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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성 가밀로 데 렐리스 사제

수성구 2022. 7. 14. 06:15

7월 14일 성 가밀로 데 렐리스 사제

축일;7월 14일

성 가밀로 데 렐리스 사제

San Camillo de Lellis Sacerdote

St. Camillus de Lellis, C

(Bucchianico (Chieti), 25 maggio 1550 - Roma, 14 luglio 1614)
Born:1550 at Bocchiavico, Abruzzi, kingdom of Naples, Italy
Died :14 July 1614 at Genoa, Italy
Beatified :7 April 1742 by Pope Benedict XIV
Canonized :1746 by Pope Benedict XIV

창설자.병자들의 수호 성인.간호원과 간호 단체의 수호자.

 

 

 

병자들의 봉사자회인 가밀로회의 창설자이신 성 가밀로 데 렐리스는 (1550-1614년)

이탈리아의 복치아니코 출신으로 군인이었다.

그는 터키인을 대항했던 베네치아 전투에 참가했으며,

심한 도박 증세를 이기지 못해 무일푼의 신세로 나폴리 거리를 배회한 사실도 있는 사람이다.

몸이 건강하고 성미가 급했던 그는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없던 중

우연한 기회에 설교를 듣고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려고 했지만 다리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을 극복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병자들을 돌보는 봉사자가 되는데,

이 때에 성 필립보 네리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사제가 되었으며,

마침내 병원 사목을 전담하는 수도회를 창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성인은 죽는 날까지 환자들을 돌보는 헌신적인 삶을 살았는데,

1746년에 시성되었으며, 레오 13세에 의하여 병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언되어 큰 공경을 받고 계신다.

비오 11세는 가밀로 성인을 간호원과 간호 단체의 수호자로 선언하였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어떤 동료가 쓴 [성 가밀로의 생애]에서

(S. Cicatelli, Vita del P. Camillo de Lellis, Viterbo, 1615)

 

형제들 안에서 주님을 섬겼다

 

모든 덕행의 뿌리인 거룩한 애덕부터 시작해 보겠다.

이 덕행은 성 가밀로에게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덕행이었다.

가밀로는 이 거룩한 덕행으로 불타 올라 하느님만 아니라 이웃도, 특히 병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였다.

병자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은 녹아 버리어 세상의 온갖 쾌락과 기쁨을 완전히 잊어버리곤 했다.

환자들을 간호해 줄 때 사랑과 동정심으로 자신을 모두 불살라 버리는 것 같았고,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그들의 병세가 호전되도록  그들의 온갖 질병과 고통을 자기가 기꺼이 짊어지고 싶어했다.

 

가밀로는 환자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을 공경하였다.

그래서 음식을 날라다 줄 때 환자들이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생각하고는

그들에게서 은총과 죄 사함을 청하곤 했다.

자신이 진실로 주님의 면전에 서 있는 듯 환자들을 공경했다.

거룩한 애덕보다 더 자주 더 열렬히 이야기한 것은 없었다.

그는 이 덕행이 모든 이의 마음에 깊이 뿌리박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자기 수도회의 형제들이 이 거룩한 덕행으로 불타 오르도록

그들에게 감미로운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기시키곤 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너희는 나를 돌보아 주었다."

이 말씀을 너무도 자주 반복하였으므로, 그것이 흡사 그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가밀로의 애덕은 이렇게도 넓게 펼쳐지어 환자들과 임종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들에게도 긍율과 동정심을 보여 주었다.

그의 마음은 어려운 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늘 이렇게 말했다.

"이 지상에서 불쌍한 사람을 하나도 찾을 수 없다면,

그들을 도와주고 자비를 베풀 수 있도록 땅속까지 파들어가, 거기에서라도 그들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가톨릭홈에서)

 

 

인간의 기준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카밀로는 정말 성인이 될 만 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소홀했으며,

따라서 그는 도박에 지나친 애착을 품은 채 성장했다.

17세에 그는 다리의 질병을 앓게 되었으며 그것은 일생 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로마에 있는 불치병자를 위한 성야고보 병원의 환자이면서 동시에 하인으로 들어갔으나,

싸우기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9개월 만에 해고당하고 3년 동안 베니스 군대를 복무했다.

1574년, 25세 되던 해 겨울, 자기가 가진 모든 것-저축한 돈, 무기, 말그대로 그의 옷에 이르기까지-을

도박으로 날려버린 그는 만프레도니아의 카푸친 수도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수도원장의 설교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때까지의 생활을 청산했다.

그는 카푸친 수도원의 수련생으로 들어갔으나, 불치의 다리 질환이 재발되어 퇴회하고 말았다.

성야고보 병원에서 한동안 치료를 받은 후 다시 카푸친 수도원으로 되돌아왔으나,

똑같은 이유로 다시 퇴회하게 되었다.

성야고보 병원으로 다시 돌아와 감독자가 됨으로써 그의 헌신은 보상받게 되었다.

1746년에 성인품에 올랐고 1886년에 천주의 성 요한과 더불어 병원,간호원,병자의수호 성인이 되었다.

 

그는 친구인 성필립보네리의 충고에 따라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했고 35세에 서품을 받았다.

 

 

 

 

그는 친구의 충고를 마다하고 성야고보 병원을 떠나 자기 스스로 단체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감독자로서 자신의 모든 시간을 환자를 돌보는 데 바쳤다.

그의 첫째 관심사는 자선 행위였으나,병원의 물질적인 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의 기술적 능력과 청결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의 단체 회원들은 각 가정의 죽어가는 사람들과

페스트에 감염된 사람들과 죄인들을 돌보려고 자진해서 일했다.

