부활로 오르는 사다리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진정한 수련입니다.

 

  십자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생애 자체로 말씀하신 메시지가 바로 밀과 가라지의 비유로 풀이되는 리더십의 지혜요 영성이며 내공입니다. 이 리더십의 지혜와 영성과 내공을 살아가는 이들의 작은 공동체들이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룩하시려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