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여인아, 왜 우느냐?

수성구 2022. 7. 22. 06:07

여인아, 왜 우느냐?

 

아가 3,1-4; 요한 20,1-18 /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2022.7.22.(금)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일곱 마귀를 달고 살던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루카 8,2). 그분 덕분에 일곱 마귀가 쫓겨나가는 극적인 체험을 한 후 막달레나는 그제껏 어두웠던 삶을 청산하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의 시중을 들어드리는 데에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막달레나는 여느 제자에 못지않게 그분의 가르침을 잘 알았으므로 그분께 대해서도 지극한 정성으로 충실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제자’입니다.

 

  남성 제자들이 스승을 버리고 도망쳤을 때에도 그분이 돌아가시던 십자가 밑에 남아 있다가(마태 27,56) 무덤까지 지켰습니다(마태 27,61).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때가 안식일이 시작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돌무덤에 급히 모시고 나서 그는 안식일이 지난 일요일 새벽에 시신에 향료라도 발라드리려고 무덤을 찾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뵈올 수 있었던 증인이 될 수 있었고(요한 20,11-16) 겁에 질려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그분의 부활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준, ‘또 다른 사도’까지 되었습니다(요한 20,15).

 

  그래서 교회 전례력으로도 사도들과 똑같은 예우로써 축일로 지냅니다. 강생의 신비에 있어서 유일한 증인은 성모 마리아이시지만, 막달레나는 부활의 첫 증인인 것만 보아도 이 축일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축일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의 중요성입니다. 사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옵기 전에도 부활의 은총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막달레나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건넨 첫 마디 말씀은, “여인아, 왜 우느냐?”였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차림으로 보아 정원지기인가보다 하고 짐작했을 따름입니다. 그분의 음색이 담긴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비로소 막달레나는 이전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마치 아가에 나오는 신부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니며 밤새도록 허탕을 치고, 성읍의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면서도 헛수고를 되풀이하다가, 야경꾼을 지나치자마자 겨우 찾은 바로 그 심정과도 같았습니다. 

 

  이와 똑같은 간절한 심정으로 우리의 역사와 현실을 찾아보자면, “여인아, 왜 우느냐?” 하시던 예수님의 물음이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확인합니다. 본래는 역사적으로 한민족은 초창기부터 제천의식(祭天儀式)과 천손의식(天孫意識)으로 하느님을 믿어온 특별한 집단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받들어 알아낸 뜻이 모두가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것이었기에, 우리 조상들은 환인 즉 하느님뿐만 아니라 환웅을 강림신(降臨神)으로, 곰 토템족 여족장을 지모신(地母神)으로,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왕검을 인신(人神)으로 공경해 왔으며, 이 삼신적 신관에서 유래한 천손의식은 모두가 하느님의 자손으로서 귀하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히브리 민족의 선민의식이 배타적이고 편협했던 데 비해, 또 중국 민족이 천자와 백성을 차별했던 데 비하면 대단히 선진적인 평등사상이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런 삼신적 신관은 상고 시대의 어느 민족의 자연신관보다 탁월했으나 하느님과 인간의 구분이 모호한 채로 민간 사이에서 특히 여성들을 통해 도도한 지하저류처럼 무려 4천 년 동안 흘러왔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부부유별(夫婦有別)을 강조하는 유학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이 마치 종교처럼 자리잡으면서 단순히 남녀를 구별하는 정도를 넘어서 차별하는 질서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이래로 이 땅의 여성들은 2등 인간의 질곡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계시된 신관인 그리스도 신앙이 들어와 삼위일체 도리를 알게 되면서 비로소 올바른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또한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남녀를 동등하게 존엄한 인격체로 대하셨다는 그리스도 신앙의 기본 진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천주교 교리는 신(神)에 관한 진리에 있어서 종교적 복음이었을 뿐만 아니라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질곡에서 살던 여성들에게는 사회적 복음이었습니다. 

 

  여성은 여성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인격을 실현합니다. 여성의 인격이란 남성의 인격을 보완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온전하게 성화시키려는 하느님의 계획의 후반이요 결론입니다. 따라서 여성은 남성을 선으로 그리고 또한 인간 전체를 하느님 계획에로 이끌어 갈 동반자적 직책과 사명을 받고 있습니다(평신도 의안 중 가톨릭 여성 특별의안, 5항). 사회 안에서 여성에게 큰 역할이 맡겨져 있는 가정 사도직은 사회 사도직의 원형인 바, 여성 평신도들은 자신의 가정을 선교와 대화와 봉사의 공동체로 육성해야 할 사명을 띠고 있습니다(9항). 또한 여성 수도자들은 이 교회의 소중한 문화와 전통은 물론 앞으로 다가올 민족 복음화의 소명과 전망도 간직한 예언자가 되어야 하는(수도자 의안, 30,36항)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양성 평등의 문제가 여전히 뜨거운 현안으로 남아 있는 오늘날, 사도들의 사도로 추앙받고 있는 막달레나 성녀처럼, 여성들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소명을 다하고 또 그 역할이 존중받게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