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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

수성구 2022. 7. 14. 06:10

7월 14일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

축일:7월14일

성 프란치스코 솔라노

ST. FRANCIS SOLANO

St. Francis Solanus

San Francesco Solano

10 March 1549 at Montilla, diocese of Cordova, Andalusia, Spain

- 14 July 1610 at Lima, Peru of natural causes

Beatified:20 June 1675 by Pope Clement X

Canonized:27 December 1726 by Pope Benedict XIII

Francesco = libero, dall’antico tedesco = free, from the ancient German

 

프란치스코 솔라노(1549 - 1610)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몬틸라에서 지체높고 독실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예수회의 지도로 교육을 받은 후 20 살 되던 해 작은형제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사제로서 설교와 가난한 환자를 보살피는 데 온 정성을 다 바쳤다.

그의 거룩하고 열성적인 삶의 모습은 모든이에게 감명을 주었다.

 

한편 그는 아프리카 선교를 지망했으나 남미 선교의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투쿠만 관구, 그란구아이 관구, 차코 관구 등에서 선교했다.

인디안 풍속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인디안에 대한 크나큰 사랑

그리고 음악을 사용한 점 등은 그가 복음을 전파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도움이 되었다.

 

12 년간을 인디안에 대한 설교가로 활약하고

생애의 마지막 8년간은 페루의 리마에서 사회와 윤리를 개선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였다.

그는 사부 프란치스코처럼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연도 복종시켰으며

자신이 공경하는 수호성인인 보나벤투라 축일에 천상 생활을 시작하였다.

 

 

 

             

Saint Francis Solano:

Wonder-Worker of the New World and Apostle of Argentina and Peru

 

프란치스코는 1549년 스페인의 Cordoba에서 가까운 Montilla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20세가 되던 해 그는 Granada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이 수도원은 총봉사자 Francisco Quinoes에 의해 세워진 Recollection 수도원들 중 하나였다.

프란치스코는 Seville의 수도원에서 공부를 하였고, 1576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의 첫 번째 소임은 수련장이었다. 그는 그 때 Sierra Morena에 있는 수도원 수호자(원장)직을 수행하였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역병의 희생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였다.

그 후 그는 설교가가 되어 병자들과 죄수들을 위해 일하는 데 온힘을 다하였다.

 

해외 선교의 소명을 느낀 그는 아프리카로 갈 허락을 청하였지만 아프리카가 아니라 남미로 파견되었다.

1589년 2월 28일 그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Sanlucar di Barranmeda를 떠나 남미로 향하였다.

이 형제들은 대서양을 건너 콜롬비아의 Cartagena에 도착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걸어서 파나마 지협을 건너 남쪽 페루를 향해 여정을 계속하였다.

바다를 건너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위험스런 일이었다.

그는 심한 폭풍으로 인해 태평양의 외딴 섬에서 난파되었다.

형제들은 어떤 배를 만나 여행을 계속하여 페루의 Paita에 도착하였다.

 

프란치스코는 Lima로 계속해서 내려갔다.

그의 원장은 그를 파라과이의 Tucuman과 북 아르헨티나로 보냈다.

그는 1590년 이들 지역에 도착하였다.

그는 스페인의 정복자들에 대항해서 인디오들의 권리를 충실하게 변호해 주는 사람이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종종 원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해 가고 그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1592년 프란치스코는 Tucuman 선교단의 수호자(Custos)로 임명되었다.

그는 리마의 수도원 수호자로 되돌아갈 때인 1595년까지 이 선교단에서 일하였다.

그는 늘 설교하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착취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예언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608년 그의 건강이 아주 나빠져서 리마에 있는 요양소에 입원하였다.

프란치스코는 1610년 7월 14일 리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클레멘스 5세는 1675년 프란치스코 솔라노를 복자품에 올렸고, 베네딕도 8세가 1726넌 그를 시성하였다

(작은형제회홈에서)

  

 

 

 

 

Legend of St Francis: 11.

St Francis before the Sultan (Trial by Fire)-GIOTTO di Bondone

1297-1300. Fresco, 270 x 230 cm.  Upper Church, San Francesco, Assisi

 

간추린 프란치스칸 영성  

복음적 그리스도 중심적 영성|사도적 선교적 영성|작음과 형제애의 영성

 

사도적 선교적 영성

프란치스칸 영성의 두번째 측면은 사도적이고 선교적인 영성이라는 것이다.

생활양식 자체가 복음서의 예수와 사도들의 삶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 모든 계층의 크리스챤에게 개방된 영성  

2. 교회 안에서의 영성

3. 삶의 영성  

4. 선교적 영성

 

선교적 영성

교회 안에서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도록 불리움받은 작은 형제들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인 선교에로 열려있기 마련이다.

프란치스꼬 역시 초기부터 이러한 선교적 열정에 북받쳐 수차례에 걸쳐 선교여행을 떠났으며,

순교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특별히 당시 그리스도교와 가장 적대적이었던 이슬람교도들을 한 형제로 받아들이고

화해의 사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코자 하였다.

