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성 월요일]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수성구 2022. 4. 11. 04:14

[성 월요일]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이사 42,1-7; 요한 12,1-11 / 2022.4.11.; 성주간 월요일; 이기우 신부

 

  성주간 월요일인 오늘, 교회의 전례는 이사야의 예언과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 이야기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선포합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으로 끌려가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던 민족사의 암흑기에 활약했던 예언자입니다. 70년에 걸친 유배생활의 직전과 직후까지 모두 3세대에 걸쳐 학파를 형성하며 예언활동을 수행하였습니다. 동족이 처한 상황이 암울했던 만큼 이사야는 당대의 민중인 아나빔들과 기도로 통공하며 그 어둠을 몰아낼 희망을 하느님께 탄원하여 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예언의 백미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자는 메시아 대망 사상이었고, 이 사상이 ‘고난받는 종의 노래’ 네 편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은 그 첫째 노래로서,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 이룩하실 새로운 미래를 아주 선명하게 내다보았습니다. 그분은 민족들에게 공정을 펼 것이며, 사회적 약자들을 돌볼 것이라 하였습니다. 세상의 진실을 보는 눈을 뜨게 해 줄 것이며, 억눌려 갇힌 이들을 풀어줄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메시아의 이런 활약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새 역사를 펼치시는 것이라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렇게 창조적인 전망에서 이사야는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하였습니다. 이사야가 활약한 시기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5백 년이나 이른 때였는데도, 마치 눈 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을 알려주듯이 이사야는 예언한 것입니다. 그도 역시 하느님의 영을 받아 말씀을 전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과연 세상에 오신 메시아로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공생활 동안에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선포로써 실현하셨고, 십자가 수난과 죽음 이후에는 부활과 발현으로써 실현하셨습니다. 부활하신 메시아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성령으로 발현하시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도록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메시아의 이름으로 세례 받아 새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고,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인류로서 세상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거룩하게 변화시키라는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런 복음화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새 인간이신 예수님을 닮는 것이고, 이를 부활이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부활 신앙으로 성령을 따르면, 당신이 공생활 중에 이룩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증하셨습니다. 당신이 믿는 이들 안에서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부활 신앙이 중요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절친했던 벗 라자로가 죽었을 때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부활 신앙의 성사적 예표로 삼으셨습니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일은 오직 하느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인데, 예수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소생시키심으로써 하느님의 부활 권능을 일깨우신 것입니다. 소생은 육신이 되살아나는 일이라서 수명이 다하면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지만, 부활은 영혼이 되살아나는 일이라서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산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마침 그때가 파스카 축제가 임박한 때였고, 또 라자로의 집은 예루살렘 근처인 베타니아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다는 소문은 급속도로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에게로 퍼져나갔고, 그 덕분에 예수님의 명성은 높아질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한 민중봉기를 염려하는 로마 총독이나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은 물론 라자로까지도 죽이려 들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럴 가능성을 미리 내다보시고도 감행하셨습니다. 그럴 만큼 부활 신앙을 일깨워주시려는 예수님의 뜻과 각오는 엄중한 바가 있었습니다. 

 

  라자로의 소생을 기뻐하는 잔치는 그래서 열렸고, 동생 마리아는 귀한 나르드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림으로써 임박한 그분의 장례를 미리 치루고자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죽기를 무릅쓰고 자신의 오빠를 살려주신 데 대한 고마움을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하고 싶었던 것이고, 예수님으로서는 복음선포로 일관한 공생활 3년 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아보시는 예우였습니다. 그분으로부터 복음을 듣거나, 기적으로 병을 치유받았거나, 마귀를 쫓아내어 주시거나 등 혜택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은 숱하게 많았어도, 그분께 감사를 드리거나 예우를 갖춘 사람은 그만큼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이스카리옷 유다는 3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값비싼 향유를 아까워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말리지 않고 마리아의 행동을 고맙게 받으셨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마리아가 행한 이 ‘거룩한 낭비’를 계승하는 예절입니다. 그래서도 전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바는 부활 신앙의 의미와 중요성입니다. 말씀과 성찬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계승하기로 다짐하는 일이 우리로 하여금 부활 신앙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들 각자를 향해서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메시아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