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수성구 2022. 5. 5. 03:44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사도 8,26-40; 요한 6,44-51 / 2022.5.5.;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이기우 신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사기지은을 사도들에게만 발휘하신 것이 아니라 부제 필리포스에게도 발휘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나, 남쪽 에티오피아의 고관에게나 그리고 서쪽 해안지방의 아스돗과 카이사리아에게도 종횡무진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그에게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그가 한 곳에서 복음 선포 임무를 마치면 그를 잡아채듯 데려가셨습니다.

 

  필리포스가 사마리아에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나서, 악령을 몰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사도 8,6-8).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천사를 시켜 그에게 사마리아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라고 하셔서,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가다가 에티오피아 사람을 만났습니다. 왕실 고관이었던 그 에티오피아 사람은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는데, 필리포스에게 그 뜻을 풀이해 달라고 청해 왔습니다. 필리포스가 그 대목을 보니, 고난받는 메시아의 셋째(이사 50,4-11)와 넷째 노래(이사 52,13-53,12)였습니다. 그래서 필리포스는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기다려온 대망사상과 그 메시아가 영광 대신에 받게 된 수난의 운명을 내다본 이사야의 예언, 그리고 과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와 그 결과로 겪으셔야 했던 수난에다가 부활하신 이야기들을 그 고관에게 전해 주었더니 세례를 받겠다고 청해서 바로 세례를 주었습니다(사도 8,35-38). 

 

  그는 왕실의 고관이었으므로 그의 세례는 복음이 에티오피아를 비롯해서 인접한 북아프리카 지방의 여러 나라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본시 에티오피아인들은 노아의 둘째 아들인 함의 자손들인 동시에, 바벨탑을 세우고 수메르 문명의 시조가 된 함의 아들 니므롯의 후손들이기도 했습니다(창세 10,6-8). 니므롯은 힘센 장사여서 많은 무리를 이끌었으며 신아르 지방에 왕국을 세우고 바벨탑을 세웠습니다(창세 10,10; 11,2-4). 그런데 니므롯과 그 수하들의 의도는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자신들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것이었으므로, 하느님께서 그들의 말을 흩어놓아 탑이 세워지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창세 11,4-8). 수메르 문명이 이렇게 시작되었는데, 이제 필리포스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짐으로써 2천 년 가까이 우상을 숭배하던 문명이 하느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를 만난 것입니다. 

 

  이에 반해 노아의 첫째 아들인 셈의 자손 중에서 4대손 에베르의 큰 아들인 펠렉과 작은 아들인 욕탄에게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맡기신 신앙의 문명은 바벨탑의 서방과 동방으로 나뉘어 퍼져나갔습니다(창세 10,21.25). 펠렉의 6대손인 아브람은 수메르 문명을 탈출하여 바벨탑의 서쪽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였고(창세 11,16-27), 욕탄은 후손들과 함께 바벨탑의 동쪽인 메사에서 동부 산악 지방인 스파르 쪽까지 동방에 하느님의 신앙 문명을 세웠습니다(창세 10,30). 그 후 2천 년 가까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오셨고, 예수 부활 이후 그리스도 신앙이 바오로와 그 후임자 선교사들에 의해 서향했다가 1천6백여 년이 흐른 후에 아시아에 다시 전해졌다가, 다시 2백여 년이 흘러 아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에 자리잡은 한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신앙의 복음이 전해지던 그 무렵, 한민족은 욕탄과 그 후손들에 의해서 전해진 하느님의 신앙 문명에 대해 알고 있었으므로 조선 왕조와 유림들이 가한 백년 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일단 받아들인 신앙을 굿굿하게 지켜냈습니다. 이 하느님 신앙 문명의 흔적은, 제천의식과 고인돌 유적, 천손의식과 홍익인간의 이념입니다.

 

  욕탄과 그 후손들이 노아로부터 전수받은 하느님 신앙 문명을 동방의 여러 지역, 특히 가장 동쪽에 살면서 밝은 해를 숭상하며 제관의 복장인 흰 옷을 즐겨입던 배달민족에게 전해준 지 무려 3천여 년만에 그리스도 신앙의 복음과 만났으니, 그 과정이 실로 오묘합니다.

 

  이벽의 5대조 이경상은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를 수행하여 북경에 가서 아담 샬 신부를 만나 천주교 서적을 다수 얻어왔으므로 이벽은 어려서부터 마테오리치가 지은 ‘천주실의’를 비롯하여 당시 간행된 천주교 서적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기가 막힌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니 이 땅에 자생적으로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복음 진리가 들어온 과정이 하느님의 기묘한 섭리에 의한 결과였다고 교회사가들이 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과정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의 사기지은을 발휘하시어 필리포스를 움직이신 것처럼, 이탈리아 선교사인 마테오리치와 그의 초청을 받아 온 독일 선교사인 아담 샬 그리고 이경상을 통해서 복음 진리가 먼저 전해졌다가 150여 년, 다섯 세대를 거친 후에 그 5대손인 이벽을 통해 결정적으로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가 한민족에게 전해지도록 섭리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이 장구한 역사의 과정에서 유난히 선과 의로움의 가치에 민감하고 신앙 진리를 스스로 받아들였으며 또 박해도 능히 이겨내고 아시아의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교회를 이룩할 수 없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주님의 성령께서 위 네 사람을 이끄시어 이룩하신 위대한 복음화의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