그 결과 성지탈환의 이유로 십자군 전쟁이 수차례에 걸쳐 일어나고 있던 상황에 그는

동방으로 건너가 홀몸으로 이슬람의 술탄을 만나 평화와 화해의 정신으로 한 형제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성지 이스라엘은 작은 형제들의 배타적인 선교지로 사도좌는 인정하고 있고,

회교도들도 작은 형제들만을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대표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사부요 스승의 선교적 모범은 작은 형제들의 마음과 역사 안에서 늘 살아 숨쉬고 있다.

이러한 선교적 열정의 덕분으로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그리스도교와 프란치스카니즘을 심어왔고

또 오늘날에도 아프리카, 러시아, 중국, 태국 등 선교 프로젝트들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프란치스칸 성소는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14th Station - The Way of the Cross in Jerusalem

  

 

 

프란치스코 회원인 그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에서 태어났고, 1589년에 페루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가 타고가던 배가 폭풍우를 만나 포기해야 했으나,

그는 몇몇 흑인 노예들과 함께 끝까지 배를 지키려고 하였는데,

결국에는 그 노예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지는 경험을 하였다.

 

그는 남 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을 다니며 인디안들 가운데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으나,

어떤 유럽 성집자답지 않게, 각 지방의 토착 언어를 열심히 배웠으므로,

그는 언어의 특은을 입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604년, 그는 리마의 어느 시장에서 그 도시의 부패상을 폭로하는 설교를 하였는데,

그 설교가 너무나 강력하였으므로 주민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시당국은 그 지바의 대주교에게 공식 항의하였고, 그는 군중들을 진정시켜야 하였다.

 

그는 죽을 때까지 거의 20년 동안 인디안과 스페인 정복자 사이를 오가며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여 훌륭한 수도자의 상을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필립 4, 4) 하신 성 바오로의 말씀과 같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기쁘게 찬미가를 부르며 하느님의 덕을 찬미했다.

그래서 "명랑한 주님의 가수"라는 별명까지 있었다.

그러면 그 영적(靈的) 자손에 해당하는 프란치스코회원들 중에

다소라도 그와 같이 명랑한 이가 있다는 것은 지당한 일인데,

그 중에서도 사부(師父)와 같은 이름을 지닌 성 솔리노 수사야말로

그 명랑한 성격면에 있어 아시시의 성자와 극히 닮은 바가 있었다.

 

그는 1549년에 스페인의 알달루시아에서 태어났다.

그 양친은 물질적으로는 그리 혜택을 받지는 못했었으나,

 영신적으로는 매우 풍부한 덕을 지닌 경건한 분들이었다.

그의 장남인 솔라노는 어려서부터 주님의 총애를 받은 아이였다.

그 일례를 들어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두사람이 서로 싸우다 결국 칼을 빼어 결투를 하게끔 되었다.

이것을 본 솔라노는 그들 사이에 끼어 들어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도 원수를 용서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아저씨들도 서로 참고 서로 나쁜 것을 용서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아저씨들도 서로 참고 서로 나쁜 것을 용서해 주면 되자 않아요?"하고 반울음으로 말했다.

 

아무리 혈안이 된 그들이라도 상대자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란 것과,

그리고 그들의 어른답지 못한 태도를 어린아이 앞에 보인 것이 부끄러웠던지,

그들은 칼을 던져 버리고는 서로 화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청년이 된 솔라노는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매우 적합한 곳이었고,

세속에서도 뛰어난 신앙을 가졌던 그는 수도원에서도 역시 동료 중에서

뛰어나게 수덕의 길로 나아갔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엄격한 극기 생활에서도 극히 명랑한 성격을 잃지 않았다.

그의 봄 날씨와 같은 온화하고 명랑한 태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었다.

 

그가 사제가 된 지 수년 후의 일이다. 나라 안에는 악성 페스트가 창궐했다.

물론 수사들은 다들 이 가련한 환자 간호에 동원되었다.

그중에도 제일 기쁜 마음으로 이 위험한 자애 서업에 헌신한 이는 바로 이 프란치스코 솔라노였다.

자기를 잊고 오직 가련한 환자들을 위해 정성껏 일을 하던 중 자신도 그 병에 감염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곧 회복되었고, 그 후는 더욱 더 열심히 환자를 도와주며 그 영혼 구원에 힘썼다.

과연 그의 노력으로 영원한 행복을 차지하게된 죄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자기를 이기기 위해

더러운 나병 환자에게 친구했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다 알고 있다.

그처럼 솔라노도 어느 날 종기가 많이 난 소년을 만났다.

사부의 덕을 본 받으려는 그는 그 고름이 흐르는 더러운 아이르 용감하게 껴안고 그 상처에 친구해 주었다.

그렇게 하니 이상하게도 그 아이의 종기가 하나 하나 살속으로 사라지고 아무 흔적도 없이 완쾌되었다 한다.

