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감동의 스토리

진주기생 산홍(山紅)

수성구 2022. 7. 11. 03:45

진주기생 산홍(山紅)


산홍 / 출처-두산백과


진주 촉석루 벼랑에 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후세에 좋은 이름으로 길이 전해지길 바라면서
새겼을 것인데, 
보는 이들은 눈살부터 찌푸린다.

더욱이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
섰던 
그 이름들도 함께 있으니, 말 그대로 오욕
의 현장이 되어 버렸다. 
논개의 넋이 깃든 곳에
한점 부끄럼을 남긴 것이 아닐까.
그 중 눈길을 끄는 이름도 있다.

山紅이란 두 글자.

당시 지체 높은 권문세가의 어르신들(?)
이름 곁에 
한 획을 남긴 산홍은 누구였을까.
바로 당대를 풍미했던 진주 출신 기생 이름이다.




진주 출신 작곡가 이재호씨(1919-1960)는
노래로써 산홍을 애타게 찾기도 하였다.

산-홍아 너만-가-고 나는 혼자-버-리-기-냐
너---없는 내가-슴-은 눈오는 벌판이다
달없는 사막이-다 불 꺼진 항---구-다

이재호씨가 1940년 태평레코드사를 통해
발표한 
세세연년’이란 대중가요의 일절이다.

가수 진방남이 구수하게 불렀을 이 노래 가사 중,
나를 혼자 버리고 무정하게 떠난 산홍이 도대체
누구 길래 
너 없는 내 가슴은 눈 오는 벌판이요,
달 없는 사막이요, 
불 꺼진 항구라고까지 말하면서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일까.


예부터 ’북평양 남진주’라고 불릴 만큼
진주 기생은 조선 8도에서 그 명성이 자자했다.
진주 기생들의 가무는 조선 제일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뛰어났으며, 
정조가 두텁고 순박함으로
총애를 받아 왕실에서 베풀어지는 잔치에

불려나간 명기들이 많았다고 한다.



진주 촉석루(晋州 矗石樓) 설경


산홍은 황현의 매천야록에서 만날 수 있다.
매천야록 광무 10년(1906)에, 진주기생
山紅은 
얼굴이 아름답고 서예도 잘하였다. 이때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자. 
산홍은 사양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 구실하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
습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이지용이 크게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 라는 기록이 있다.


글도 잘 쓰고 얼굴도 예쁜 진주 기생 산홍이
이지용의 첩이되길 거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다. 
이지용이 누구인가. 1905년
내무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적극 찬성하여

조인에 서명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다.
1907년에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니,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대단하였다.


이런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달라고
했는데 
기생의 신분으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에 충분했다. 이 일을
들은 어떤 사람이 이지용에게 시를 지어 주면서
희롱까지 하였다.

온 나라 사람이 다투어 매국노에게 달려가
노복과 여비처럼 굽실거림이 날로 분분하네.
그대 집 금과 옥이 집보다 높이 쌓였어도
일점홍(一點紅)인 산홍은 사기가 어렵구나.

매국노에게 당당히 맞선 산홍은 당시 진주
기생의 기개를 만천하에 과시한 셈이 되었다.

이를 들은 매천 황현은 일개 기생의 기개이지만
세상에 소개한 것이다.



고종 말년에 나라에 경사가 자주 있어서 연회를
열때마다 
평양 등 전국 각지의 기생들을 불러 올렸다.
이때 올라온 기생들 중 일부는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 머물면서 영업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다
보니 같은 이름의 기생이 많아 분간하기 어려웠으므로
기생의 원적과 성명을 함께 부르는 풍속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평양 기생 이난향, 대구기생 서향파
진주기생 김영월, 해주기생 이벽선 등등으로 불렀다.
진주 기생 산홍도 당시 서울에서 이지용을 만난 것으로
보인다. 
한 기록을 보면, “어떤 친일파 인사가 거금을
주고 
당시 이름난 요정인 명월관의 진주기생 산홍을
소실로 삼으려하자.....”라고 
하였다. 산홍은 명월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산홍은 선배 기생 논개의 사당을
참배하고 시 한 수를 남겼다.


역사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두 사당에 또 높은 다락 있네.
일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 놀고 있네.

논개는 왜장을 안고 몸을 날려 천추에 꽃다운 이름을
남겼건만, 
자신은 일없는 세상에 태어나 피리와 북소리
따라 
아무렇게나 놀고 있음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산홍의 시는 의기사에 들어서면 의기사 현판
왼쪽에 걸려 있다. 
현판 오른쪽에 또 한편의 시가
걸려있는데 매천 황현의 작품이다. 
1898년 매천이
진주를 방문하여 의기사에 참배하고 지은 시이다.


산홍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 세상에 알린 매천의 시가
산홍의 시와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다. 을사조약이 체결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선비 매천 황현, 
을사조약때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 이지용을 나무란 지조 높은 진주 기생
산홍의 
시가 나란히 논개 사당에 걸려있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의기사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논개 영정만 보고 발길을 돌린다.

논개 사당에 걸린 산홍의 시를 보면서,
산홍이 임진왜란 때 태어났더라면
충절의 고장 진주는 
2명의 의기(義妓)를
배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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