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정의란 무엇인가

수성구 2022. 7. 7. 03:53

정의란 무엇인가

 

호세 11,1-9; 마태 10,7-15 /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2022.7.7.; 이기우 신부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라.”고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선포 활동의 필수 수칙으로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선포해야 할 ‘하늘 나라’의 현실이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비롯한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저 주신 것이었습니다. 또 예수님 역시도 하느님께로부터 거저 받으신 것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6년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 세계인들에게 자비의 희년을 선포한 해였습니다. 이를 선포한 회칙 「자비의 얼굴」의 핵심 메시지가 바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무상으로 먼저 주어진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고 닮아야 하는 것이 제자들의,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인 이상, 이것이 하느님께서 요청하시는 정의의 덕목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한 바 있습니다. 호세아가 자신의 조국 임금과 궁정 예언자들과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추상같은 어조로 전했던 이유도 그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잊어버린 채 우상숭배에 빠져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세상의 정의는 각자 자신의 몫을 돌려주는 데 그칩니다. 만일 각자가 자신의 몫을 돌려받지 못하고 억울한 처지에 놓였을 때, 정의를 구현하려는 목소리를 높이고 그 목소리가 응답받지 못하면 저항의 행동에 나서게 되는 것이 세상의 정의에 관한 일반적인 그리고 최대한의 태도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자기 몫의 인권, 배려, 이익, 역할 등을 돌려받지 못한 이들이 많아서 정의 구현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것도 현실이고, 그래서 아직도 구현해야 할 정의가 많습니다. 특히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평등의 권리에 있어서 그러합니다. 

 

  십여 년 전에 한국에서는 미국 하버드 대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이 10만부 남짓 팔린 미국 국내에서보다도 더 많이 130만부 넘게 팔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역시 하버드 대학에서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관계를 연구한 오드 아르네 베스타는 한민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의로운 민족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가 펴낸 ‘제국과 의로운 민족’에서, 한민족은 중국민족과 뚜렷이 구별되는 한 가지 특징을 역사적으로 일관되게 보이는데, 그것이 의로움이라는 덕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민족의 정치적 지배층이나 학문적 지식층이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대주의적으로 흐르는 바람에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한민족의 민중은 그 침략해 온 적이 중국민족이건 일본민족이건 가리지 않고 떨쳐 일어나 저항했고 스스로를 가리켜 ‘의병’(義兵)으로 자처했습니다. 그러니까 베스타의 생각으로는 한민족이 더 이상 미국식이나 서양식의 정의에 대해 더 배울 것이 없고 이미 한민족은 의로움의 정신적 유전자를 물려받고 있다는 견해인 셈입니다. 

 

  하지만 현재 나타나는 한민족의 의로움에는 2%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고구려 이전 고조선 시대에서부터 한민족의 정신적 정체성에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선함이 있었고, 이를 입증하는 유적과 정신이 제천행사와 천손의식 그리고 홍익인간 정신이었습니다. 단지 고구려 이후 시대에 지배층과 자식층이 정신적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사상적으로 불교와 도교 그리고 유학 등 사대적인 경향으로 빠졌을 뿐, 민중의 심성 안에는 하느님의 선함이 도도히 흐르는 주체적 기상과 하느님 신앙의 종교성으로 흘러왔습니다. 그런 것이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간헐적으로 분출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민족의 의로운 감수성도 불의에 저항하는 세상의 정의 수준으로 격하된 감이 있습니다. 옳지 못한 것에 대해서만 저항하는 태도로 굳어진 것입니다. 불의한 상대가 사라지면 그 이상의 대책이 막연한 것이 문제이자 한국민족의 의로움이 지닌 한계입니다.

 

  따라서 지난 18세기에 들어온 복음 진리가 한민족이 예로부터 지녀온 하느님 신앙에 힘입어 백 년의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듯이, 이제는 한민족이 지닌 의로움의 한계를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극복시켜 주어야 할 차례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이웃에게 전하는 수단은 권력이나 재력, 그리고 지식도 동원될 수 있지만 신앙도 필요합니다. 과거 역사에서 지배층과 지식층이 자신들이 지닌 권세와 재물 그리고 지식을 사대주의적으로 잘못 쓰는 바람에 의로움이 선함을 결여하게 되어 급기야 하느님까지 잊어버리고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으로만 남아버린 교훈을 바로 알자면, 종교를 신봉하고 신앙을 지닌 이들이 하느님의 선함을 알려줌으로써 한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잡아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파수꾼으로서의 교회가 해야 할 선교적 본령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그리고 무상으로 당신의 자비를 베푸셨고 우리가 그 자비를 거저 받았듯이, 우리도 이웃에게 거저 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선교 활동의 대전제가 하느님의 이러한 무상성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 자비의 넉넉함을 세상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의로움이 선함을 갖추어서, 이미 하느님께로부터 거저 받은 자비를 필요한 이웃들에게 거저 주는 것이 정의라는 한민족의 기상이요 정기이며 정신적 정체성이라는 것을 증거할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