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일]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여호 5,9-12; 2코린 5,17-21; 루카 15,1-32
2022.3.27.; 사순 제4주일; 이기우 신부
1.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우리가 사순시기에 듣고 있는 복음은 주님 세례 축일에 들었던 대로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역사의 도정에서 겪어야 하는 일들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악마의 유혹을 받으시며 대결하셨고(제1주일),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에게는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시며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셨으며(제2주일), 포도밭에 심겨진 무화과나무처럼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모두가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도 들려주셨습니다(제3주일). 그리고 오늘 사순 제4주일에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 말씀을 예수님께서 들려주십니다. 이 말씀은 세리와 죄인들이 몰려들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자, 이를 지켜본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투덜거리며 그분과 그분의 생활양식을 비난했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사회적으로 낙인찍고 종교적으로 소외시켰던 세리와 죄인들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그들에게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의 생활양식
예수님의 생활양식에 대해 생각해 보는 오늘, 전례의 성격은 이미 입당송에 잘 나와 있었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이사 66,10-11). 즉, 슬퍼하던 이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되찾아 주시려던 삶이 예수님의 생활양식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가르치신 진복팔단의 말씀은 예수님 가르침의 주제였습니다. 그 행복을 우선적으로 차지해야 할 사람들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살거나 일하는 현장에 가야 그들을 위로할 수 있고 그들에게 행복을 전해 줄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되찾아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장성과 공동체성 그리고 가치지향성이 예수님의 뚜렷한 생활양식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먹보요 술꾼”(루카 7,34) 이라는 모욕적인 언사로 비아냥거렸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엘리트로 대접받던 이들의 이런 반응은 성전이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면서도 가식적인 처신을 하던 자신들의 생활양식과 예수님의 생활양식이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만들어놓은 유다교 제도의 혜택을 입은 엘리트였고, 자신들이 주석해 놓은 율법 규정 체계를 앞세워 세상을 해석하는 보수주의자들이었으며, 윤리적으로 가식적이었으되 경제적으로 부유해서 살아가는 데 아무 걱정이 없던 중산층이었습니다.
3. “내가 오늘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
오늘 제1독서인 여호수아기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 첫 수확을 거둔 이야기입니다. 수치스러운 노예살이를 하며 지내던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살았던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 거둔 소출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여호 5,9ㄴ). 이는 더 이상 하늘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또 이 자립생활이 지속가능한 생활양식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척박한 땅 투성이였던 광야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지만, 호수와 강이 있는 가나안 땅에서는 농사가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역사도 지난 과거의 삶의 양식을 발판으로 삼아 도약하여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 이어 이제는 로마의 힘에 의해 자기네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또 다시 백성을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억누르고 있던 기존의 체제는 청산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새로운 생활양식의 가치가 지닌 역사도약적 의미였습니다; 현장성과 공동체성과 가치지향성.
4. 의로움으로 대동세상을
오늘 제2독서인 코린토 후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새로운 역사의 특징을 의로움 안에서의 화해로 설명합니다. 그가 옳게 설명한 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사람입니다”(2코린 5,17).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모두 과거의 행적과 상관없이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자 메시아적 백성에로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므로, 다 같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의로움을 기준으로 화해해야 한다고 사도 바오로는 역설하였습니다. 이제 새로운 하느님 백성 안에서는 유다인이건 그리스인이건 아무 차별이 없게 되었습니다. 의로움을 기준으로 작은 차이를 넘어서 커다란 일치를 지향하는 대동세상이 된 것입니다.
5. 거룩함으로 복음화를
새 역사를 창조하는 하느님 백성에게 있어서 의로움이 필요조건이라면 거룩함은 충분조건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바르게 처신함이 예수님의 의로움이 아니고 하느님의 자비를 다른 이들에게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조건 없이 다른 이들에게 실천하자면 우리 자신이 의로운 것만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손해를 보고 희생을 감수할 정도로 거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 거룩함의 실체였습니다. 누구든지 이 의로움을 넘어서는 거룩함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는 말씀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세속적인 의로움을 넘어서는 거룩함을 지향하는 의로움에로 나아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복음화의 도구로 쓰십니다. 기껏 죄를 짓지 않는 정도의 생활양식을 보고 감탄하거나 존경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현장과 공동체와 가치 지향이라는 거룩한 생활양식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6. 실사구시의 신앙
이 땅에 복음 진리가 들어올 때, 한 가지 기저(基底) 요인과 또 다른 한 가지 촉진(促進) 요인이 도움이 되어 주었습니다. 기저 요인은 한민족 전통으로 내려오던 하느님 신앙이었고, 촉진 요인은 서양 선교사들이 전해준 과학과 철학에서 비롯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이었습니다.
역사 초기부터 3천 년 동안 한민족을 하나로 일치시켜 주었던 하느님 신앙은 불교와 유교 등 외래 종교들이 들어오면서 민족 생활의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러기를 2천 년, 민중의 종교심성 속에 잠재되어 있던 이 하느님 신앙이 이벽과 천주실의에 의해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동료 선비들과 중인, 상민, 천민 할 것 없이 모두가 종교심성으로 하느님을 알고 또 믿고 있던 이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백 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인권을 모르고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모르던 왕조와 유림들에게 저항하여 새로이 양심과 사상의 자유, 만민평등과 남녀동등의 가치를 심어 주었습니다.
또 다른 촉진 요인은 실사구시의 학문이라 하여 실학(實學)이라 부르던 합리적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민족의 종교심성 속에 자리잡고 있던 하느님 신앙은 이 실학에 의해서 자극받아 민족 사회의 최고선과 공동선을 구현하는 데 커다란 도약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다분히 이 명칭은 공리공론(空理空論)을 일삼던 성리학을 극복하고자 하던 정신적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 교리 또한 이 실학적 사고방식으로 보유론(補儒論)적 노선을 취하여 우리 민족의 종교심성에 자연스럽게 젖어들어 올 수 있었습니다.
7. 박해가 초래한 그늘
오늘날 우리 교회에는 성리학 세력이 가했던 백년 박해가 초래한 그늘이 아직도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5백만 명을 넘는다는 세례자 통계가 무색하게 예수님의 생활양식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듯하고, 마치 심리적으로 박해시대를 사는 듯 위축되고 소극적이고 인습적이며 타성적인 신앙생활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가치 지향적이지도 않고, 공동체적이지도 않으며, 현장적이지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눈으로는, 집 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우리 교회의 신자들을 보고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첫째 아들에 빗대셨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보여준 처신이 어느 새 우리 교회에 짙게 침투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전해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 교회를 실사구시적으로 쇄신해야 할 요청이 절박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8.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오늘 복음의 내용으로 보거나, 스스로 신앙 진리를 찾았던 우리 교회의 역사를 보거나 우리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여호수아기의 말씀대로 심리적 박해시대의 수치를 치워 버리고 자발적인 실사구시의 정신 전통을 회복해야 하고, 코린토 후서의 말씀대로 이전까지 어떠했든지 간에 복음 안에서 화해한 새 백성의 신선함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비유말씀대로 복음적 가치를 찾고, 공동체로 모여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은 물론 믿음을 잃어버린 이들까지 돌아오도록 기다리면서, 모두가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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