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이사 65,17-21; 요한 4,43-54 / 2022.3.28.;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은 부활 신앙의 창조적 국면에 대해 묵상한 바를 강론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카나 마을에서 헤로데 왕실의 관리를 만나셨는데, 그의 아들이 거기서 제법 떨어진 카파르나움에서 죽을 병을 앓고 있으니 가서 살려주십사 하는 청원을 받으셨습니다. 당시 헤로데는 에사우의 후손인 에돔족의 후예로서 이두메아 출신이었는데, 아버지 헤로데 대왕의 사후에 그 권력을 여러 형제들과 함께 나누어 받아 갈릴래아 지방을 다스리던 영주였습니다. 헤로데 영주는 로마 제국의 위임 통치를 하고 있었으므로 백성을 위하는 대신 그 반발을 막아주는 방패막이에 불과했습니다. 악정을 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바른 소리로 비판하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것도 그 헤로데 영주였으므로, 그의 관리라면 유다인들과 예수님께는 원수와 다름없는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망설임 없이 그것도 말씀 한 마디로 그의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카파르나움까지 가실 것도 없이 원격으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었습니다. 이 사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바를 몸소 실천하셨다는 것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을 말씀 한 마디로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소생 기적이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죽어가는 사람만이 아니라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을 살려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이라든가(루카 8,55), 과부의 외아들(루카 7,14), 심지어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친구 라자로를 살려내신 일이(요한 11,43)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소생 기적 사건들을 통해서 깨우쳐야 할 것은 소생은 부활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소생은 죽은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지만 수명이 다하면 죽게 됩니다. 하지만 부활은 육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거듭 태어나는 일이고 다시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소생 기적을 일으키심으로써 당신이 지닌 신적 권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소생 기적 사건 중에서 라자로의 소생 기적 사건에 대해서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각별히 절친했던 벗 라자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그의 누이들이 죽기 전에 일찌감치 전해왔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미적거리시다가 죽은 다음에야 가서 살리셨습니다. 더군다나 그 시기가 파스카 축제가 임박한 때였고, 그 장소 또한 베타니아로서 예루살렘과 매우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만일 예수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다면 그 소문이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모여든 군중에게로 순식간에 퍼져나갈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명성은 높아질 수 있겠지만, 그럴수록 민중봉기를 염려하는 로마 군대가 계엄령을 내려서 학살을 저지를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눈치챈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러 가실 때, “우리는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비장한 각오를 표명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죽을 각오를 하고 일으키시는 라자로 소생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제자들과 당신을 믿게 될 이들이 부활 신앙을 지니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일깨우고자 교회의 전례에서도 창조에 관한 이사야 예언을 독서로 배치해 놓았습니다. 소생은 육신에 붙어 있던 생명의 기운이 다시 돌아오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부활은 육신과 정신과 영혼이 다 함께 생기를 되찾는 것이고 이 기운은 순식간에 다른 이들에게로 널리 퍼질 뿐만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활이야말로 새 창조에 해당됩니다. 창조의 국면을 생각해 보면 이러합니다.
첫째, 우리의 혼은 하느님의 영과 소통을 해야 살아있는 영혼이 됩니다. 종교의 본령입니다. 개인이든 겨레든 사람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야 제대로 된 종교입니다. 미신적인 종교는 악령이나 귀신과 소통하게 해서 영적 질서를 더 어지럽힙니다.
둘째, 영혼의 생기가 정신과 마음을 움직입니다. 문화의 영역입니다. 개인의 마음도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민족의 문화도 자기만 평안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특히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져주어야 보편적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전에 유행했던 강대국의 문화 즉 로마나 프랑스, 영국, 미국, 중국이나 일본 등의 문화와 최근의 한류 문화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셋째, 정신과 마음이 몸도 움직입니다. 경제의 자리입니다. 흔히 민생경제라 말합니다. 정치적 관심사는 사람들이 고르게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는 평등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창조하시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소생 사건들을 통해서 부활 신앙을 예비시키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활을 다 마치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지금은 이 부활을 위한 수난을 묵상하는 사순시기입니다. 머지않아 곧 예수 부활 대축일이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우리 겨레에게 부활 신앙을 불어 넣어주시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백합 > 오늘의 강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순 제4주간 화요일 / 정진만 안젤로 신부 (0) | 2022.03.29 |
---|---|
사순 제4주간 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0) | 2022.03.29 |
사순 제4주간 월요일 / 정진만 안젤로 신부 (0) | 2022.03.28 |
사순 제4주간 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0) | 2022.03.28 |
[사순 제4주일]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0) | 2022.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