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하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신 하느님

수성구 2022. 7. 13. 05:11

하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신 하느님

이사 10,5-16; 마태 11,25-27 /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2022.7.13.; 이기우 신부

 

  이사야 예언자는 거듭해서 경고하는 예언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와 백성들이 완고하게 회개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남유다왕국의 멸망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자, 이제는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이 어이없게도 북과 남의 왕국 모두에서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포로가 되어 버린 이 기막힌 역사를 해석하기에 이릅니다. 

 

  기도와 사색으로 얻은 역사 해석의 결과, 아시리아는 하느님께서 진노하시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고 쓰신 도구였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을 모른 채 자신의 힘만 과시했기 때문에, 아시리아 역시 하느님 심판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시리아는 뒤이어 일어난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결국 하느님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지는 일도 하느님 섭리에 어긋나지만 우상숭배자들이 힘으로 지배하는 것도 하느님 섭리에는 위배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배 이후에도 이러한 하느님 섭리는 여전히 무시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 형식상으로는 하느님을 섬기는 종교질서가 자리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시어 이 섭리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귀환한 제자들은 선교활동의 성과를 보고하였고, 이 보고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차서 기뻐하시며(루카 10,21) 기도하셨습니다(마태 11,25).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성전을 장악하던 사두가이들과 율법 해석을 독점한 바리사이들이었고, 그들은 종교적 권위와 지식의 권위로 이스라엘 백성 위에 군림하던 파워 엘리트였습니다. 또 ‘철부지들’이란 권력이나 지식은 물론 재산도 가지지 못해서 가정의 철부지 어린이들이 부모에게 그렇듯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힘 없는 약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엘리트 선교에는 실패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실망하시기는커녕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온 그 소박한 선교성과를 보시고서,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리라.”(루카 6,20)는 하느님의 섭리가 이루어졌다고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서구 제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그리스도교는 ‘외래종교’ 내지 ‘서양종교’로 간주되고 있거나 제국주의적 정복자들에게 부역한 자들의 종교로서 낙인찍혀 있습니다. 그나마 아프리카나 남북 아메리카 대륙을 선교할 때에는 군인과 상인을 앞세워 대량 학살을 병행한 정복선교를 자행하던 것과 비교해서, 아시아 대륙에서는 학자들을 선교사로 발탁해서 선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습니다. 조선 왕조 후기에 이 땅의 복음화에 커다란 등불이 되어 준 ‘천주실의’ 역시 마태오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왕실과 지식인 선교를 염두에 두고 펴낸 적응주의 선교노선의 산물이었습니다. 아시아 대륙에 선교하러 왔던 서양 선교사들은 예수님께서 계시하셨던 하느님의 섭리, 즉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명제와는 정반대로 활동한 셈이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땅이 아시아이고,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세운 초대교회가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증거한 자리가 또한 아시아였습니다. 그런데 서구 라틴 교회는 서구적 신관과 교회 모델을 일방적으로 아시아에 옮겨 심으려 하였고, 현지의 종교와 문화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으며, 식민모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편승하려 하였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고 현지 엘리트들을 포섭하려는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역사적 반성 위에서 아시아 주교 시노드에서 나온 새로운 제안은 바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노선에 기반한 ‘삼중(三重)의 대화 선교’ 노선이었습니다. 이 노선은 아시아 주교들이 25년 간(1974~1998) 숙고하며 논의하여 공감대를 형성한 산물이었습니다. 즉, 아시아에서 복음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는 가난한 이들과의 대화, 아시아 종교들과의 대화 그리고 아시아 문화들과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삼중의 대화를 통해서 ‘아시아 안에서 교회의 새로운 존재양식’을 창출해 내야 한다는 제안입니다. 

 

  그러자면 서양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착취당하고 수탈당하여 오늘날 아시아인들이 처해 있는 가난의 현실을 직시하되, 서양인들보다 더 정의롭게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여 인류 모두에게 하느님의 빛을 비추어주어야 한다는 실천적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 해방의 길이 예수님께서 바라셨던 파스카적 과업이 되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종교전통과 문화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가난한 이들이 주도적으로 해방의 길에 나설 수 있도록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성 있게 도와야합니다. 이는 사실상 2천 년의 시차를 넘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의 본 고장인 아시아에서 다시 한 번 당신의 선교를 주도하게 하시는 것이고, 말씀의 제 열매를 열리게 할 하늘 나라의 신비는 그 과정에서 드러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