 

그의 회원 중 몇 사람은 1595년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전쟁 때엔 나폴리에서 그와 회원들은

페스트 환자를 실은 배로 달려갔으나 그들을 하선 시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산 채로 매장되는 것을 보고는 회원들에게 죽음이 확실하게 판명된 뒤에도

15분 동안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했다.

그는 일생 동안 다리 질환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마지막 고통중에서도 자신의 침대를 떠나

병원의 다른 환자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어떤지를 알아보고자 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인들은 하느님이 만드신다.

부모는 자기 자녀에게 신앙심을 키워 주어야 하고,

부부는 세례의 은총을 깊게 하기 위해 서로 협동해야 하며, 친구들은 서로서로 도와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노력은 다만 하느님의 섭리에 따를 뿐이다.

우리 모두는 마치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권능만이 하느님의 계획을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당신 자신과 같이 만드는 계획이다.

 

 

병자들의 간호를 목적으로 세워진 수도회는 현대에 와서 상당한 수에 달하고 있으나

그 발달은 비교적 근대의 일이다.

물론 병자를 도와주는 것은 주님께서 명하신 일곱 가지 자선 사업중의 하나다.

 

그러므로 옛부터 교회에서는 이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오로지 이런 목적 아래 수도원이 창설된 것은 16세기에 이르러

성 가밀로가 주님의 특별한 성소로 수도회를 창립함으로써 그 시초가 된 것이다.

 

가밀로는 1550년 5월 25일 이탈리아의 키에티 근처에서 태어났다.

생후 얼마 안 되어 어머니가 사망하고 6세때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기초 교육도 받지 못하게 되어 노름으로 소일하게 되고 한때는 도박에 미치기도 했다.

 

그가 19세때 이탈리아와 투르크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물론 그도 일개의 졸병으로서 출정했다.

군인이 된 후에도 악습을 버릴 줄 모르고 그는 받은 봉급으로

친구와 도박을 하다가 결국 옷마저 뺏겨 버린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전쟁에서 중상을 입어 제대는 했으나 여비가 없었으므로

거지 행세를 하며 로마까지 겨우 와서 성 야고보 병원에 입원했다.

사람들은 그의 방종한 생활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의 상처가 조금 치유되자마자 퇴원시켜 버렸다.

 

그러부터 직장이 없는 가밀로의 생활은 형편없이 되어 남 이탈리아에 있는 만프레도니아에까지 방랑했다.

마침 그곳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공사가 있었으므로

건축재를 운반하는 마차꾼으로서 겨우 입에 풀칠을 했다.

 

 

수도원장은 그를 보통 청년이 아닌 것으로 보았음인지 어느 날 그를 다정하게 타일러 주었다.

가밀로에게도 양심은 있었는지라 마침내 모든 죄를 통회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수련을 받고,

성 프란치스코의 뒤를 이어 성스러운 사람이 되고자 노력을 하던 중,

불행히도 전에 입은 상처가 재발되어 몸이 매우 허약해져 자연히 수도원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성 야고보 병원을 찾아가 상처의 치료를 받는 한편 병자들도 간호해 주었다.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돌변한 태도와 경건한 모습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가밀로는 병자를 간호하던 중에 이에 대한 취미를 갖게 되었고, 이런 사업에 일생을 바칠 결심을 했다.

그런 그의 눈에 몇몇 간호사들은 금전에 팔려 움직이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고

이런 것은 그의 성미에 맞이 않았다.

그는 오직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취지 아래 간호 수도회를 창설할 생각을 하고

그 병원에 있는 몇몇 간호사에게 그 취지를 말하여 4,5명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반대했다.

그래서 4,5명의 동지와 더불어 병원을 떠나 티베르 강변에 있는 한 빈민촌에

작은 수도원을 설립하고 각 가정을 방문하며 정성껏 환자를 돌보아 주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육신만을 구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영혼도 구해 주지 않으면 이는 마치 사람을 그려 놓고 눈동자를 그리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영혼 구원을 위해서는 신부가 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뜻에서 친구인 성 필립보 네리의 충고에 따라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했고 34세에 서품을 받았다.

 

가밀로 수도회가 지향하는 목표는 다른 수도회와 마찬가지로 청빈, 순명, 정결이며,

그 외에 한 가지 더 서원할 것은 어떠한 환자도 가리지 않고 정성으로 간호해 준다는 것이다.

이 회직은 1586년 교황 식스토 5세의 허가를 얻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페스트가 유행했다.

그럴 때마다 가밀로 회원들은 각지에서 그 무서운 환자들을 친절을 다해 치료해 주었으므로

이를 보는 사람마다 감탄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정부에서까지 그들에게 감사장을 보내 줄 정도였다.

 

"저 사람 품에서 죽으면 지옥은 안 간다"고 하며 사후를 두려워하는 죄인들은 앞을 다투어 가밀로를 초청했다.

페스트가 무섭게 만연된 때에는 수사들도 그 병에 감염되어 박애의 천사로서 희생되곤 했다.

 

가밀로 수도회 제5차 총회 때 그는 총장직을 사임하고 여생을 평수사로 지내다가 큰 사명을 띠고

북 이탈리아 지방 수도회를 순시하던 도중 중병으로 쓰러졌다.

그는 "나는 로마에서 죽고 싶다"고 원해 다시 로마에귀환하게 되었고,

의사의 진단 결과 다시 회복할 수 없음을 알자

"주님의 집에 가자할 때, 나는 몹시도 기뻤다"(시편 122,1)고 대답했다.

 

그는 1614년 7월 14일에 세상을 떠났으며,1746년에 시성되었고,

1886년에 레오 13세에 의해 천주의 성 요한과 함께 병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언되었고,

비오 11세로부터는 간호사와 간호 단체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