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수성구 2022. 6. 26. 05:55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13주일: 다해

 

오늘 독서와 복음은 따름이 주제이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차이가 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그를 따르기 전에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드리는 것을 허락하고 있지만(1열왕 19,20),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신 사람들에게 금하신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내용상의 차이가 있더라도 엘리사의 용기 있는 행동을 볼 수 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받아 입게 됨으로써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끼고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1열왕 19,21) 또한 자기가 농사를 짓던 쟁기를 부수고 겨릿소를 잡아 사람들을 대접하였다. 이 행동은 과거와 인연을 끊고 예언자가 갖추어야 할 근본적 자세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 부르심에 대한 기쁨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있는 모습이다.

 

복음: 루카 9,51-62: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 앞에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51-52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하신 순간을 맞고 계시다. 이 순간은 평범하지 않은 엄숙하고도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마음으로부터 확고히 결정하신 여행은 예수님께는 죽음과 십자가의 제물이 되시기 위한 여행이다. 그 이유는 바로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고 희생제물을 바치는 곳이기 때문에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 “하늘에 올라가실 때”(51절) 라는 말은 수난과 죽음으로부터 부활과 승천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질 파스카 신비를 의미한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고통의 신비이며 동시에 영광의 신비라는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이 보여준 적개심은 예루살렘에서 군중들이 보여줄 맹렬한 반대를 미리 보여주고 있다. 요한과 야고보는 “하늘에서 불을 불러”(54절) 벌을 내리자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길로 돌아갔다.”(56절) 정말 그 순간 사도들은 어떠한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몰랐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을 심판하러 오시지 않고 그들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복음은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따르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향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길과 영광의 길을 따르는 것이며 그것으로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이다. 루카는 이 세 장면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데 필요한 조건들을 우리에게까지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첫째 조건은 하느님의 뜻과 관계가 없는 모든 인간적인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57-58절)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 19,30) 예수님께서는 당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셨다. 마지막 순간에 차지하시는 십자가도 다른 사람들이 짊어지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조건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십자가의 길에 자기 자신을 열어 놓는 것이다. 두 번째는 소유물뿐만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사람들로부터도 자신을 끊으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59-60절) 죽은 자들은 아직 영적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아직 부활의 새 생명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이다(로마 6,13 참조). 이 생명은 복음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잠시도 지체할 수 없는 급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에 대한 부르심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은 다시 생각한다든지 향수에 젖어 뒤를 돌아봄 없이 항구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1-62절) 돌투성이의 밭을 가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을 갖지 않고서는 헛된 수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 장면을 보면 누구도 제자로서의 완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다. 저마다 자기 일을 내세우며, 어떻게 해서든 낡은 세계의 한 부분이라도 거머쥐고 있으려고 하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주시고자 하는 새로운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부름을 받고 이미 내디딘 첫걸음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을 그의 과거 생활로부터 갈라놓는다. 이처럼 부르심은 즉시 새로운 상황을 만든다. 이전의 상태에 머무는 것과 따르는 것은 서로 배타적인 두 개의 입장”이라고 본회퍼는 말한다(D. Bonhöffer, Sequela, Brescia 1971, 2a, p. 41)

 

그래서 우리 신앙인은 내적 자유에 대한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갈라 5,13) 말한다. 자유는 오직 성령 안에서만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고 보존될 수 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갈라 5,18) 참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만이 주님이 어디에서 부르시든지 그분을 따라갈 수 있다. 그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말씀의 실천에서 온다. 진리의 말씀을 실천하며,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