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성화요일]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수성구 2022. 4. 12. 03:58

[성화요일]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이사 49,1-6; 요한 13,21-38 / 2022.4.12.; 성주간 화요일; 이기우 신부

 

  하느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하느님께서는 메시아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셨습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이 말씀은 이사야가 전한 메시아 예언 중 둘째 꼭지의 결론입니다(이사 49,6). 메시아께서 민족들에게 빛을 비추시기 위한 역할의 첫 번째는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는 일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심으로써 참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그 열두 제자를 주춧돌로 하여 ‘이스라엘의 생존자들’, 즉 아나빔들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우상숭배에 물들어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했던 유다인들은 모조리 제외시키시고, 하느님 신앙에 충실한 그들만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우선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어(마르 6,7-13) 불러 모으신 예순 제자들까지 해서 일흔두 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루카 10,1-12). 이 일흔두 제자들 말고도 니코데모, 아리마태아의 요셉, 라자로 등을 비롯한 토박이 제자들까지 합하여 도합 백 스무 명이 또 포함될 수 있습니다(사도 1,15). 

 

  그런데 이들 남성들 말고도 여인들이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비롯해서, 수산나, 요안나, 막달라 마리아, 라자로의 두 동생인 마르타와 마리아 등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도 들던 여인들이 그들입니다. 이들까지가 모세 시절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의 유다인 혈통 중에서 예수님 곁에 남은 자들입니다. 이 남은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이 셋째 역할로 남아 있습니다만, 이 남은 자들 중에서 배신자들이 나왔습니다. 

 

  애초에 열두 제자 중 하나로 부름을 받았던 이스카리옷 유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스승을 팔아넘기는 배신을 저질렀고, 열두 제자 중 수제자로 임명을 받았던 베드로는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배신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뭇 민족들에게 하느님의 빛을 전하는 이 세 번째 과정은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질 것인데, 이 유다와 베드로에서 일어난 바와 같은 배신의 유형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보다 앞서서 자신의 뜻대로 끌고 가려 하다가 배신을 저질렀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뒤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기를 거절하다가 배신을 저질렀습니다. 

 

  메시아적 백성으로서 우리 민족이 민족들의 빛을 비추고자 하면 첫째, 예로부터 제천의식(祭天儀式)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온 하느님 신앙의 전통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는 한민족이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천손의식(天孫意識)의 발로였는데, 원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던 아담처럼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빌고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처럼 감사를 드리는 한편, 무엇보다도 속죄와 감사의 지향을 담아 하느님의 축복을 바라는 제사의 전통을 계승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미사는 그리스도를 제물로 삼아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기도는 제물 없이 바치는 제사입니다. 여기서 제사를 거부하는 일이 배신입니다.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자신의 뜻을 하느님께 강요하려 들면 유다적인 배신이 될 것이요, 제사를 지내되 하느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짊어지기를 싫어하면 베드로적인 배신이 될 것입니다.  

 

  둘째는 공동체적인 문화를 이룩해온 역사를 계승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고 하시며 공동체를 원형질로 하는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개인의 존엄성이 짓밟히지 않고 존중되면서도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의 문화를 꽃피우라는 믿음의 요청이 이 ‘우리’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사실 미사는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이면서도, 믿는 이들이 형제자매의 ‘우리’로 모여서 성찬을 나누는 공동체의 잔치입니다. 그런데도 개인들의 존엄성을 존중하기보다 억지로 끌고 가려 하면 유다적인 배신이 되어서 집단화되어 버릴 것이요, 우리가 되려 하지 않고 제각기 살려 하면 베드로적인 배신이 되어서 모래알처럼 흩어진 개인들의 집합이 되고 말 것입니다. 

 

  셋째는 공동선을 이루는 지혜를 성령의 이끄심에서 얻어서 우리 사회를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로서 일체이시듯이, 다양한 가운데에서도 일치를 이루는 것이 공동선의 지혜입니다. 그러자면 우선, 전쟁을 잠시 멈추고 있을 뿐인 남북한 겨레가 평화의 가치를 위하여 서로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민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룩해야 할 과업을 강대국들의 시혜에 의존하거나 정부에만 맡겨두어서는 메시아적 백성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기는커녕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요원해질 것입니다. 유다 최고의회의 힘을 이용하려 했던 유다가 걸려 넘어진 유혹입니다. 또한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양극화 현상에 대하여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정책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대동세상을 이룩해야 할 과업을 부자와 기득권 세력의 자선에 기대하거나 정부에만 맡겨두어서는 내부 갈등이 무한증폭되면서 메시아적 백성이 대동세상을 이루기는커녕 민족들의 빛이 되기 전에 내부 동력을 소진하고 말 것입니다. 십자가를 피하고자 했던 베드로가 걸려 넘어진 유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