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브라함과 이벽의 경우

수성구 2022. 4. 7. 06:21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브라함과 이벽의 경우

 

창세 17,3-9; 요한 8,51-59

2022.4.7.;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이기우 신부

 

  아브람은 칼데아 우르에서 살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그 고향과 집은 수메르 문명이 번성하던 곳이었고 인류 역사의 초기 문명을 대표할 만한 사회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까지 인류는 종교적인 문화양식을 갖추기는 했지만 그것이 인간의 상상력과 영감으로 고안해 낸 것이어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당신의 거룩한 뜻을 담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란 탓에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상숭배적 종교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참된 신을 찾고 있던 아브람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네셨습니다. 그것이 방금 소개해 드린 부르심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은 아브람이 그 말씀을 알아 듣고 고향과 집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역사가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 보면, 그런 아브람에게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을 건네시고는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하느님의 조건은 쌍무적인 것이었는데,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그 후손들을 늘어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보호해 주시겠다고 하셨고, 아브람과 그 후손들은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 계약의 표시로 두 가지를 명하셨는데, 하나는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라는 것과 할례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새 이름과 할례로써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 인류 역사에서 생겨난 표시가 되었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서 하느님과 맺은 이 계약은, 모세를 통해 하느님과 맺은 시나이 계약으로 구체화되었고, 다윗을 통해 하느님과 맺은 시온 계약으로 더욱 구체화되어 나갔습니다. 이러한 계약의 흐름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열두 제자와 맺으신 성체와 성혈의 계약으로써 집대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신원을 일찌감치 알아본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 세례자 요한인데,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다”(요한 1,29).

 

  교회는 성체성사를 거행함으로써 이 계약을 상기시키고 갱신하며 계승합니다. 새롭고 영원한 이 계약을 맺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을 내놓으셨고 당신 피를 흘리실 각오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계약에서는 빵을 당신 몸이라, 포도주를 당신 피라 부르시면서 앞당겨 일치를 시키셨습니다. 빵에 떼어 나누어지듯이 당신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포도주가 나누어지듯이 당신 피가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리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세우신 계약입니다. 당신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삶을 기억하여 계승하게 하기 위한 계약이었던 것이요, 이 제자들이 이미 저질렀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한편 세상의 죄에 대해서도 물들지 않기를 바라는 뜻으로 세우신 계약이었던 것입니다. 

 

  이 계약을 염두에 두시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시요, 생명의 물이심을 밝혀주셨으며, 간음하다 끌려온 여인의 죄를 관대하게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심판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그 옛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신 흐름의 결정판이었던 겁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하느님 곁에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첫 계약에서도 이 빵과 물과 자비의 은총을 베풀고 계셨으며, 때가 차자 드디어 당신이 직접 당신 백성에게 오셔서 인류가 하느님과 제대로 관계를 맺는 길을 알려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기적을 보며, 그분의 용서를 체험하면서도 유다인들은 그분께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이라는 신성과 선재성(先在性)을 짐작할 수도 없었기에 예수님을 오해했고 돌을 던져 죽이려고 했으며, 결국 아브라함 이래의 계약을 계승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 일어났던 다행스런 일이,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로 세례자 요한에게도 일어났던 은총스런 일이 일어나서 리스도 신앙의 진리가 이 땅에 오묘한 섭리로 들어오던 18세기 무렵에 예수님을 알아본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이벽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 당시 조선 사회의 무신론적 성리학 사조와 무지막지한 신분차별에 염증을 느끼던 차에 조상들로부터 천주학 서적을 물려받아 마음껏 독서하며 탐구할 수 있었던 이벽은 세례를 받기도 전에 천주교 교리에 통달함은 물론 스스로 신앙의 수련을 쌓아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사문난적의 사상통제를 뚫고 같은 처지에서 개혁의 열망을 품고 학문에 정진하고 있었던 구도적 선비들과 함께 한국교회는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적적인 오묘한 섭리에 담긴 뜻은 분명합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에게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의 창립 주역이 된 이벽에게 있어서도 믿음은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