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잊지 않고"(이사 49,15ㄷ), "다시 살리리라"(요한 5,21)
이사 49,8-15; 요한 5,17-30 / 2022.3.30.;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은 부활 신앙의 사목적 국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38년 동안이나 중풍을 앓는 바람에 앉은뱅이로 살아가야 했던 병자를 벳자타 연못에서 만나신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고쳐주셨는데, 그날이 안식일이었고 또 치유된 그 병자가 자신이 깔고 앉아 있던 들것을 들고 걸어감으로써 그 어떠한 행위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 계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은 갑자기 예수님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시작된 이 비난은 급기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예수님의 신앙까지 트집을 잡음으로 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참에 본격적으로 하느님 아버지에 관해서 가르쳐주시는 계기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이 모르던 하느님의 모습들에 대해서 이렇게 일러주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고서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때가 되면,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 신관 교육내용의 초점은 부활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있어도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데, 그 죽은 이들을 일으켜서 다시 살리시는 부활이야말로 하느님의 일이요 예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순종하여 선을 행함으로써 부활한 이들은 생명을 얻어 그야말로 사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지만, 이러한 일에 거부하여 악을 저지른 자들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죽음을 살게 되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하느님께서나 예수님께서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없듯이, 인간을 지어내신 창조주이시기에 가엾이 여겨서 하시는 일일 따름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예수님께서도 그리고 성령께서도 하느님을 닮도록 지음받은 사람이 하느님을 닮기는커녕 죄악에 빠져 살아가는, 그런 죽은 모습을 모른 척 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잊지 않고 찾아오시는 것이고, 그런 하느님의 일을 보고 예수님께서도 따라 하시는 것이며, 그런 예수님을 따라서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하시는 가장 주요한 일은 사람들을 인간답게 부활시키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살아가도록 일으켜 세우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일이 예수님을 추종하는 교회의 일이기도 합니다.
38년이면 거의 반평생인데, 벳자타 연못의 그 중풍병자는 반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아가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에게는 그를 축하해 주거나 함께 기뻐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심하게 오그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가 들것을 들고 걸어가자 하필 그날이 안식일이어서 안식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를 고쳐주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고서는 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졌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게서는 안식일에도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계시고 당신은 아버지를 따라 할 따름이라고 대답하시니까, 어찌 감히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냐며 또 따졌습니다.
이런 언동을 한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은 살아 있어도 죽어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도무지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이 없고 다른 이들의 기쁨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 즉 괴물 같은 좀비였습니다. 반평생을 불구로 살아온 이를 연민으로 대하지 못하고, 안식일에 안식일다운 선행을 하시는 예수님을 거룩하게 보지 못하는 눈먼 장님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자신들이 정해 놓은 율법 속의 죽은 글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미 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살아서 죽음을 살고 믿어도 지옥을 사는 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사람들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 부활시키는 일에 동참할 당신 협조자들에게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이런 예언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잘못된 교리 교육을 받아서, 부활과 부활 신앙에 대해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본 독서와 복음의 말씀에서처럼, 부활은 지금 일어나야 하는 현재의 일이고, 하느님과 예수님의 최고 관심사입니다. 부활은 말 그대로 거듭 나는 삶이며, 사람이 본래 창조된 대로 하느님을 닮기 위하여 살아가는 진정한 삶입니다. 사순시기는 부활대축일로 시작되는 부활시기를 위해 준비하는 때이듯이, 주님 수난의 사십일 동안 우리는 부활이 과연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부활은 죽은 다음에 일어날 사건이며 실제 부활하는지 하지 않는지 검증할 방법도 없는 막연한 일로 치부하고 있고, 더욱이 죽었던 육신이 다시 숨을 쉬며 살아나는 그런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부활은 상상 속에만 남아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이 간직했던 부활관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말씀대로 부활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부활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닮고자 하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면, 우리의 부활은 그제서야 시작될 것입니다. 남은 사순시기에도 이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부활을 살기 위한 묵상과 기도가 여러분의 고신 극기와 절제 인내의 지향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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