 

이 기적으로 인해 솔라노의 명성은 자자했다.

그러나 겸손한 그는 이것이 매우 마음에 부담이 되어 세인들에게 망각되기를 갈망하고,

1576년에 산간벽지에 있는 어떤 수도원에 지망해, 그곳에서 수련장으로 지원자들을 수련시켰으나

이에도 그는 만족치 못하고 다시 아프리카로 향해

 그곳에서 일개 선교 신부로서 평생을 마치기 위한 허락을 원장에게 쳥했다.

그런데 원장은 그가 지망하는 아프리카에 보내는 대신,

발견된 지 불과 90년도 안 되는 남아메리카에 파견해 우선 페루 지방에서 전교를 하도록 했다.

 

거룩한 공명심에 가득 찬 솔라노는 즉시 정든 부모 형제와 이별하고,

오직 미사 경본과 바이올린 하나만을 가지고 용감히 신대륙을 향해서 떠났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 작은 범선으로 남미에까지 장도의 항해를 하는 것이었으므로

도중에서 겪은 위험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특히 그가 파나마에서 페루에 이르는 사이에 여러번 조난을 당해,

배가 바위에 부딪치고 곧 침몰 당할 처지에까지 이르렀으나

다행히 솔라노의 기도로 인해 그 참사를 면하고 무사히 수도 리마에 도착할 수 가 있었다.

 

솔라노는 그 후 페루 북부인 독만 지방에 가서 원주민을 상대로 전교를 시작했다.

그는 다른 스페인 사람들이 그들을 대하듯이 결코 권총이나 소총이나 칼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에 거친 옷을 입고 맨발로 그들 앞에 나타나 그가 좋아하는 바이올린을 켜서

원주민들을 기쁘게 해 줌으로써 그들의 경계심을 없애고,

그 뒤 그들에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의 가르침을 설명해 주었다.

 

그의 태도나 그의 어조는 모두 사랑에 충만되었고 온화함뿐이었다.

이에 원주민들도 그에게 감화되어 세례를 받는 자가 속출했다.

게다가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기적을 행하는 은혜까지 주셨다.

 이리하여 어떤 때는 영세자가 8, 9천 이나 되었다.

 

그 기적의 수를 대강 추려보면 이러하다.

첫째로 그가 신부로서의 강복을 주었을 때 죽은 자가 살아났던 일과,

셋째로는 각각 언어가 다른 원주민들에게 한 가지 말로 강론했으나 저들은 자기 말로 알아들었다는 일과,

넷째로 메뚜기 떼로 모든 농작물이 전멸될 때에 십자가를 그음으로써 격퇴시켰다는 사건과,

다섯째로 큰 가뭄때 메마른 땅에 샘이 솟아나게 했던 일,

여섯째로 맹수도 그의 앞에서는 양과 같이 온순해졌다는 사건이다.

그러니 교황 클레멘스 10세가 그를 "신세계의 기적자"로 칭찬했던 것도 지나친 찬사가 아니다.

 

그래도 그는 절대로 교만하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에는 ’하느님께 찬미가 있어지이다." 오직 이것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런 능력을 주셔도

오히려 자신을 낮추며 어려운 고행과 열렬한 기도로써 일관했다.

이럴수록 이것은 하느님의 풍부한 은총을 이끄는 힘이 되었다.

 

솔라노는 원주민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한편,

수도 리마에 거주하는 스페인 인들에게 열변을 토하여 그들의 불신을 책망했다.

"구약 시대의 의인 나는 니느웨 시민의 타락을 규탄하며,

 지금이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무서운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 했다.

다행히 그 시민들은 그의 경계를 잘 들었으므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지금 당신들도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후일큰 지진을 면치 못할 것이요,

그 멸망의 비참함을 보리라"하고 말했다.

리마 시민들은 그의 훈계에 순종하여 화를 면했지만, 톨쿠시로 등의 시민들은 완강히 솔라노의 예언을

무시했으므로 18년 후 큰 지진을 만나 비참한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하여간 솔라노가 대성공을 거둔 것은 단지 그의 기도의 정신이었고

또한 그의 하느님과 성모께 대한 열렬한 사랑의 결정이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이 두분은 가끔 솔라노에게 나타났고,

심지어는 그의 사도적 활동에 대한 친절한 가르침도 전해 주셨다는 것이다.

솔라노는 자기 자신도 보살피지 않고 하느님께 봉사하기 21년,

피로로 인해 병석에 눕게 되어 1610년 7월 14일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최후의 말은 그의 전 생애의 모토인 ’하느님께 찬미가 있어지다"라는 구절이었다.

장례식에는 그 나라의 부왕(副王)과 리마의 대주교를 위시해 많은 신부, 수도자,

일반 신자와 원주민들까지 참여해, 마치 한나라 원수의 장례식과 같았다.

그의 전구로 인해 이루어진 기적은 생전의 갑절이 되었다.

그래서 사망 후 불과 47년만에 복자위에 오르고, 1726년에 성인품에 올랐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